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0.30 14:06최종 업데이트 18.10.30 14:06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원 성립기념 사진 (1919. 10. 11) ⓒ 도산안창호기념관

 
1919년 3ㆍ1혁명의 성과물 중에 대표적인 것은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된 일이다. 국치 9년만에 비록 해외에서이지만 국가를 대표하는 임시정부가 수립됨으로써 나라의 법통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먼저 망명정부와 임시정부의 차이부터 살펴보자. 


망명정부란 왕조나 정부의 법통을 승계할 수 있는 위치 즉 왕(임금)이나 왕세자, 정부의 수반 또는 승계권자가 외국침략이나 정변ㆍ쿠데타 등으로 쫓겨나서 세운 정부를 일컫는다.

이와 달리 임시정부는 왕조나 정부의 승계자와는 상관없는 사람들이 국권(주권) 회복을 위하여 해외에서 세운 정부를 말한다. 따라서 당연히 민간인들이 상하이에 세운 것은 임시정부이다. 일제로부터 국토와 주권ㆍ국민을 완전히 되찾아 '정식' 정부를 수립할 때까지 한시적으로 '임시'로 세운 정부였다. 
  

1919년 4월 상해 임시정부가 최초 사용했던 청사 건물 ⓒ 독립기념관

 
독립지사들이 상대적으로 한인이 많이 거주하는 중국 만주나 러시아 연해주가 아닌 상하이에 임시정부를 세운 이유는 무엇일까. 

앞의 두 지역은 한인이 많이 사는 것은 물론 국경과 가까워서 독립운동에 적합한 곳이었다. 그러나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가 그 지역에 영사관과 경찰관서를 설치하여서 우리 임시정부가 자유롭게 활동하기 어려운 처지였다.

상하이는 1800년대부터 상업도시로 발전한 해상교통의 요지이고, 1911년 중국 신해혁명의 거점도시인데다 1840년대에 외국주권이 행사되는 조계(租界), 즉 미국ㆍ영국ㆍ프랑스의 조계가 있었다. 미국과 영국의 조계 대신 프랑스조계를 택한 것은 1789년 대혁명정신, 자유ㆍ평등ㆍ박애정신이 남아 있었고, 프랑스조계에서는 한국의 임시정부의 장소를 양해하였다. 
  

상해 임시정부 청사에 게시된 임정 지도자(왼쪽부터 이승만, 박은식, 이상룡, 홍진, 김구, 이동녕 선생) 상해 임시정부 청사에 게시된 임정 지도자(왼쪽부터 이승만, 박은식, 이상룡, 홍진, 김구, 이동녕 선생) ⓒ 박도

 
상하이를 독립운동의 거점으로 선택한 인물은 중국 신해혁명에 직접 참여한 신규식의 역할이 컸다. 을사늑약에 분통하여 음독했다가 오른쪽 눈을 실명한 신규식은 중국으로 망명하여 손문을 도와 신해혁명에 가담하고, 이후 박은식ㆍ신채호ㆍ이상설 등과 신아동제사를 조직하여 상하이에 둥지를 틀었다.

신아동제사의 지사들은 얼마 후 신한혁명당을 조직하여 고종황제를 모셔와 망명정부를 수립하고자 국내에 밀사를 파견했다. 거사를 준비하던 성낙형이 일제경찰에 검거되면서 이 운동은 좌절되고, 1917년 7월 신규식ㆍ조소앙ㆍ신채호ㆍ박은식ㆍ윤세복ㆍ홍명희ㆍ박용만 등 14명이 <대동단결선언>을 통해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독립운동가들의 연대를 촉구하였다. 

독립운동가들에게 국제정세의 변화가 감촉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1917년 10월 볼셰비키혁명 후 레닌이 러시아 안의 100여 개 소수민족에게 '민족자결'을 원칙으로 하는 <러시아 제민족의 권리선언>을 발표하고, 1918년 1월에는 윌슨 미국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 등 <14개조 원칙>을 선언하였다.

여운형 등 동제사 간부들은 이와 같은 국제정세의 추이를 지켜보면서 신한청년당을 조직하여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하는 한편, 국내에서 3ㆍ1혁명이 발발하고 임시정부수립론이 제기되면서 상하이를 중심으로 임정수립이 구체적으로 논의되기에 이르렀다.

상하이에는 기존의 동제사와 신한청년당 핵심인사들을 비롯하여, 러시아와 만주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 3ㆍ1혁명의 주역들이 파견한 현순, 일본에서 2ㆍ8독립선언을 주도한 최근우, 미국에서 여운홍 등이 속속 모여들었다. 이들은 프랑스 조계 보창로 325호에 독립임시사무소를 차렸다. 비용은 국내에서 3ㆍ1혁명 준비기금으로 천도교의 손병희가 기독교 이승훈에게 전한 5천원 중 2천원으로 사무소를 임대하였다.

이들은 1919년 3월 26~27일 프랑스 조계의 한 예배당에서 독립운동을 지휘할 '최고기관'의 설치 문제를 논의하고, 이동녕ㆍ이시영ㆍ조소앙ㆍ이광ㆍ조성환ㆍ신석우ㆍ현순ㆍ이광수가 참여하는 8인위원회를 구성하여 임시정부 수립절차에 들어갔다. 8인위원회는 논의를 거듭하여 먼저 임시의회를 설립하자는 데 합의하였다. 

4월 10일 오후부터 프랑스 조계 김신부로 셋방에서 임시의정원을 구성하기로 결정하고 조직체의 성격과 형태를 둘러싸고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정부를 수립하자는 측은 국치 이래 국민의 소망은 정부수립에 있다는 주장을 폈고, 다른 측은 위원회나 정당을 먼저 구성하자는 주장이었다. 수직적인 정부가 수립되면 지역ㆍ단체ㆍ이념 등 다양한 계층의 사람이 참여하기가 어렵다는 이유였다. 논란 끝에 결국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데 뜻을 모았다.

국내 각도를 대표하는 29명으로 임시의정원을 구성하고 국호와 연호, 국체, 임시헌장(헌법)이 채택ㆍ제정되었다. 국호는 대한민국, 연호는 대한민국 원년, 국체는 민주공화제를 채택하였다. 임시헌장을 제정하기 위해 이시영ㆍ조소앙ㆍ신익희ㆍ남형우로 4인위원회를 구성하고, 여기서 대한민국 임시헌장이 기초되었다. 

임시의정원은 밤을 새워 토의를  거듭한 끝에 전문 10조로 된 임시헌장을 심의ㆍ통과시켰다. 국호제정과 관련하여 대한민국ㆍ조선민국ㆍ고려공화국 등이 제안되어 역시 토론을 거쳐 대한민국으로 확정하였다. 

'대한'이라는 국호를 둘러싸고 일부 의정원의원이 망한 대한제국의 국호를 다시 쓸 이유가 있는가를 따지고, 다수 의원들은 망한 대한제국을 다시 일으켜 세운다는 의미와 함께 '한(韓)'이라는 명칭은 삼한 이래 우리 민족의 고유한 이름이라는 사적(史的)고찰이 전개되어 결국 '대한제국'에서 '제(帝)'자 대신 '민(民)'의 시대를 연다는 뜻에서 '대한민국'으로 결정되었다.

임시의정원은 의장 이동녕, 부의장 손정도, 서기 이광수ㆍ백남철을 뽑았다. 임시의정원은 정부조직의 법제를 제정하고 4월 11일 이를 공포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태어난 순간이다. 현재의 대한민국은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때문에 이때가 대한민국 건국 원년이 된다. 1948년 8월 15일 정부수립일을 대한민국 건국절로 삼으려던 이명박ㆍ박근혜 정부의 시도는 이와 같은 역사적인 사실을 외면한 처사였다. 

임시정부의정원은 국무총리로 이승만을 선출한데 이어 정부각료를 선임하였다. 초기 내각 명단이다.

 국무총리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
 외무총장 김규식
 재무총장 최재형
 군무총장 이동휘
 법무총장 이시영
 교통총장 문창범


임시정부는 국무총리에 선출된 이승만이 미국에 체류 중이어서 내무총장 안창호를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상해 임시정부 시절의 도산 안창호 선생. ⓒ 도산 안창호 선생 기념사업회

 
1919년 3~4월에 국내외에서 도합 8개의 임시정부가 수립 선포되었다. 조선민국임시정부. 신한민국임시정부. 대한민간정부. 고려공화정부, 간도임시정부 등은 수립 과정이 분명하지 않은 채 전단으로만 발표되었다. 실제적인 조직과 기반을 갖추고 수립된 것은 러시아 연해주, 상하이, 한성의 임시정부였다. 

상하이 임시정부가 채택한 임시헌장의 10개 조항에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제1조), "대한민국은 임시정부가 임시의정원의 결의에 의하여 이를 통치함"(제2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ㆍ빈부 및 계급 없이 일체 평등으로 함"(제3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종교ㆍ언론ㆍ저작ㆍ출판ㆍ결사ㆍ집회ㆍ거주이전ㆍ신체 및 소유의 자유를 향유함" (제4조) 등 근대적 민주공화제의 헌법 내용을 담았다.

비록 임시정부일 망정 유사 이래 처음으로 민주공화제 정치체제를 채택한 것이다. 박재혁은 이와 같은 소식을 듣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의열지사 박재혁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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