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5.25 12:20최종 업데이트 21.05.25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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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죽을 만큼 통증에 시달렸습니다. 그 통증에서 벗어나 회복 단계에 이르러 사진을 찍어 놓고 보니 그새 수염이 턱밑으로 내려갔지만 눈빛은 다시 살아났습니다. ⓒ 송성영

 
얼마 전 연락이 뜸하던 친구한테서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몇 개월 동안 오마이뉴스에 글도 올리지 않고, 많이 아팠다며?"
"그려 많이 아펐지. 하하! 암환자가 아픈 것은 당연한 것이지. 아프지 않은 게 이상한 일이 아닌가."
"그러긴 하지만."
"까딱하면 염라대왕 문안인사 갈 뻔했네."
"가보지도 못하고 미안허네."
"괜찮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전화도 받지 않고 사람들도 만나지 않았네. 이제 좀 살 만하니 걱정 말게. 글도 다시 쓰기 시작했고..."



죽을 만큼 아팠습니다. 온몸을 지탱할 수 없을 만큼 통증이라는 거센 폭풍이 몰려와 속을 뒤집어 놓았습니다. 급기야 암세포가 자리 잡고 있는 위가 갈기갈기 찢기는 듯한 통증이 몰아쳤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잠시 괜찮다 싶어 숨을 몰아쉬고 있노라면 다시 통증의 폭풍이 거침없이 휘몰아치기를 반복했습니다.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싶었습니다. 살고자하는 부질없는 희망마저도, 통증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2018년 11월 첫 번째 쓰러졌을 때와 또 달랐습니다. 그때는 위출혈이 심해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호흡이 가빠져 숨을 제대로 쉴 수 없는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숨 막혀 거의 죽기 일보 직전에 태아호흡 자세로 쓰러져 가는 숨통이 열리는 바람에 살아났지만 그 고통의 순간은 아주 짧았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보름 동안 시도 때도 없이 이제까지 견뎌보지 못한 엄청난 통증을 견뎌내야 했습니다. 그리고 두 달 넘게 봄 기운과 함께 대지에 새 살이 돋는 과정을 지켜보듯 조금씩 살아나는 나를 지켜봤습니다.
 

매년 때가 되면 어김없이 딱딱한 대지를 뚫고나와 꽃을 피우는 수선화처럼 하루든 한 생이든 반복되는 일상에서 살고 죽는 것은 내게 그리 중요치 않습니다. 어떻게 사느냐. 나를 온전히 내려놓고 어떤 꽃을 피워 세상에 어떤 향기를 주는가. 그렇게 살고 지고자 했습니다. ⓒ 송성영

 
첫 번째 쓰러져 위암 판정을 받고 수술을 거부한 지 2년 4개월째로 접어들 무렵인 2021년 2월 말쯤이었습니다. 내 몸은 어느 순간 폭풍의 아가리에서 산산이 부서질 난파선이나 다름없습니다. 그 난파선에 겨우 목숨 줄을 걸어놓고 거의 초죽음 상태로 버텼습니다. 통증이 극에 달할 때마다 죽음을 떠올렸습니다. 그 모든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죽음은 달콤한 유혹이었습니다.

"통증이 심하면 병원에서 모르핀을 처방해 준다던데..."
"병원에서 모르핀을 맞게 되면 잠시 통증에서 벗어날 수 있겠지만 그때뿐이겠지. 모르핀으로 견디고 나면 그 다음에는 더 자주 더 큰 통증이 찾아올 것이라 보네."
"그 심한 통증을 어떻게 견뎠나?"
"그냥 그 통증을 죽는 순간까지 지켜보겠노라 마음먹고 끊임없이 지켜보고 또 지켜봤지."


죽을 만큼 아팠지만... 병원에 가지 않고 통증을 지켜보았습니다

통증이 너무 심해지니 그동안 자연치유를 위해 스스로 거부해왔던 진통제, 병원, 입원, 모르핀 등이 유혹의 손짓을 보내왔고, 수술하지 않으면 2년도 채 살지 못할 것이라 했던 암전문의들의 말이 실감났습니다. 저들 말대로 이제 갈 때가 됐구나 싶었습니다.

그나마 2년 넘게 버텨 왔으니 살만큼 살았다 싶었습니다. 암전문의들이 내놓은 통계에 의하면 통계치를 벗어나 용케 살아 있어도 지금쯤이면 온 몸으로 암세포가 퍼져 나간 상태. 언제 죽게 될지 모르는 시한부 인생 말기인 것이니 죽음이 바싹 다가왔다 여긴 것이지요.

"그려, 살만큼 살았다. 살만큼 살았어. 이제 떠날 때가 된 모양이다..."

산막에서 함께 생활하는 큰 아들(이후 큰 행자) 몰래 배를 움켜잡고 미친 사람처럼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기왕 세상 뜰 거 죽는 순간까지 혼자서 버틸 수 있는데까지 버텨 보기로 했습니다. 병원에 누워 진통제에 의지해 생을 마감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수술을 거부할 때의 마음가짐이 그랬듯이 그 무엇보다 죽음만큼은 내 스스로 선택하고 싶었습니다.

어차피 죽을 목숨 병원에서 한두 달 더 연명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여기서 마음자리까지 무너지면 도미노 현상처럼 하나 둘 셋... '나'라는 존재에 이르기까지 모든 게 무너져 내릴 것이었기에, 마지막 죽음의 강 앞에서 배수진을 쳐 놓고 영정사진을 찍고 유서를 작성했습니다.

큰 행자, 인효가 불안해 할까봐 녀석의 눈치를 살펴가며 통증을 움켜잡고 어떻게 죽음이 찾아오는지를 지켜봤습니다. 훗날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 여겨 순간순간의 감정 변화와 몸 상태를 기록해 가면서 말입니다.

급기야 걸을 수도 일어날 수도 없고, 누워 있어도 소용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나마 통증의 극점에서 잠시 그 통증의 폭풍이 잠잠해지는 순간순간이 있었습니다. 아주 잠시지만 통증이 잠잠해지는 순간 거짓말처럼 편안한 상태가 찾아왔습니다. 하여 통증이 너무 심할 때 병원에서 처방해 준다는 모르핀의 유혹을 견뎌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죽음이 눈앞에 다가왔다 여기고 유서를 작성하고 영정 사진을 폼 나게 찍겠노라 가장 좋아하는 복사 꽂을 귀에 꽂았습니다. 사진 속에서 나는 화사한 꽃처럼 웃고자 하지만 눈빛은 이미 죽어 가고 있었습니다. ⓒ 송성영

 
통증의 원인

그렇다면 이 극심한 위통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요? 분명 그 어떤 원인이 있기에 위통이 온 것이겠지요. 그 원인을 따지고 들자면 한도 끝도 없지만 가장 큰 원인은 위에 자리 잡은 암세포 때문일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암세포를 자극한 원인은 무엇일까'를 되짚어 보았습니다.

지난 겨울은 콧수염에 고드름이 맺힐 정도로 유난히 추위가 심했습니다. 큰 행자가 지 애비 부실한 몸 챙기겠다고 구들장에 손을 대기 힘들 정도로 아궁이 불을 활활 지폈지만 얇은 바람벽과 허름한 문틈 사이로 기어 들어오는 찬 기운 때문에 웃풍이 심해 방안 온도는 영상 6도. 전기요금이 평소보다 두세 배로 나오는 것이 문제지만 전기난로를 가동할 수 있기에 그나마 버틸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생명 유지의 필수 조건인 물이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산막 저만치에서 호스를 통해 물을 끌어다 쓰기 때문에 호스가 얼 것을 대비해 늘 함지박에 물을 받아 놓고 쓰는데 그 함지박 물마저 꽁꽁 얼어붙는 날이 많았습니다.

먹는 생수는 멀리 자동차를 몰아 산 너머 일락사라는 사찰 초입의 약수터에서 받아쓰고, 허드레 물은 꽁꽁 얼어붙은 함지박의 얼음을 깨 아궁이 솥에 녹여 쓰거나 그마저 바닥이 날 때는 몇 동이에 금세 바닥을 보이는 시원찮은 우물을 퍼올려야 했습니다.
 

지난겨울은 유난히 추웠습니다. 아궁이 불을 지펴 구들장을 뜨겁게 달구었지만 얇은 바람벽과 문틈 사이로 들어온 웃풍이 심해 방안 온도가 영상 6도로 떨어졌습니다. ⓒ 송성영

 
그나마 큰 행자가 곁에 있어서 그 혹독한 겨울을 용케 견뎌냈습니다. 하지만 날이 풀리면서 꽁꽁 얼어 있던 부실한 축대가 봄기운에 조금씩 무너져 내리듯 암세포와 함께 살아가는 부실한 내 몸도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한 겨울에도 용케 버텨냈던 속 쓰림이 잦아지기 시작했고 급기야 틀니 걸이로 겨우 버티고 있던 어금니마저 빠져나가 몸의 균형이 깨지기 시작했습니다. 뽑혀나간 자리에 다시 틀니를 끼워 교정해야 했는데 그 기간이 보름이나 걸렸습니다.

그 보름 동안 아무것도 씹을 수 없어 죽으로 연명했습니다. 하루 한두 끼 죽을 먹다가 속 쓰림이 시작되면 단식을 했습니다. 하지만 단식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속을 비우는 것보다는 당장 영양 보충이 문제였습니다. 거기다 멀건 죽을 물 삼키듯이 먹다보니 음식을 씹어 삼킬 때 소화 기능을 돕는 프티알린, 침을 삼키지 못하니 소화가 제대로 될 수 없었습니다. 제대로 먹지도 소화시키지도 못하니 날아갈수록 체중이 빠지고 속 쓰림은 가중되고 기운은 축축 쳐졌습니다.

거기다가 미세먼지까지 가세했습니다. 먹는 것으로 기운 보충이 쉽지 않을 때는 명상이나 기혈운동으로 보충하면 어느 정도 버틸 수 있는데 그마저 미세먼지가 주저 앉혔습니다. 명상이나 기혈운동은 숨쉬기, 단전호흡을 기본으로 하는데 미세먼지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지 못하게 했고 평범한 숨쉬기조차 힘들게 했던 것입니다. 일테면 자연요법의 세 가지 필수조건인 명상, 기혈운동, 식이요법이 도미노처럼 무너져 내렸던 것입니다. 그 자리에 극심한 속 쓰림, 통증이 자리잡아가고 있었던 것이지요.

체중도 급속도로 줄어들었습니다. 62킬로그램 정도 나가던 체중이 불과 20여일 만에 54킬로그램까지 떨어졌습니다. 한창때 85킬로그램 전후를 유지 하던 체중이 54킬로그램이다 보니 몸은 거의 뼈만 앙상하게 남았습니다. 갈빗대가 선명하게 드러났습니다. 그럼에도 목욕탕에 갈 때마다 싱어송라이터로 활동하고 있는 큰 행자, 송인효에게 농담을 건넬 만큼 정신은 말짱했습니다.

"야 인효야! 아부지 갈빗대로 기타 쳐도 되겠다 잉? 이걸로 기타 치고 노래 한번 해볼래?"
"에이그 환장 혀."
"내 어렸을 때 별명이 갈비씨였는데 다시 그때로 돌아가는 거 같다."
"지금은 그때와 다르잖아."

"괜찮다. 내 위가 병들었지 정신은 병들지 않았다 자식아."
"기운이 뚝 떨어져서 문제지."
"기운은 다시 보충하면 되고... 암튼 그동안 필요이상으로 부풀렸던 살집을 다 내려놓고 싶었는디 잘 됐다."


먹지 못하면 단식을 하면 될 것이었고 체중이 빠지면 기운 돋는 뭔가를 섭취해 보충하면 될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시시때때로 달려드는 통증은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암 선고를 받은 전후로 종종 통증이 몰려오긴 했지만 이번이 가장 극심했습니다.

틀니 교정 때문에 씹지 못하고 넘긴 음식물은 그렇잖아도 암세포로 시원찮은 위에 큰 부담을 주었습니다. 급기야 암세포로 헐어버린 위에서 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습니다. 통증에 시달려 온몸이 망가진 상태에서 혈변과 함께 십여 미터의 거리도 걷기 힘들 정도로 체력이 급속도로 떨어졌고 통증은 쉽게 가라앉지 않아 아, 이제는 정말로 죽는구나 싶었습니다.

그럼에도 병원에 가질 않았습니다. 이 위태로운 통증을 견뎌내는 과정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옛 어른들의 '사람 목숨 참 질기다'라는 말이 그냥 함부로 내뱉은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만큼 우리의 몸은 아무리 병든 몸이라 할지라도 그 뭔가의 질긴 생명력이 있다는 것이지요. 풍전등화와 다름없는 암 환자인 나의 목숨줄은 얼마나 질긴지 그 극심한 통증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다음 기사에 자세히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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