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2.04 07:41최종 업데이트 21.02.04 0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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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지인에게 놀라운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한 부부의 사연이었는데 어느 날 아픈 아내가 몸져 누워 있자 남편이 그래도 밥은 먹어야 한다며 불러냈다. 이에 아내는 자연스럽게 식탁에 가서 앉았는데 남편이 자신을 이상한 눈으로 멀뚱멀뚱 쳐다봤다는 것이다. 나는 속으로 '설마 그건 아니겠지'라고 생각했는데 불행히도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남편은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뭐해? 밥 차리지 않고?"


어쩌면 누군가 일부러 꾸며낸 '망한 결혼 괴담'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생각보다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나만 해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실제로 들은 경험이 몇 번 있다. 이따금 커뮤니티 고민 사이트에 유사한 경험담이 올라오면 공감하는 댓글들이 엄청나게 달리기도 한다. 통계청의 조사에 따르면 2019년 한국 여성의 하루 평균 가사노동 시간은 193분인 반면 남성은 56분에 불과했다. 경험을 수치가 입증한 셈이다.

코로나가 드러낸 '불평등한' 가족 관계
   

사람들은 가족을 개인을 보호할 단단한 울타리나 안식처로 여기곤 한다. 하지만 코로나19의 대유행은 적어도 여성에게 가정이 그렇지 못한 공간임을 아주 극단적인 방식으로 드러냈다. ⓒ envatoelements

   
2020년 한 해 동안 세계 전체가 코로나19 대유행이라는 재난을 정면으로 맞았다. 이 끔찍한 바이러스는 사회 곳곳에 영향을 미쳤으며 개인의 일상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코로나19는 한국 사회의 가족 관계에도 영향력을 발휘했을까.

2020년 한국여성민우회에서 진행한 '밥, 잠, 쉼'은 이를 확인할 수 있는 활동이었다. 이 프로젝트는 다양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이 감염병 대유행의 시국에 단순히 생존하는 것을 넘어 잘 먹고, 잘 자고, 잘 쉬기 위한 조건을 탐색한 결과물이었다. 나는 여러 그룹들 중에서도 직장에 다니며 육아를 병행하는 기혼여성들의 경험에 주목했다.

이들 역시도 코로나19로 인해 일상이 변화하는 경험을 했을까? 그랬다. 그렇다면 그 경험이 긍정적이었을까? 슬프게도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팬데믹 이후에 먹고 자고 쉬는 것에 더 큰 어려움을 겪었다고 토로했다. 가장 큰 이유는 불평등한 가사노동 분담이다. 코로나19로 인해 비대면 원격교육과 재택근무가 늘었지만 아이를 돌보고 식사를 준비하고 집을 치우는 등의 노동은 여전히 여성의 몫으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집담회와 온라인 설문조사에 참여한 이들은 가족들 때문에 식사 중 열 번도 넘게 일어나거나 집에서는 계속 정리를 해야 하기에 카페로 나가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현실을 전했다. 이 과정에서 경력단절의 위기를 겪는 여성들도 꽤 존재했다.

정상가족은 없다

사람들은 가족을 개인을 보호할 단단한 울타리나 안식처로 여기곤 한다. 하지만 코로나19의 대유행은 적어도 여성에게 가정이 그렇지 못한 공간임을 아주 극단적인 방식으로 드러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대안이 있을까. 가장 근본적인 해결책은 평등한 가사노동과 돌봄 분담이 실현되는 것이다. 사회의 인식이 바뀌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국가 정책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 또한 지금과 같은 팬데믹 시국에도 돌봄 노동을 뒷받침 할 수 있는 새롭고 단단한 복지 제도도 필요하다. 그리고 여기에 나는 다소 엉뚱해 보이는 선택지를 추가하고자 한다. 바로 다양한 가족구성권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성애 부부와 자녀의 구성으로 대표되는 소위 '정상가족' 모델은 가족단위의 표준처럼 기능하고 있다. 이 모델에서 남성은 생계부양자로 여성은 가사노동자이자 돌봄노동자로 당연한 듯 역할을 부여 받는다. 이 분담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거나 여기에서 이탈하는 가족이 등장할 때 그들은 비정상으로 분류된다. 때문에 당연히 국가 정책은 정상가족 시스템이 원활히 굴러가는 것에 집중된다. 정책이 이러하다면 사회의 인식이 변할 리 만무하다. 이러한 환경이 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답은 간단하다. 표준을 깨는 것이다.

다양한 가족관계가 만들 미래
     

누구의 몫으로 정해진 집안일은 없다. ⓒ envatoelements

   
내가 이런 주장을 하면 이성애 부부와 자녀로 구성된 가족을 해체하자는 것이냐는 질문이 돌아오곤 한다. 전혀 그렇지 않다. 다만 그들이 가진 '정상가족'이라는 지위에서 '정상', 두 글자만 지우자는 것이다.

만일 세상에 '생계부양자 남성-가사노동자 여성'의 구도로 쉽게 치환할 수 없는 가족관계가 늘어난다면 어떻게 될까. 성별에 따라서가 아니라 각자의 재능이나 혹은 합의를 통해, 그리고 무엇보다 평등하게 역할이 분담되는 가족이 늘어난다면 말이다. 사람들은 더 이상 오직 한 사람에게 가사노동 독박을 씌우고 고통을 전가하는 가족관계가 그렇게 효율적이지도 않으며 '정상'이나 '표준'이 되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할 것이다. 즉 새로운 삶의 양식을 실현하고 직접 대안을 보여주는 것은 사회를 움직이는 역동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중요한 전제조건이 있다. 바로 다양한 가족관계를 인정하는 법과 제도다. 이들에게 동등한 가족구성권과 보호의 울타리를 제공하지 않으면서 그저 모여 살라는 것은 함께 살며 겪을 수도 있는 예기치 못한 위기와 사고의 부담을 개인이 홀로 뒷감당 하라는 말밖에 되지 않는다.

다행히도 최근 여성가족부는 '제4차 건강가정기본계획안'을 통해 비혼이나 동거를 포함하여 다양한 가족구성을 인정하는 방안을 추진할 의지를 드러냈다. 그런데 이와 관련하여 지난 1월 26일에 열린 온라인 공청회에서는 보수 개신교 세력이 채팅창에 난입해 '동성커플·동거커플을 인정해 가정을 해체하는 법'에 반대한다는 식의 댓글을 우르르 남겼다고 한다. 그리고 이들은 여성가족부로 항의전화를 넣을 것을 독려하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지금과 같은 형식의 '정상가족'이 해체되는 것에 별다른 유감은 없다. 시효가 다한 삶의 양식은 결국 스러지기 마련이다. 한때는 보편이었던 것이 지금은 씻은 듯이 사라져 있기도 하다. 세상은 그렇게 변해 왔다. 하지만 묻고 싶다. 지금 '가정'을 해체하고 있는 것은 진정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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