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1.07 15:48최종 업데이트 18.01.07 15:48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못했던 자신의 과거를 들려주는 사람들-국가폭력피해자들이 있다. 그들의 억울함을 듣고 조사하는 과거사 위원회가 사라진 뒤에도 나는 여전히 그들을 만나는 일을 해왔다. 나는 국가폭력피해자를 음식으로 기억한다. 그 이야기를 풀어보려 한다.-기자 말

지금도 생계를 위해 매일 타고 나가는 서창덕 어선 ⓒ 변상철


군산 개야도에서 군산항까지 50분이면 도착하는 뱃길은 의외로 험했다. 하늘은 맑고 바람이 잔잔했지만 파도만큼은 태풍 치듯 크게 요동치고 있었다. 30여 명이나 앉을 수 있다는 온돌 바닥 형태의 여객선에는 10여 명 남짓 되는 사람들이 타고 있었다. 우편물을 가지고 오거나 개야도에서 군산의 가족을 만나기 위해 나가는 사람, 시청에 일을 보기 위해 나가는 사람, 교복 입은 학생까지 다양했다.

"이제사 간첩 섬을 빠져나가는 구만요. 하하하."


옆에 앉아 있던 서창덕씨가 말을 꺼냈다. 우스갯 소리라고 건넨 그 말이 전혀 우습게 들리지 않았다.

'간첩 섬'

지금은 100여 가구도 거주하지 않는 작은 섬에 납북된 어부가 100여 명에 이른다. 그리고 이 중 다시 간첩으로 몰린 사람들이 10여 명.... '간첩 섬'이라고 불리는 것이 과장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15살 때부터 배를 탔어요. 그러다가 조금 컸다고 67년도인가에 중선(重船)으로 갈아탔어요. 중선 배를 타도 아직 나이가 어리니 화장(밥 짓는 일을 하는 선원)일이나 하고 그랬죠. 그래서 밥이랑 간단한 국 같은 건 잘 끓여내요."
"요리사네요."
"요리사는 무슨, 소금하고 고춧가루 넣으면 끝! 이여라. 하하"

납북됐다 돌아왔는데 간첩으로

승룡호 사건의 수사기록 중 의견서 마지막에 기재된 참여 수사관들의 명단. 이들중 남궁길영 등에게 당한 고문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고 기억하고 있다. ⓒ 변상철


1967년 5월 말의 서해바다는 조기잡이의 끝물을 따라 올라온 배로 가득했다. 그 기간을 놓치면 선주로서도 조기를 잡지 못하니 큰 낭패였다. 모든 배는 불을 환히 밝히고 연평도 바다를 메웠다. 연평도 근해에서 밤새 조기를 잡고 새벽녘에 잠깐 눈을 붙이고 있는데 총소리가 들렸다. 예감이 좋지 않아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데 총구 하나가 선실 안으로 쑥 들어왔다.

"움직이지 말고 그 자리에 그대로 있으라우!"

낯선 말투. 그러나 충분히 위협적인 이질적 억양. 선실에 갇힌 채 배는 갈고리에 묶여 북한 경비정에 끌려갔다. 그길로 해주에 상륙해 간단한 신원조회와 신체검사를 한 뒤 평양으로 옮겨갔다. 그곳에서 4개월간 포로 아닌 포로 신세가 되었다.

"하루 일과표가 있어요. 일어나서 밥 먹이고 나면 뭔 학습이라고 맨날 정치니, 경제니 떠들어요. 우리 같은 까막눈들이 뭘 알겄시유. 참 퍽퍽허더만. 그리고 또 며칠 만에 한번씩은 모란봉이니 방직공장이니 이런 데를 보여주면서 자랑을 해요. 지들이 잘 산다고.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는 집에 빨리 보내달라고 매일 야단이었지유."

그렇게 보낸 시간이 4개월. 시간이 지날수록 고향에 못 돌아가는 것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짐정리를 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안도의 한숨과 함께 야간기차를 타고 해주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환송파티가 열렸다. 그리고 다음 날, 타고 왔던 배를 이용해 남한으로 내려오니 해군함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뭐 좋았지유. 남한에 돌아오니 을매나 좋아유. 집에 돌아간다고 우리 같은 나이 어린 선원들은 신나서 떠들고 난리를 치는데, 나이 드신 선원들 얼굴은 왠지 안 좋더라구. 남한 군함을 만나기 전에 북한에서 떠날 때 받았던 생선이랑 물건을 전부 바다에 버리는 거예유. 받은 거 알면 큰일 난다고."

그랬다. 나이 든 선원들은 알고 있었다. 그들은 곧 국가보안법상 잠입탈출죄로 처벌을 받을 것이고, 그 죄를 만들기 위해 경찰에서 모진 고문을 받게 될 터였다. 인천에서 이틀 조사 후 군산으로 내려온 이들은 수개월 동안 여관과 경찰에 감금된 채 고문을 당했다. 결국 나이 든 선원들의 예상대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처벌을 받았다. 해군과 해경은 그렇게 자신들의 책임을 국민에게 떠 넘겼던 것이다.

"아이고 정말 억울허지유. 뻔히 남한 바다에 내려와서 우릴 납치해 가는데도 해군이랑 해경은 손 놓고 있더랑께요. 그 놈들이 처벌을 받아야지 왜 우리가 처벌을 받냐고요. 경찰에서 조사를 받는데도 해도(海圖)를 가져오더니 군사분계선 위에다가 점을 딱 찍어놓고는 '여기가 니들이 조업한 데가 맞지?' 하면서 오질라게 패더만요."

"국밥 두 개만 겁나게 말아줘 봐유"

징역 1년을 살고 나온 그는 징역살이보다 더 긴 징역살이를 해야 했다. 바로 '보호관찰'이었다. 어디를 가든지, 누구를 만다든지, 심지어 집안 잔칫날에도 그는 어김없이 나타났다. 출항 전에 선원들과 함께 그물이라도 손질하고 있으면 나타나 요즘 잘 지내냐고 묻고는 동료 선원들에게 그에 대해 수상한 점이 있으면 신고하라고 하였다.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될 수가 없었다. 담당 경찰이 소름 끼치게 싫었다. 그 경찰이 오면 고급 식당에 데리고 갔다. 그곳에서 맛난 음식을 대접하고 돈도 찔러 넣어주며 제발 더 이상 괴롭히지 말아달라고 빌었다. 그는 잠재적 용의자, 범죄자 취급을 받았다.

이야기를 듣는 동안 우리는 군산항에 도착했다. 점심 시간이 얼추 되어서 밥을 먹기로 했다. 조금 걸어야 한다고 해서 괜찮다고 했다. 10분이나 걸었을까. 한눈에도 비싸 보이는 일식집 앞에 도착했다.

들어가려는 그를 잡고 나는 회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조금 당황하던 그는 회 아니라도 맛있는 것이 많으니 들어가자고 하였지만 나는 한사코 만류했다.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곳으로 가자고 했다. 짐짓 실망하는 얼굴로 그는 내가 참 별스럽다면서 근처 시장의 국밥집으로 향했다. 순대국밥 집은 시장통 골목에 있었다.

"국밥 두 개만 겁나게 말아줘 봐유."

테이블이 4개밖에 안 되는 자그마한 식당이지만 식당은 국밥을 먹으러 오는 사람으로 붐볐다. 시장 골목 입구에 있어서 현지에 사는 분들이 장을 보고 들러 먹는 곳이라 대부분 나이 지긋한 분들이 많았다. 김치와 깍두기를 접시에 담으며 그가 말했다.

"아니 모처럼 만에 맛있는 것 좀 먹을라고 했더만 왜 그런데요."
"저 평소에 그런 음식 잘 안 먹어요. 그리고 왜 그렇게 비싼 집을 들어가려고 하세요?"
"아, 다른 수사관들은 지들 입으로 비싼 음식 먹고 싶다고 하더만 왜 조사관님은 그런 데를 싫다고 하는지 몰르겄네."
"비싼 음식 먹으면 뭐가 특별해 지나요? 다 똑같지."
"비싼 음식 대접해야 나도 싼 놈 취급 안 당하더라구요. 안 그러면 어디 사람 취급 하는 줄 알아요? 월매나 무시하고 지랄을 하는데."
"저 싸구려 음식 먹는다고 선생님 싸구려 취급하는 그런 인간 아니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리고 음식 값은 각자 낼 테니 그리 아세요."
"얼래? 아, 먼 소리를 하는 거유. 오늘 국밥 값은 내가 낼 테니 그리 아셔요."
"아, 싫다니까요!"

그렇게 티격태격 장터 국밥을 먹고 겨우 계산을 하는데 갑자기 국밥 2개를 포장해 달라고 한다. 집에 가서 드실 모양이다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국밥 집에서 나오며 밥을 먹었으니 차나 한 잔 하자고 한다.

"제가 죄인이쥬, 한평생 씻지 못할 죄인"

오른쪽이 서창덕. 고문후유증으로 병원을 찾는 일은 일상다반사가 되었다. ⓒ 변상철


서울로 빨리 올라가야 한다는 말이 목까지 올라왔으나 차 한 잔 후다닥 마시고 가자는 생각에 그러마 대답했다. 우리가 들어간 곳은 허름한 건물의 2층 다방이었다. 다방이라고 하지만 손님 하나 없고 찬 기운만 가득해 영업을 하는지도 의심스러울 정도로 옹색한 분위기였다. 그와 비슷한 나이의 마담이 작은 방에서 나오다 말고 인상을 찡그린다. 한숨을 쉬며 슬리퍼를 직직 끌고는 물 2잔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커피드실 거쥬? 이 여기, 커피 2잔."

대꾸도 없이 마담이 돌아갔다. 어색한 분위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담은 곧 뜨거운 커피가 담긴 찻잔과 설탕, 크림이 들어있는 사각유리그릇을 내려놓고 방으로 들어갔다.

"아시는 분인가 봐요?"
"예, 아무래도 여기 오래 살다 보니..."

아무 말도 없이 차만 들이켰다. 차를 다 마신 뒤에는 찻값을 탁자위에 올려놓았다.

"우리 갈텨."

우리는 어두운 건물 계단을 따라 1층으로 내려왔다. 그런데 좀 전에 샀던 국밥이 안 보였다.

"국밥 두고 온 거 같은데요?"
"아, 그거요? 저 사람 먹으라고 사온 거예요."
"아까 그 다방 주인이요? 꽤 잘 아시는 분 같던데요?"
"예, 잘 알지유. 알다마다요. 그 사람 저랑 같이 살 붙이고 살던 사람이에요. 사건 나고 나서 간첩자식 만들까봐 아들이 갓난쟁일 때 이혼해 줬어요. 그러면 간첩자식은 면할 줄 알았더니 이혼해도 간첩자식은 간첩자식입디다. 그 사람들 먹으라고 국밥 사다 놓은 거예요. 그래도 아까 표정 봤쥬? 을매나 실컸어요. 지 때문에 자기랑 애 앞길 다 망쳐놨으니. 제가 죄인이쥬. 한평생 씻지 못할 죄인이쥬."

왜 그가 죄인이 되어 국밥으로 속죄를 해야 하나. 속죄를 해야 하는 건 그와 그의 가족을 저토록 분노와 저주 가득한 세상을 살도록 만든 국가가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왜 서로를 저주하고 미워하게 만든 것인가.

저들로 인해 부와 명예를 얻은 이들은 왜 사죄하지 않고 책임지지 않는가. 아직 배가 고프다며 게걸스럽게 국밥을 먹어대던 누군가의 국밥은 이렇듯 고통 받는 이들 앞에 사죄하는 음식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는 지난 2011년 무죄 확정을 받았으나 그의 가족은 회복되지 못했다. 사법부로부터의 무죄가 사회로부터의 회복까지 이어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도 허름한 다방 밑에서 검은 봉지에 담긴 국밥을 들고 서성이고 있을 어느 늙은 어부의 고단한 삶을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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