20.09.12 20:34최종 업데이트 20.09.12 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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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인종과 문명의 융합으로 빚어진 서유럽과 달리 동유럽 지역은 역사적·지리적으로 같은 원형을 상당 부분 서로 나눈 문명 공동체의 땅으로 불릴 만하다. 이곳 문화를 일컫는 '슬라브'라는 명칭은 '말'을 의미하며, 슬라브인이라 함은 결국 '서로 말이 통하는 사이'라는 뜻이 된다. 동서를 막론하고 이방인을 '제대로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로 인식하는 사유는 그들에게도 예외가 아닌 듯하다.

기록에 따르면 슬라브 문명이 분화하기 시작한 것은 고대부터 있어 온 다양한 다른 민족들과의 충돌 때문이다. 슬라브 문명의 요람지는 다양한 문명들이 지나는 경유지 역할을 해왔다. 충돌을 피해 이동한 슬라브인들은 남쪽으로는 발칸 지역, 동쪽으로는 우랄산맥까지 진출했다. 이렇게 광활하게 펼쳐진 슬라브 문명이 맨 처음 시작된 곳이 지금의 벨라루스가 위치한 곳이다.


많은 문명의 요람지들이 겪었던 현대사의 시련을 벨라루스도 피해 가지 못했다. 러시아, 독일 등의 거듭된 침략으로 국토는 끝없이 유린당했다. 특히 나치 독일의 침략 당시 벨라루스에 사는 90%의 유대인과 전 국민의 25%가 목숨을 잃었다. 전 국토에 퍼져 있는 역사 유물들도 이때 대부분 파괴됐다.

소비에트연방(소련)에 합병된 이후에는 단 한 기의 원자력 발전기도 보유하지 않은 벨라루스가 체르노빌 사고의 70%에 해당하는 방사선 피해를 떠안았다. 지금도 여전히 200만 명의 벨라루스인들이 방사능 오염지역에서 살고 있다. 

유럽의 마지막 독재국가

비극의 땅 벨라루스는 이처럼 20세기의 상흔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채 '유럽의 마지막 독재국가'라는 불명예까지 안고 있다. 그런가 하면 지구 반대편에 있는 한국에서는 존재감마저 미약한 잊힌 국가가 된 듯하다. 

그런 벨라루스가 최근 갑자기 언론에 자주 등장하고 있다. 지난 8월 9일 대선 이후 결과에 승복하지 않는 야권과 국민들의 봉기가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나라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민스크 AP=연합뉴스) 벨라루스 수도 민스크에서 8월 6일(현지시간) 대선 불복 시위대가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며 대통령 관저인 '독립궁전'을 향해 행진하고 있다. 벨라루스에서는 장기 집권 중인 루카셴코 대통령의 압승으로 나타난 대선 결과에 항의하는 야권의 불복 시위가 한 달 가까이 이어지고 있다 ⓒ 연합뉴스

 
소련이 해체 단계에 들어서던 1990년 7월 벨라루스는 벨라루스 소비에트 사회주의공화국(BSSR)의 국가 주권을 선언한다. BSSR은 1991년 8월 국명을 벨라루스 공화국(Republic of Belarus)으로 바꾸고 스타니슬라우 슈시케비치 최고회의 제1부의장을 최고회의 의장 겸 국가원수로 선출한다. 

벨라루스 공화국의 첫 국가원수 스타니슬라우 슈시케비치는 정치경력이 특이할 만큼 짧았던 인물이다. 수학과 물리학 박사학위 소지자인 그는 대학 교수와 총장을 역임한 후 1990년 정계에 진출한다. 동유럽 격동의 시간이었던 1990~1991년 사이 그의 정치 인생도 조국만큼이나 드라마틱했다. 국회의원에서 출발해 BSSR 임시 서기장을 거쳐 소련의 몰락 후 독립을 선언한 벨라루스 공화국의 국가원수가 되기까지 채 1년이 걸리지 않았다. 

러시아의 보리스 옐친, 우크라이나의 레오니드 크라우추크와 함께 소련 해체의 산파 역할을 했던 벨라루스의 국가원수 슈시케비치는 러시아, 우크라이나의 두 지도자와 달리 정작 자신의 조국에서 긍정적 평가를 받지 못했다. 새로 출범한 러시아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보리스 옐친, 우크라이나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레오니드 크라우추크가 선출됐으나 벨라루스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슈시케비치가 선택받지 못한 것. 

1994년 열린 역사적인 벨라루스 초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인물이 바로 최근 언론에 자주 등장하는 현 대통령 알략산드르 루카셴코다(벨라루스어로는 루카셴카라고 발음한다). 그 해 7월 20일 벨라루스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루카셴코는 수 차례의 개헌을 통해 대통령 임기연한을 바꾸고 임기제한도 없애 2020년 올해 선거까지 (국회의원도 아니고) 대통령을 6선까지 연임하면서 장기집권을 이어가고 있다.

벨라루스 공화국 수립 후 선거에 의해 선출된 유일한 대통령으로 만약 물러나지 않는다면 5년 후인 2025년까지 31년의 집권이 보장된 셈이다.

벨라루스 국민들은 왜

선거권이 보장된 벨라루스 국민들은 어떻게 이토록 긴 시간 독재를 용인할 수 있었을까? 루카셴코 대통령의 장기집권을 설명할 수 있는 첫째 요인은 선거를 포함해 정치 전반에 걸친 부패다. 벨라루스에서는 모든 행정력을 동원한 정부·여당의 편파적 선거운동이 만연해 있다. 야권의 유력 인사들이 노골적으로 후보 등록을 방해받는 것도 예사다. 

올해 선거의 경우 코로나 확산 위험을 이유로 선거 감시단의 수도 제한했다. 정작 루카셴코 대통령 자신은 코로나19에 대해 "사우나를 하거나 보드카를 마시면 코로나19를 피할 수 있다"는 대통령으로서 상식 이하의 말을 늘어놓았다. 인구 1천만 명이 채 못 되는 벨라루스의 확진자 수는 10일 기준으로 7만 3천 명을 넘었고, 인구 100만 명 당 확진자 수를 나타내는 발생률은 7788명으로 높은 수준이다. 

대부분 독재국가가 그렇듯 야권과 국민들의 항의 시위는 외국의 사주를 받은 불온 세력으로 치부되고 무자비한 체포와 감금이 이어지고 있다. 5월 이후 선거와 관련해서 체포당한 자국민이 최소 2천 명 많게는 3천 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현재도 야권 유력 정치인들의 실종과 구금이 계속되고 있다.  

이처럼 심각한 야만의 정치가 독재를 지탱하는 썩은 동아줄임은 틀림없다. 그렇다고 그러한 정치적 후진성이 독립 이후 줄곧 한 대통령만 인정해온 벨라루스 국민들의 속내마저 설명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런 설명은 민중이 배제된 정치공학적 설명일 뿐이다. 

벨라루스는 1991년 공화국으로 거듭날 당시 소비에트 연방에서 벗어난 독립을 꼭 원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당시의 급변하는 정세 속에서 상당수의 벨라루스 국민들은 서구식 자본주의로 휩쓸려 들어가는 동유럽의 상황을 불안한 눈으로 봤고, 다른 많은 동유럽 국가들과 달리 소비에트 즉, 평의회 방식의 국가와 기업 운영을 고수하기를 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BSSR의 마지막 총서기 슈시케비치는 앞서 언급한 대로 러시아의 옐친, 우크라이나의 크라우추크와 함께 소련 해체에 앞장섰다. 그와 달리 당시 소비에트 해체에 반대했던 대표적 인물이 바로 현 대통령 루카셴코였다. 

벨라루스 초대 대통령 선거가 보여준 의외(?)의 결과는 그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루카셴코 대통령은 특유의 정치 감각으로 당시 여론의 방향을 읽었고, 그래서 자본주의로의 급격한 이행보다 사회주의 고수를 원했으며, 국민들에게는 성공 신화보다 부패 척결을 약속했다.

대부분의 동유럽 국가들이 러시아와 단절하고 서유럽을 향해 나아갈 때 그는 친러정책을 꾸준히 견지해왔다. 벨라루스 국민들은 그런 정치인 루카셴코를 지지했다.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벨라루스 대통령이 8월 18일(현지시간) 수도 민스크에서 국가안보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벨라루스에서는 지난 8월 9일 대선에서 루카셴코 대통령이 80% 이상의 압도적 득표율로 6기 집권에 성공했다는 개표 결과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가 날마다 계속되고 있다. ⓒ 연합뉴스

 
물론 루카셴코의 벨라루스도 푸틴의 러시아와 크고 작은 갈등을 빚기도 했다. 특히 에너지 경제를 둘러싼 두 '스트롱맨'의 팽팽한 기 싸움은 두 나라 외교 관계를 벼랑 끝으로 내몬 적도 있다. 하지만 전반적인 루카셴코의 대러시아 외교는 우호적 바탕 위에서 그려졌다. 아니 더 정확히 표현하면 범슬라브주의에 바탕을 둔 소비에트 체제에 대한 향수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고 하겠다. 러시아도 내친 소비에트를 향한 향수.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 수구 공산 진영의 반개혁 쿠데타, 보리스 옐친에 의한 쿠데타 세력 진압. 러시아가 중심이 된 소비에트 체제는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까지 몇 년 사이에 마치 숨이 끊어지기 직전 가쁜 숨을 정신 없이 몰아쉬듯 격동의 시간을 보내다가 그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대부분의 역사가 실패한 실험으로 인정하는 소비에트 체제에 벨라루스가 그토록 향수를 느끼는 것은 왜일까?

많은 유럽 국가들로부터 '유럽의 마지막 독재국가'라는 비아냥을 듣고 있는 벨라루스는 불과 수십 년 전까지 바로 그들 유럽 국가들로부터 무참히 짓밟혔던 기억을 생생히 가지고 있다. 독립국 벨라루스는 러시아로부터 숱한 간섭을 받아왔고, 소비에트가 구성된 직후 전열이 가다듬어지기도 전에 나치 독일에 의해 붕괴 직전까지 내몰리는 침탈을 당했다. 이런 상황에서 벨라루스 민중들이 떠올리는 인권은 어떤 인권일까? 언론과 표현의 자유일까? 공정한 참정권일까? 그렇지 않으면 수십 년의 모욕과 유린, 핍박에서 벗어나겠다는 의지로서의 인권일까?

벨라루스가 그들의 현대사에서 가장 체제 안보를 보장받던 시기는 소비에트 연방의 구성원 당시였다. 그때만큼은 독일(동독)도 자신들의 위성국이었고, 러시아는 형제국이었다. 그러면서도 유엔에서는 러시아와 별도로 단독 회원국 자격까지 가졌다.

벨라루스 국민들은 굴욕의 현대사를 통해 독립을 얻었을 때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으며, 강한 울타리의 보호를 받을 때 무엇을 보장받았는지 본능적으로 체득한 듯하다. 요컨대 불안과 공포를 피하려고 자유를 기꺼이 반납하는 집단 무의식이 수십 년간 벨라루스 국민들을 지배해온 것이다

분명 '독재국가' 벨라루스는 거듭나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되기 위한 역동적 기운이 이제는 수도 민스크를 비롯한 벨라루스의 거리를 뒤덮고 있다. 무척 고무적이고 모든 지구촌 시민들이 힘을 실어줘야 할 때다. 지금 벨라루스에서 벌어지고 있는 움직임은 지금까지의 독재와 복종, 해방에 대한 두려움, 그것을 걷어낼 수 있는가를 판가름할 기회다. 

하지만 그 역동적 기운을 그저 중립적으로만 봐서도 안 된다. 벨라루스 국민들이 수십 년 감내했던 독재 체제가 어떤 공포를 벗어나기 위한 대가였는지 안다면 더욱 그렇다. 독재를 감수하면서 소비에트 체제를 향한 향수를 버리지 못한 비극의 벨라루스 현대사를 국제 사회는, 특히 유럽 사회는 직시해야 한다.

독일을 비롯한 유럽 사회는 루카셴코의 퇴진을 위한 압박을 계속하고 있다. 물론 좋은 일이다. 선거를 앞둔 미국이, 트럼프 체제의 미국이 제역할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더 그렇다. 그러나 독일이 제3자인 양 이 문제에 접근하는 것은 곤란하다. 벨라루스의 역사에 대해 적어도 폴란드를 향한 반성만큼은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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