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1.11 17:04최종 업데이트 17.12.15 08:49
이 땅에는 국가로부터 보호받기 보다 국가로부터 상처받은 이가 적지 않다. 그들의 억울함을 듣고 조사하는 과거사 위원회가 있었다. 과거사 위원회가 사라진 뒤에도 여전히 많은 피해자들이 생존해 있었고, 나는 여전히 그들을 만나는 일을 해왔다.

이들을 기억할 때마다 생각나는 것은 음식이었다.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못했던 자신의 과거를 들어주는 사람에게 특별한 무엇인가를 함께 나누고 싶은, 또는 대접하고 싶은 그들의 마음에서 나는 국가폭력 피해자를 음식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이 글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피해자뿐 아니라 전직 수사관도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이용당한 이들도 있다. 사건 조사와 관련해 만난 모든 사람이 그 대상이다.

이제 그들과 만난 이야기를 그들과 함께 했던 음식과 함께 풀어보려고 한다. 이 글은 미식가를 위한 음식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쓰는 글이 아님을 분명히 밝혀둔다. 음식의 표현과 맛에 대한 평가는 주관적이니 그런 평가는 자제해 주시길......^^ -기자 말

"근데 감자탕은 왜 드시려고 했어요?" ⓒ pixabay


그가 태어난 곳은 서울이었다.

전쟁 전 고등학생이었던 그는 전쟁이 발발하여 서울이 인민군 손아귀에 떨어지자 곧바로 인민군에 자원입대했다. 곧 인민군의 수중에 떨어질 것 같았던 한반도는 미군을 중심으로 한 유엔군의 개입으로 전선을 지루하게 오르내리게 되었다.

사선을 수도 없이 넘긴 끝에 살아남은 그는 북한에 정착해 그곳에서 대학에 입학하여 공부하던 중 정치학교에 선발되어 공작원 훈련을 받게 되었다.

그는 서울 출신으로 이질감 없는 서울말투와 서울지리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 중 단선(斷線)되었던 고정공작원의 접선을 복원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1년여의 지루한 공작원 교육 끝에 드디어 남한에 남파되었고, 안내조의 안내에 따라 한강을 이용해 서울에 잠입하는 데 성공하였다. 끊어졌던 공작조직에 접선하여 조직을 연결하는 데 성공하였다.

1960년대 초의 서울은 공작하기에 어렵지 않은 상황이었다. 허술한 군사분계선과 느슨한 반공이념은 공작활동 하기에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다. 또한 전쟁 전과 비교해서 크게 발전하지 않은 서울거리는 이질감 없이 활보할 수 있었다.

특히 전쟁이 나기 전 부모님들과 간간이 찾았던 종로의 뼈다귀탕 집도 그대로였다. 지금은 감자탕이라 불리던 그 음식. 그는 안내조원과 함께 그 집에 들렀다. 살이 뼈에 겨우 듬성듬성 붙어있는 등뼈가 가득한 양푼그릇 위에 우거지가 한주먹 크게 올라가 있었다. 공작을 마치고 올라가면 언제 다시 먹을 수 있을지 모를 음식이라 생각하니 국물 한 방울도 남길 수 없었다. 그렇게 그는 첫 번째 공작사명을 완수하였다.

60년대 말 그는 다시 2차 소환되었다. 이번 공작 역시 단선된 연계조직을 복원하는 것이었다. 6개월 정도 준비하던 어느 날 함께 파견되기로 하였던 공작조원이 공작훈련 중 사망하였다. 그렇게 2차 임무는 취소되었다.

그리고 70년대 중반 3차 소환된 그는 이전과는 다른 공작사명을 받았다. 이번에는 서울에 남파되어 그곳에 고정하여 활동하는 임무를 맡았다. 완벽한 서울생활을 위해 그는 서울과 완벽한 환경을 만든 초대소 생활을 시작했다. 음식과 신문, 남한방송이 흘러나오는 텔레비전, 사용하는 화폐와 물건, 택시, 버스 등을 타는 훈련 등을 반복적이고 끊임없이 받았다. 자본주의 생활에 적응하기 위해 3개월간 마카오로 이동해 생활하기도 하였다. 또한 정착해 살기 위한 방편으로 그는 버섯재배, 특수작물 재배 등의 농업기술도 습득하였다.

총알 박힌 몸으로 강을 건넜다

그렇게 1년여간의 초대소 훈련을 마치고 그는 임진강과 한강을 통해 야간 수중침투를 감행했다. 강을 따라 수중으로 수영을 하면서 얼마나 내려왔을까. 멀리 행주산성이 보이면서 서울 잠입이 성공했다고 생각할 무렵 갑자기 강변에서 강한 불빛의 서치라이트가 켜지면서 기관포와 소총이 불을 뿜기 시작했다.

황급히 조원과 함께 수영으로 파주방향으로 올라가던 그는 복부에 총상을 입게 되었다. 등에 멨던 배낭을 가슴 쪽으로 돌려 메고 출혈을 막으며 수영을 하던 그는 다시 왼쪽 어깨에 총상을 입었다.

모진 정신력으로 새벽녘에 임진강 북쪽에 도착한 그는 결국 정신을 잃고 말았다. 조원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북쪽 강기슭에 도착하여 병원치료를 받았고, 4차례의 수술 후 20여 일 만에 의식을 찾았다.

"이게 그 상처입니다."

그는 입고 있던 환자복의 상의를 탈의하고는 왼쪽 어깨와 복부를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그의 말대로 어깨와 복부에 엄지손가락만한 흉터가 선명히 남아 있었다.

"내가 생각해도 독한 놈이지요. 총알 2개가 몸을 뚫고 들어왔는데 살겠다고 몇십 킬로미터 되는 강을 수영을 해서 넘어 왔으니 그게 보통 놈입니까?"
"삶에 대한 애착이 크셨나 봅니다."
"삶에 대한 애착? 네... 그렇지요. 삶에 대한 애착... 그 정도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흐흐"

웃음인지 흐느낌인지 모를 소리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전 그 사건으로 더 이상 당으로부터 소환되는 일을 없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몸이 회복 되는 데만 거의 1년 가까이 걸렸으니까요. 그리고 이유야 어쨌든 당의 입장에서 볼 때 2차례 모두 실패한 것 아닙니까.

그런 공작원에게 또 다른 임무를 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저는 요양을 하고 나서 함흥시에 발전소 관리책으로 파견할 때만 해도 평범한 인민의 생활을 할 수 있을 거란 기대감을 가졌죠. 그런데 그게 아니더란 말입니다. 이미 공산당은 썩어 있었던 겁니다."

1970년대 말 그는 4번째로 당에 소환되었다.

앞서 3번의 교육에 비해 4번째 교육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공작목표는 60년 이후로 연락이 되지 않는 인천의 고정선에 대한 확인과 그 선을 다시 회복하는 것이었다. 이전 공작교육과 다름이 있다면 남파될 신분이 달라졌다는 것과 화폐 가치 등이 달라진 생활교육을 받았다는 것 이외에 특별한 건 없었다.

달라진 서울, 노동당은 속고 있었다

1980년 5월, 공작선에 몸을 싣고 하루 반나절 남쪽을 향해 항해 한 뒤 남해안에 도착하였다. 안내조원들의 안내를 받아 해안에 상륙한 뒤 그들과 헤어지고 공작 장비 가방은 인근 야산에 묻어두고 드보크 표시를 해두었다.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가 산을 내려간 뒤 도보와 버스를 이용해 순천으로 이동하였다. 순천에서 서울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그제서야 긴장이 누그러지고 잠을 청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긴 잠을 자고 일어나니 이미 차창 밖은 어두워져가고 있었다. 어둑해질 무렵 서울역에 도착한 그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가 북한 초대소에서 배우고 익혔던 서울과 완전히 달랐기 때문이다. 전차는 온데 간데 없고, 토큰과 시내버스표를 사용하고 있었다. 건물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크고 높았다. 엄청난 인파의 사람들은 북한에서는 보지 못했던 풍경이었다. 노동당은 남쪽 정보에 속고 있었던 것이다. 전차로 이동하라던 인천은 이미 지하철이 놓여져 있었다.

그는 어디서부터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방향과 목표를 상실할 만큼 달라진 서울에 질려버렸다. 그는 다시 순천행 기차를 타고 내려갔다가 다음날 다시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왔다. 그래도 임무를 마쳐야 한다는 생각에 인천을 가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그리고 서울역에서 잠시 서성거렸다. 지나가는 한 노파에게 인천 가는 방법을 물었다. 노파는 처음에 귀찮다는 듯 무시하려다가 위아래로 남자를 쳐다보며 길을 알려주었다. 고맙다는 말을 하고 노파와 헤어진 그는 서울역에 들어가려던 순간 감자탕이 생각났다.

'그래, 감자탕, 어디서 팔까?'

주변을 서성거리며 감자탕 집을 찾던 그의 앞에 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이 다가왔다. 순간 자신이 발각되었다는 생각에 만년필에 숨겨둔 독침을 빼내는 순간 경찰의 제지로 놓쳐버렸다. 그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마지막 방법을 쓰기로 했다. 경찰을 바라보며 그는 지그시 혀를 깨물었다.

'이 정도면 혀가 반쯤은 날아가겠지....'

그리고는 잘린 혀가 기도를 막으며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의 의식은 점점 희미해져 갔다.
후회가 되었다. 감자탕을 먼저 먹으러 갔어야 하는데...

그가 의식을 찾았을 때 그는 어느 병원에 있었다. 그의 입은 솜과 천으로 막혀 있었고 그이 코에는 긴 고무호스 같은 게 연결되어 있었다. 약과 음식을 넣는 호스였다.

아무도 없는 그 방에 신문 하나가 놓여있었다. 그 신문 1면에 '광주에 잠입하기 위해 침투한 간첩 이창용 검거'라고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기사 옆에 자신의 사진이 함께 인쇄되어 있었다.

'뭐 내가 광주에 잠입하려고 했다고? 이창용은 또 누구야?'

자살시도를 위해 혀를 깨물었던 그는 2cm가량 혀가 잘렸고, 그 때문에 그로부터 한 달간 말을 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가 말하지 못하는 사이에 그는 세상에 광주사태를 폭동으로 조장하기 위해 북에서 파견된 남파간첩 이○용으로 알려졌다.

1980년 5월 24일자 <경향신문>. "서울시경찰국은 최근 학생 및 시민시위가 극렬한 광주시에 잠입, 이들의 시위를 무장폭동으로 유도하고 유언비어를 날조유포하려는 목적으로 남파된 북괴간첩 이창용을 5월 23일 서울에서 검거했다"고 보도하고 있다. ⓒ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근데 감자탕은 왜 드시려고 했어요?"

"인천에 단선된 조직을 회복시키는 것이 내가 남파된 목적이었어요. 그런데 잡히고 나서 당국은 내가 5.18 광주폭동을 사주하기 위해 북에서 남파된 간첩이라고 선동했지요."
"당국 조사에서 실제 남파 임무를 이야기했습니까?'
"그럼요. 이미 포로가 된 이상 뭘 더 숨기겠습니까? 혀가 잘려서 말은 하지 못했지만 글은 쓸 수가 있잖아요. 이미 자술서를 통해 내 신원과 공작내용을 모두 밝혔지요. 하지만 당국은 오로지 광주폭동에 남파된 간첩이라고만 발표했지요."

"그래서 그 뒤로 어떻게 생활했습니까?"
"잡힌 놈의 생활이 어떻겠습니까? 군 방첩대에서 몇 년 있으면서 북한에서 알고 있던 지령내용을 발설하자 몇 건의 간첩사건이 터지더군요. 그리고는 경찰로 신변이 옮겨져 생활했는데 그곳에서도 역시 북한에서 공작활동 정보를 알려달라고 보채는 바람에 몇 가지를 이야기했더니 여기저기서 또 간첩사건을 터트립디다. 그리고 내외연구소라는 곳에 연구원 이름으로 소위 불온서적이라는 것을 감정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말이 감정이지 전부 불온서적이라고 인정하는 사인을 해주는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수사관들에게 저는 '노다지'였습니다. 간첩을 캐는 '노다지'..."

"근데 감자탕은 왜 드시려고 했어요?"
"왜긴요. 내가 기억하는 서울과 완전히 달라져 있는 모습을 보니 공작이고 뭐고 아무 생각도 안 납디다. 그런데 딱 하나 기억나는 것 그게 종로의 감자탕 집이었어요. 그곳을 찾아내면 뭔가 용기 같은 것이 생길 것 같았죠."

그날 우리는 그와 함께 서대문 구청 근처의 감자탕 집에 갔다. 그가 지금도 자주 간다는 그 집은 그가 기억하는 감자탕, 아니 뼈다귀탕과 가장 비슷한 모양과 맛이라고 했다.

열심히 뼈에서 살을 발라내고 있는 나를 잠시 바라보다 이런 말을 했다.

"내가 이 뼈다귀 음식을 왜 좋아하는지 궁금하지 않아요?"
"어릴 적 기억이 있어서 아닌가요?"
"그렇죠. 어릴 적 기억이 있어서죠. 지금 먹고 있는 감자탕 등뼈는 살이 참 많지만 그 옛날 등뼈에는 살이 별로 없었어요. 그저 살 없는 뼈를 빨아먹는 정도였죠. 개들이 살 없는 뼈를 그저 핥는 것처럼... 우리처럼 돈 없고 못사는 사람들에게 이 뼈다귀탕은 그런 음식이죠. 그나마 고기를 먹고 있다는 심정, 위안을 주는 그런 음식이었어요. 내가 인민군을 선택했던 건 뼈가 아닌 살을 먹고 싶어서였는지 몰라요. 그러나 지금 와서 돌아 보니 살은 어디에도 없었네요. 오히려 내가 저 등뼈 신세가 되었지요. 뜯기고 버려진 등뼈..."
덧붙이는 글 이 글을 쓴 변상철님은 '지금여기에'(국가폭력피해자 지원단체) 사무국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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