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21 07:59최종 업데이트 20.02.21 0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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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뉴스는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기상천외한 사건사고를 보면 이 사회가 어디를 향해 가는지 자주 비관하게 됩니다. 그러나 역사는 오늘의 비관을 발판 삼아 조금씩 진보해왔습니다. 때때로 퇴행을 반복했을지라도요. <오마이뉴스>가 '2000년 사건, 그후'를 기획한 이유입니다. 오늘은 비관하되, 내일을 낙관하려는 의지는 포기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그렇게 여기까지 왔습니다.[편집자말]

프로야구 선수협의회 결성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자유계약선수로 공시된 최태원 당시 SK 선수(현 삼성라이온즈 수석코치)가 2000년 12월 23일 <한겨레>에 기고한 글. ⓒ 한겨레


"나는 이제 자유계약선수가 되었다. 다시는 내가 사랑하는 야구라는 운동을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중략) 앞으로 어떤 결과가 기다리고 있다 하더라도 후회는 없다."

2000년 12월 23일 <한겨레> 오피니언면에 실린 칼럼이다. 글쓴이는 그해 창단된 SK와이번스의 초대 주장 최태원 선수. 프로야구 최초 700경기 연속 출장 기록을 세워 '철인'이라 불린 타자가 그라운드를 떠날 각오로 글을 쓴 건 왜 였을까. 사건은 1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0년 1월 22일, 두산 베어스의 구단주로서 동시에 한국야구위원회(KBO)의 총재를 맡고 있던 박용오 회장은 방송 인터뷰 중 "선수협의회가 생기면 프로야구를 안 하겠다"고 선언했다. 이틀 전인 20일 KBO 이사회에서도 그가 같은 발언을 했던 것을 감안하면 그것은 순간적인 실언일 수 없었고 박용오 회장의 개인적인 생각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것은 당시 프로야구단을 운영하던 8개 대기업과 KBO의 공식적인 입장이었으며 공감대였다. 그리고 그것이 결코 빈말이 아니었음이 입증됐다. 그 해 12월에 선수협을 주도한 6명의 선수들(송진우, 양준혁, 마해영, 심정수, 박충식, 최태원)이 일제히 각 팀으로부터 '자유계약선수'로 공시되어 내몰렸다. 이른바 '선수협 사태'의 본격적인 막이 오르는 순간이었다.

뛰든가 그만두든가?

1982년, 프로야구의 출범은 당대의 야구선수들에게 벼락같은 행운이었다. 실업팀에서 뛰던 어지간한 선수들의 연봉은 프로팀에 입단하면서 순식간에 대여섯 배쯤 뛰는 것이 보통이었다. 국가대표급으로 분류되는 선수들이라면 서울에 아파트 두어 채를 살 수 있는 거액의 계약금과 함께 보통 직장인들의 열배쯤 되는 연봉을 받을 수 있었다. "스타플레이어들에게는 실업야구 선수 10배 수준의 연봉을 책정해 우수한 선수들을 최대한 끌어들이도록 하라"는 것이 대통령 재가를 거친 프로야구 창설계획서의 가이드라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수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한 단체'의 필요성을 느끼는 선수들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1987년 6월 민주화운동과 7, 8, 9월 노동자 대투쟁이 불러온 변화의 물결은 야구장도 비켜가지 않았다. 그리고 출범 이후 6년간의 경험은 경제적 보상만이 전부일 수는 없다는 점을 일깨우고 있었다. 예컨대 많건 적건 해마다 새로이 연봉을 결정하는 협상 과정에서 선수들의 선택은 구단의 요구를 받아들이느냐 아니면 야구를 그만두느냐일 뿐인 답답한 상황이 그랬다. 선수의 보유권을 구단에 전적으로 부여한 탓에, 선수가 소속 구단의 허락 없이 다른 구단으로 이적하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대체로 그 무렵부터 은퇴를 바라보기 시작하던 초창기 스타플레이어들은 '고액연봉'이 인생을 충분히 책임져주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자각하기 시작했다. 상대적으로 많은 연봉과 계약금을 받은 대신 노후를 보장해줄 퇴직금이나 연금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직 젊은 선수들 역시 부상을 입거나 사고를 당해 더 이상 예전 같은 기량을 발휘할 수 없을 때 인생이 갑자기 난기류를 만나리라는 사실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1988년 해태 타이거즈 투수 김대현이 교통사고로 사망한 사건은 그런 점에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앞날이 창창하던 선수가 사고를 당하자 유족들이 아무런 생계대책도 없이 남겨지는 모습에 많은 선수들이 충격을 받았고, 그들은 그 얼마 전부터 대두된 '선수회' 결성 주장에 동참하기 시작한 것이다. 서울올림픽 개막 사흘 전인 1988년 9월 13일, 당시 한국야구를 대표하던 스타플레이어 최동원이 '문재인 변호사'를 비롯한 많은 이들의 조력을 받아 회칙을 만들고 선수 142명의 동참을 이끌어낸 끝에 '한국 프로야구 선수회'가 창립총회를 열었다.

1988년 좌절의 기억
 

최동원 투수 당당하게 마운드에서 공을 던지던 최동원이 그립다 ⓒ 롯데자이언츠

 
하지만 그 해의 선수회는 결국 좌초했다. 물론 구단들의 방해공작은 집요했고, 선수들의 준비는 부족했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팬과 국민의 지지를 얻지 못한 것이었다.

그 시절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노조와 집단행동이란 위험한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불온한 단어로 인식되고 있었고, 오직 극도로 열악한 조건에 놓인 노동자들의 생존권 요구만이 그나마 정당한 것으로 인정되곤 했다. 그 틈을 비집고 정당한 노동자의 권리 요구들을 찍어 누르기 위해 '귀족노조'라는 만능의 딱지가 유행하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그런 편견의 희생양이 되지 않기 위해 '노조'가 아닌 '선수회'라는 애매한 간판을 들었던 그들은 그 때문에 어떤 공식적인 단체교섭의 주체로도 인정받지 못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봉인상 상한선의 폐지와 인하 하한선의 조정'을 첫 번째 요구사항으로 택하는 전술적 실수를 범한 탓에 귀족노조를 지향하는 꼼수 단체라는 낙인마저도 그대로 감수해야 했다.

구단들은 KBO 이사회를 통해 "선수회를 주도한 20명의 선수들과 계약하지 않겠다"며 강경대응했고, 준비가 부족했던 데다가 팬들의 지지도 얻지 못한 선수들은 아무 성과 없이 선수회 백지화를 선언하고 말았다. 당장의 집단 방출 조치는 공식적으로 철회되었지만, 선수회를 주도한 최동원이 트레이드된 것을 포함해 주도자들 상당수에게 크고 작은 보복조치가 이어진 것은 물론이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12년 뒤인 2000년, 상황은 되풀이되었고 결과는 뒤집혔다.

12년 후, 또 한 번의 시도
 

프로야구 선수협, 시민단체와 공동 기자회견 지난 2000년 12월 21일 송진우(오른쪽 2번째), 양준혁(오른쪽) 등 자유계약선수로 공시된 프로야구 선수협 선수들이 경실련 강당에서 시민단체와 대책논의를 위한 연석회의를 마치고 공동기자회견을 갖고 향후 행동방향을 밝히고 있다. ⓒ 연합뉴스

  
"선수협의회가 결성된다면 프로야구를 접겠다"는 KBO 총재의 발언에 대한 비난이 쏟아졌고, 소속팀에서 쫓겨날 위기에 놓인 채 "열악한 처우를 받으며, 구단에 휘둘리는 파리 목숨 같은 후배들을 위해 나섰다"며 "아들에게 부끄러운 아빠가 되지 않겠다"라고 눈물 흘리는 6명의 선수들을 향해서는 응원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당장 망설이던 선수들의 무더기 가입신청이 밀려들었고, 양대 노총과, 경실련을 비롯한 노동단체와 사회단체들이 줄지어 선수협을 지지하고 KBO를 규탄하는 선언을 발표했다. 정치권에서도 여야를 망라한 11 명의 국회의원들이 '선수협을 지지하는 의원들의 모임'을 결성해 엄호에 나섰고, 한 달 뒤인 2001년 1월 13일에는 김한길 문화부장관이 직접 개입에 나서 KBO와 구단들의 전향적인 자세를 주문하기도 했다.

프로야구에 전례 없는 정치, 사회, 노동계의 관심이 집중된 것은 그만큼 폭넓은 국민적인 관심이 집중되고 있었음을 반영했다. 시민들은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가리지 않고 선수협을 지지하는 선전과 서명에 나섰고, 선수협을 외면하는 스타플레이어의 안티사이트를 만들어 압박하기도 했다.

놀라운 것은, 그 해 프로야구가 5년 전(1995년)에 비해 절반도 안 되는 관중이 야구장을 찾았던 암흑기를 맞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정당한 요구를 하다가 한꺼번에 쫓겨날 위기에 몰린 선수들의 모습이, 야구팬들만이 아니라 같은 시대를 살아가던 시민들의 가슴 속 깊숙한 곳의 감정선을 건드렸기 때문이었다.

결국 2001년 1월 21일 KBO는 선수협을 인정하고 선수들에 부여했던 모든 불이익들을 철회하는 데 합의했다. 짧게는 1년, 길게는 12년간 이어진 한국 프로야구 선수들의 결사체를 조직하려는 노력이 결실을 맺은 순간이었다.

선수들만의 힘으로 성공한 단체가 아닌
 

프로야구 선수협의회 인정 집회 지난 2000년 1월 29일 한국야구위원회(KBO) 앞에서 프로야구 팬들이 몰려들어 선수협의회 인정을 요구하는 집회를 벌이고 있다. ⓒ 연합뉴스

 
오늘날까지, 선수협이 애초의 설립 명분으로 내세웠던 만큼 열악한 처지의 선수들을 위해 일해 왔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린다. 선수협은 회장이 바뀔 때마다 색깔이 확연히 달라지는 부침을 겪으면서도 꾸준히 굵직한 문제제기들을 해왔고, 공과를 떠나 한국의 야구계와 사회 전반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쳐 왔다.

외국인선수의 보유한도와 출장경기수를 제한하라고 요구했던 일이나 비활동기간 단체훈련을 금지하라고 요구했던 일, 그리고 경기승리수당을 지급하라고 요구했던 일이나 FA 계약액 상한선 설정에 반대했던 일 등은 선수협의 대표적인 활동으로 기억된다. 매번 찬반이 엇갈리긴 했지만 그들은 그것을 통해 가깝게는 선수와 구단의 이해관계와 경기의 질을 둘러싼 논란을 일으켰고, 멀게는 일과 일상, 성취와 행복에 관한 사회적 상상을 제안했다.

하지만 정작 선수협을 향해 쏟아지는 더 흔한 지적들은, 그들이 '한 일' 보다는 '하지 않은 일'에 관한 것들이다. 예컨대 선수들 사이의 군기잡기 구습의 일단이 노출되었을 때, 승부조작과 약물을 비롯한 선수들의 일탈이 불거졌을 때, 그리고 저연봉선수와 방출선수와 프로입단이 좌절된 뒤 막다른 길에 내몰리는 수많은 야구낭인들의 문제들이 제기될 때마다 "왜 선수협은 이 문제에 대해 아무런 노력도, 발언도 하지 않는가"라는 지적이 제기되곤 했던 것이다.

물론 그들은 프로야구선수들의 이익단체이며, 야구에 관한 모든 문제에 대해 입장을 요구받는 현실이 억울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의 시작과 내력을 기억하는 이들의 아쉬움 역시 이유 없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단지 선수들만의 결의와 힘으로 결성되고 성장해 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시절에도 우린 낙오자를 외면하지 않았다
 

지난 2015년 11월 19일 오후 일본 도쿄돔 구장에서 열린 2015 세계야구소프트볼연맹(WBSC) 프리미어12 대회 준결승전 한국팀이 일본팀을 꺾고 마운드 위에서 기뻐하고 있다. ⓒ 연합뉴스

 
2000년의 한국사회는 1988년과 닮았으면서도 달랐다. 1988년의 한국인들은 민주헌법 쟁취라는 큰 산을 넘고도 야권분열이라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며 군사정권을 연장시키고 말았다. 반면 2000년은 IMF 경제위기라는 깊은 늪에서 간신히 기어 올라와 뉴밀레니엄과 IT혁명의 핑크빛 희망에 설레던 시절이었다. 큰 성공을 거둔 직후와 큰 좌절을 겪은 직후라는 점에서는 달랐지만, 희망과 불안이 뒤섞이고 희열과 좌절이 교차하던 시기라는 점에서는 닮았다.

낙관과 비관이 교차하던 그 어수선하던 시기에, 프로야구는 그 나름대로의 진통을 겪고 있었다. 각각 강팀과 약팀을 상징하던 호남 연고의 두 구단 해태 타이거즈와 쌍방울 레이더스가 매각되거나 해체되었고, 그 와중에 가난한 팀의 유능한 선수들을 흡수해 우승횟수를 늘려가며 돈의 위력을 과시하던 현대 유니콘스가 덜컥 자금난에 빠져 '연고지 없는 구단'으로 조롱받기 시작하는 반전이 일어나기도 했다. 어쨌거나 그런 아수라장 속에 수많은 선수들이 일자리를 잃고 야구장을 떠나야 했고, 그들은 그대로 감원과 실업이라는 단어를 일상으로 껴안고 살던 당대인들의 또 다른 상징이 되었다.

1988년의 한국인들은 노동자의 거대한 힘을 발견하고도 '노조는 생존을 위협받는 열악한 노동자들에게만 필요한 것'이라는 착각에 빠져 있었고, 2000년의 한국인들은 '아무도 믿을 수 없다'는 불신 속에서도 약자의 눈물에 공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아마도 12년을 사이에 두고 반복된 선수협 결성 소동의 결과를 가른 하나의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돌아보면, 2000년 무렵의 한국인들은 '희망'만 생각하고 싶었지만 '낙오자'들의 존재를 끝내 외면할 수 없었던 이들이기도 했다. 그렇게 우리는 약자들의 비명에 귀 막으며 희망을 향해서만 내달렸다고 생각했지만, 돌아보면 때로는 멈추고 뒤돌아보고 자책하고 움찔거리며 가다서다 절뚝절뚝 어찌어찌 지나쳐 왔던 것인지도 모른다.
  

ⓒ 박종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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