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1.03 09:54최종 업데이트 19.01.03 10:42
2018년 5월 덕수궁현대미술관에서는 '한국 근대미술 걸작전'이 열렸다. 굴곡 많은 한국 근대미술사를 장식한 뛰어난 작품들이 많이 출품되었다. 그 중에 유독 화제가 되었던 작품은 철마(鐵馬) 김중현(金重鉉, 1901-1953)이 1936년 제15회 조선미술전람회(아래 조선미전)에 출품하여 특선을 한 <춘양(春陽)>이란 작품이었다. 

보통 서양화가로 알려졌던 김중현이 갑자기 동양화 형식의 채색화를 그려 수상하여 화제가 된 것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1931년 제10회 조선미전 서양화 부분에 출품하였던 <춘양>이라는 같은 제목의 작품을 구도와 내용을 대폭 수정하여 다시 그려 출품하여 특선을 한 것이다. 동양화로서는 처음 출품하여 수상한 작품이기도 하다.
 

김중현 <춘양(春陽)> 1936년 ⓒ 국립현대미술관

 
그동안 도판으로만 전하다가 최근에 발견되어 세상에 처음 공개되었다. 이 작품은 1930년대 조선미전에 출품된 작품의 성향을 잘 보여주는 것으로, 당시 한국 가정의 모습을 한 화면에 집약하여 그린 것이다. 네 폭으로 된 병풍 형식의 그림 속엔 한국 여인의 삶이 오롯이 들어 있다. 

음식을 준비하는 여성의 모습에서 시작하여 아이를 보는 여인, 빨래하는 여인, 동생을 돌보는 누이의 모습이 한 화면에 촘촘히 기록되어 있다. 현실에선 한 공간에 이렇게 많은 장면이 들어가지 않지만 당시 미술에선 공공연히 쓰이던 미술기법이었다. 이러한 비현실적인 구도는 당시에 유행하던 화법인 이시동도법(異時同圖法)이 그대로 구현된 것이다.


전통 한옥 구조인 대청마루에 병풍, 도자기, 뒤주 등 한국적인 기물들이 놓여 있고, 마루에 다양한 색상의 한복을 입은 여인들이 각기 다른 일을 하고 있다. 당시 대가족으로 사는 한 집안의 이야기일 수도 있고, 한 여성의 한 평생 일상을 집약해서 한 화면에 배치한 것일 수도 있다. 

인물 서로 간의 모습이 긴밀한 관계가 없고 모두 입을 다물고 독립적으로 있는 것이 매우 이색적이다. 그럼에도 아이를 업은 소녀, 젖을 물리고 있는 젊은 여인, 무를 깎거나 썰고 있는 여인 등의 모습은 그림 속에 살아 움직이는 듯 생생하다. 할 일 없이 심심해 보이는 소년의 태도도 인상적이다. 

이 작품은 특히 여인들이 입고 있는 한복의 색감에서 보듯 선명한 색채의 대비와 조화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또한 명암법과 원근법 등 서구적 화법을 사용하여 시각적 사실성을 돋보이게 하였다. 이는 김중현이 본래 서양화를 먼저 공부하였기 때문에 드러난 모습이다. 

천생 화가

서울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김중현은 1919년 중학교 과정인 경성성애학교(京城聖愛學校)를 졸업하였다.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여 화가가 되기를 꿈꾸었다. 그러나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다른 화가 지망생들처럼 일본으로 미술 유학을 가지 못한 채 직장생활을 하면서 독학으로 서양화가의 길을 이어나갔다. 

그는 어려서는 전차 차장 및 점원 등으로 생계를 이어나가다 후에는 체신국, 미국문화원, 서울신문사 등에서 다양한 일을 하면서 화가의 길을 잃지 않았다. 1925년 무렵에야 조선총독부 토지조사국에 취직하여 제도업무를 맡으며 생활의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그는 당시 일본에 유학하고 돌아온 친구들과 어울리며 틈틈이 그림을 그려 실력을 키웠다. 다행히 매해 거르지 않고 출품을 한 조선미술전람회에서 계속 수상을 하여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김중현 <무녀도> 1941년 ⓒ 국립현대미술관

 
1925년에 <풍경>이 처음 입선한 것을 비롯하여 1938년까지 입선과 특선을 거듭하면서 양화계에서 위치를 굳힐 수 있었다. 그림을 처음 그리던 시기의 초기 작품은 소박한 기법의 자연풍경과 인물상이나 정물 등이었다. 점차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서민계층의 삶과 풍속적인 정경을 주제로 한 토속적인 표현으로 독자성을 드러내었다. 당시 서양화계에서 인물 중심으로 풍속화를 그리는 이로는 유일하였다.

1936년부터는 서양화뿐만이 아니라 동양화에도 손을 대 특선을 거듭하는 등 빼어난 성과를 보였다. 특히 1936년 15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는 동양화 부분과 서양화 부분에서 모두 특선을 하여 미술계의 대단한 화제가 되었다. 1940년까지는 계속해서 먹, 붓과 전통적인 채색기법으로 민족사회의 현실적인 생활상을 그린 작품을 유화와 병행하여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는 양면성을 보였다. 

1930년 무렵부터는 서화협회전람회에도 참가하여 유화와 동양화를 같이 출품하였다. 한편 생계를 위하여 직장에서 도안과 포스터 등의 디자인 그림도 그리게 되어 광복 직후에는 조선상업미술가협회를 조직하여 회장직을 맡았고, 서울의 대동상업학교와 대신상업학교에서 미술교사로 교편을 잡았다. 그가 사직동에 거주하였던 것은 이곳이 형의 집 근처이고, 평소 가까이 지내던 친구들의 아지트가 서촌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직장 근처에 터전을 마련하였던 까닭도 있었다. 

비범한 아내
 

김중현 <실내> 1940년 조선미전 입선작 ⓒ 호암미술관

 
김중현의 결혼은 그의 형수가 나서서 짝지어준 것이었다. 3.1운동이 지나지 않은 얼마 후 한 여인이 김중현의 형 집에 머물게 되었다. 그녀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는데, 부모님이 일본인들에게 불의의 죽음을 당한 후 서울로 올라와 서촌 송월동에 사는 김중현의 형수 눈에  띄어 함께 지내던 여인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형수의 눈에 비범하게 보였다. 그래서 잘 가꾸어 놓고 지켜보니 역시 보통 여인이 아니었다. 그래서 형수가 나서서 김중현과 짝을 지어주게 된 것이다. 

그때까지 김중현의 살림은 형편없었는데, 그럼에도 그 여인은 내색 한 번 하지 않고 지냈다고 한다. 변변치 않은 월급쟁이에다 술이 입에서 떨어지지 않으니 그 집안 살림 꼴이야 엉망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부인은 불평 한 마디 없이 잘도 꾸려 나갔다고 한다. 김중현이 집안 살림에 별 신경을 쓰지 않고 작품 제작을 할 수 있었던 것도 다 부인의 내조 덕이었다고 한다. 

김중현은 부인이 외출하며 밥을 차려 놓아도 자신의 바로 앞에 가져다주지 않으면 먹지를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지금 세상엔 상상도 못할 일이다. 그런 김중현도 대구 피난 시절 부인이 병을 얻자 손수 미음을 끓여 대며 병시중을 들어 나중에는 그 병든 부인보다 먼저 쓰러질 정도로 그들 부부의 금슬은 각별한 데가 있었다고 한다. 

김중현의 친구들
 

묵로 이용우 ⓒ 황정수


김중현과 친했던 친구로는 이승만, 김종태, 윤희순, 안석주, 김복진 등이 있었다. 이들은 거의 매일 이승만의 큰 집에 모여 그림을 그렸다. 수채화에 능했던 김중현이 이승만에게 수채화 그리기를 권하여 이승만이 조선미전에서 특선을 하는 일도 있었다. 이들은 이승만 집 대청마루에서 그림을 그리다 저녁때가 되면 반드시 술집으로 향하였다. 술을 한 잔도 못하는 윤희순을 제외하고서는 모두들 술에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친구들이었다. 그들은 늘 그렇게 술을 마셨다.

김중현의 친구 중에 묵로 이용우와 정재 최우석이 있었다. 두 사람은 동양화를 그리는 친구들이었는데, 김중현이 후에 동양화를 하게 된 것은 분명 두 사람의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그 중에 이용우는 김중현의 누이와 결혼한 자형이었다. 두 사람은 그림으로 맺어진 친구 사이였고, 술 좋아하기로 유명하여 서로 잘 통하는 사이였다. 한 번은 김중현이 이용우, 이승만 등과 함께 술을 마시게 되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이용우는 거나하게 취하여 우스갯소리부터 시작하였다. 

이용우는 취하면 늘 좌중을 휘어잡고 농담을 잘하는 습관이 있었다. 워낙 성미가 괄괄하고 입도 헐어 아무에게나 악의 없이 내깔리기를 잘해서 모르는 사람과 곧잘 시비가 벌어지기도 하였다. 더욱이 술 한 잔 걸쳤다 하면 그의 고함 소리를 당할 재간도 없어 안하무인으로 좌충우돌 좌중을 휩쓰는 버릇이 있어 그  주사도 알아줄만 하였다. 그러나 그때만 지나면 그것 뿐, 뒤가 무르기로도 유명하였다.

마침 술자리의 바로 옆자리에 김중현이 앉아 있었다. 김중현은 이용우의 처남으로 얼굴이 좀 험상스럽게 생겼지만 호인형의 얼굴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용우가 김중현의 얼굴을 보며 농지거리를 하기 시작하였다. 자신의 아내가 김중현을 닮아서 못생겼다는 것이었다. 

"글쎄, 이것 좀 보란 말이야. 철마, 이놈의 상판대기에다가 뒤통수에 쪽진 머리를 얹어놓은 추물 중의 추물이 내 마누라니 내가 화 안 나게 되었어! 에이, 보기 싫어죽겠다니까!"

이런 소리를 해 좌중을 웃겨 놓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른 사람 곁에 바싹 다가앉아 다른 이야기를 해대며 해실거렸다. 그런데 이런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술자리가 있으면 늘 그 짓을 해대니, 그때마다 김중현의 속은 말이 아니었다.

그림 실력 만큼 대단했던 술 실력
 

김중현 <농악> 1941년 ⓒ 호암미술관

 
김중현의 많은 뒷얘기 중 대부분은 술과 관련된 것들이다. 그의 술 실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였는데, 그의 집안 형제들 모두 술 실력이 대단하였다고 한다. 그의 술에 관한 이야기 중 가장 대표적인 이야기가 일본인과 술 실력을 겨룬 이야기이다.

한 번은 잘 가던 술집에서 그의 술 실력에 대한 소문을 들은 일본인이 양주(백마 위스키) 한 병을 가지고 와 시비를 걸었다. 한 번에 쉬지 않고 다 마시면 돈을 내지 않고, 실패하면 돈을 내고 가는 시합을 하자고 덤벼든 것이다. 당시 백마 위스키 한 병 값은 쌀 한 가마니 값이 훨씬 넘는 값이어서 아무나 마실 수 있는 술이 아니었다. 

술에 자신 있었던 김중현은 술 마실 욕심으로 제안을 받아들여 한 순간에 들이키기 시작했다. 그러나 생각처럼 한 번에 마시기는 쉽지 않아 중간 쯤 되니 견디기 어려웠다. 속이 콱 막혀 넘어가질 않았다. 그러나 승부에서 지기도 싫고 술값이 만만치 않아 그만 둘 수가 없었다. 억지로 견디고 끝까지 마신 후 태연한 척 있었다. 주변 친구들은 승리의 환호성을 올렸고, 그 환호성과는 달리 김중현의 귀는 앵앵거리고, 한 순간 수족은 맥이 탁 풀리고, 입만 벌리면 뱃속의 것이 솟아오를 것 같았다. 

그래도 입을 악물고 안 그런 척 겨우 견디고 태연한 척 하여 내기에서 이기고야 말았다. 죽기를 무릅쓰고 연기하여 얻어낸 술 시합의 승리였다. 그만치 술을 좋아하였고, 승부욕에 강한 김중현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에피소드였다. 돌이켜 보면 지난 날 전설 같은 이야기였다.

이렇듯 술을 좋아하였던 김중현이었지만 그림 그리기에는 게으르지 않아 쉼 없이 작업에 열중하여 조선미전 마지막 회에 이르기까지 계속 출품하여 수상을 하였다. 더욱이 다른 이들과 달리 서양화와 동양화 양쪽에 출품하여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루었다. 특히 그의 풍속적인 화풍은 후배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어, 해방 후 국전에서 관전 풍의 그림 양식을 구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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