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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혈이 끝난 후 상품을 챙겨 교실로 돌아가는 모습이다.
▲ 헌혈의 흔적 헌혈이 끝난 후 상품을 챙겨 교실로 돌아가는 모습이다.
ⓒ 정예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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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헌혈에 대해서 평소 관심이 있었다. 내가 만들어낸 피를 다른 사람의 몸에 넣게 된다고? 피를 많이 뽑으면 얼마나 어지러울까? 헌혈하면 영화표도 준다던데? 헌혈차 내부는 또 어떻게 생겼을까?

마침 적당한 기회가 생겼다. 지난 5월 27일, 학교에는 네 대의 헌혈 버스가 찾아왔다. 희망자는 2주 전에 신청하게 되어있었다. 한 번쯤 해보는 것도 좋겠지. 별다른 의식을 가지고 신청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헌혈 버스는 그렇게 붐비지 않았다. 한시가 바쁜 고등학생들에겐 잠깐의 여유도 아쉬운 모양이었다. 

막연한 두려움과 긴장이 있었다. 내 몸에서 작은 우유 한 팩 정도의 피를 뽑아내게 될 것이라니. 한마디로 지레 겁을 먹어버린 것이다. 그러한 긴장 때문인지 유독 문진표를 작성하는 데에 시간이 오래 걸렸다. 예방 접종을 했었나? 일주일 내에 약을 먹은 적이 없겠지? 헷갈리는 부분도 많았다. 겨우겨우 온라인으로 문진표를 작성한 뒤 버스 한 켠에 앉아 있으려니 손에 땀이 났다. 

두꺼운 바늘 보니... 식은땀이 절로

간호사 한 분이 작은 방으로 나를 이끌었다. 혈압을 재고 안내문을 읽었다. 간호사 선생님이 혈액형 검사를 위해 내 왼손을 쥐었다. 따끔. 작은 바늘이 약지를 찔렀다. 손끝에 맺힌 피와 빨갛게 물들어가는 소독용 솜을 보니 뚜렷한 감각이 일깨워지는 기분이었다.

방에서 나와 물을 한 병 마셨다. 목이 탔는지 물 한 병이 단숨에 넘어갔다. 대기 의자에 앉아 피를 뽑는 친구들을 보니 걱정되는 마음이 들었다. 건강검진을 할 때면 내 혈관이 얇다며 바늘을 두 번은 찔러야 피를 뽑던데, 오늘도 그렇게 되려나?

아니나 다를까. 일이 마냥 쉽게 풀리지만은 않았다. 간호사 선생님은 내 오른팔을 몇 번 두드리고 눌렀다. 고무줄을 더 세게 묶기도 했다. 그러나 허여멀건 피부 위로 핏줄이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간호사 선생님께는 익숙한 일인 것처럼 보였다. 하는 수 없이 왼팔에서 피를 뽑기로 결정되었다. 조금은 부끄러웠다. 언제나 피를 뽑을 때면 운동을 통한 혈관 강화를 다짐하건만. 그게 마음처럼 쉽게 이뤄지지는 않는다.

대기 시간은 단숨에 흘러갔다. 지혈하던 친구는 침대에서 내려왔고, 나는 그 자리에 그대로 몸을 뉘었다. 두꺼운 바늘을 보니 식은땀이 등골을 타고 흘러내리는 기분이었다. 바늘은 살갗을 뚫고 팔꿈치 뼈에 닿지 않을까 싶은 깊이까지 파고들었다. 그러나 두려움에 잠시 머리가 멈춰버린 것인지 겁먹은 만큼의 고통은 없었다.

옆 침상의 친구는 검붉은 혈액 한 팩을 완성한 뒤 손을 치켜든 채 주사 자국 위를 지혈하고 있었다. 나는 여전히 바늘을 꽂은 채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피를 다 뽑은 사람과, 이제 피를 뽑아야 할 사람들이 드문드문 지나갔다.

그런데 시간이 조금 더 지나자, 주먹을 쥐었다 펴기가 어려웠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껴보는 감각이었다. 마냥 손이 아픈 것도, 저린 것도 아니었다. 손바닥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움직임이 둔해지자 헌혈 기계는 아직 부족하다며 쉴 새 없이 울어댔다.

새빨간 피가 두꺼운 관으로 콸콸 쏟아지는데도 울기만 하는 기계가 야속할 따름이었다. 간호사 선생님은 주먹 운동을 하라며 나를 몇 번 재촉했지만 아무리 주먹을 쥐어짜도 기계의 울음은 멈추지 않았다. 결국 간호사 선생님은 소리를 신경 쓰지 말라며 내 혈관의 패배를 선언했다.

주먹 운동을 하기 어려워지자 엄지와 소지로만 손 쿠션을 주무를 수밖에 없었다. 손이 아렸지만 근심이 앞섰다. 무언가가 잘못되어가는 것은 아닐까. 가슴이 갑갑했다.
다행히도 얼마 지나지 않아 헌혈이 끝났다. 바늘을 뽑아낼 때는 안도감 덕분에 통증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 

팔을 들어 올린 채로 지혈을 하고 있자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 그래도 이거 별일 아니구나. 자리에서 일어날 때는 어지럽지도 않았다. 그저 내 몸에서 320mL의 피가 빠져나갔다는 생각에 미묘한 기분이 들었을 뿐이다. 휴게석에 앉아 이온 음료를 단숨에 마신 뒤 문화상품권과 과자 한 봉지를 챙겨 버스를 나섰다. 주차장은 한산했다. 덩치 큰 버스는 처량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혈장자급률 55%... 혈액까지 수입하다니? 

오전 10시경에 헌혈을 마치고 오후 10시 야간 자율학습까지 마친 뒤 귀가할 때까지도 불편한 점은 딱히 없었다. 몸을 씻기 위해 반창고를 뜯어내자 아직 멎지 않은 피가 맺혔다. 다물리지 못한 주사 자국을 보니 왠지 모를 뿌듯함이 느껴졌다.

헌혈이 끝나고 며칠이 지나서야 헌혈에 대해 조금 알아보았다. 기회만 된다면 한 번 더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막연하지만 뿌듯했고, 어쨌거나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리라 생각하니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봉사처럼 느껴졌다. 얼마나 지나야 다시 헌혈할 수 있는지, 헌혈차가 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직접 간다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궁금했다.

그리고 헌혈에 대해서 알아보는 과정에서, 의외의 사실을 알게 되었다. 놀랍게도 2020년 우리나라의 혈장 자급률이 55%에 그쳤다. 혈장 자급률이란 말 그대로 국내의 헌혈을 통해 혈장의 공급이 충족되는 정도를 이야기한다. 부족한 45%의 혈액을 수입하는 데에는 무려 974억 원이 든다.

이건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문제를 깨우친 것이기도 했다. 물론 낮은 혈장 자급률의 요인으로는 과도한 혈액 사용률 또한 포함된다. 그러나 국내의 헌혈 건수가 턱없이 부족한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2020년의 헌혈량은 계획 대비 82.8%에 그쳤다.

헌혈에 관한 관심이 점점 줄어드는 와중에, 코로나바이러스는 외출 활동 자체를 억제하여 헌혈 건수를 급격하게 위축시켰다. 게다가 코로나가 혈액을 통해서도 전파된다는 허위 정보가 퍼지자 헌혈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퍼지기도 했다. 코로나바이러스는 수혈 전파가 이루어지지 않는 호흡기 바이러스다. 

나는 헌혈을 신청하고 피를 뽑을 때도 그러한 심각한 상황을 인지하지 못했다. 곱씹어보면 빈혈이나 복용 약 때문에 헌혈하지 못해 아쉬워했던 친구도 있는 반면, 관심조차 없었던 친구도 있었다. 심각한 혈액 수급 현황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으리라 예상한다.

우리 학급에서는 25명 중 총 17명의 학생이 헌혈을 자원했지만, 적으면 1~2명에 그치는 반도 있었다. 만약 헌혈의 필요성에 대한 교육이 있었더라면 주차장이 한산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무조건 사회를 위해서, 타인에게 공헌한다는 마음으로 헌혈에 참여할 필요는 없다. 영화표나 헌혈 증서를 받기 위해서든, 봉사 시간을 위해서든 결과적으로는 똑같이 피 한 팩을 뽑을 뿐이니까. 그러나 내가 그러했듯이, 처음의 목적이 어떻든 간에 헌혈이라는 행위는 뿌듯함으로 마무리되기 마련이다. 우리가 모두 은연중에 헌혈의 가치를 희미하게라도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디로 가야 피를 뽑을 수 있는지 알아야 했다.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포털에 '헌혈 장소'라고 검색하기만 해도 대한적십자사 혈액 관리본부의 홈페이지가 나왔다. 홈페이지에서는 내 주소를 입력해서 가까운 헌혈의 집을 찾을 수 있었다.

아쉽게도 내가 사는 시에는 헌혈의 집이 없었지만, 바로 옆 도시로만 넘어가도 보였다. 내가 미처 관심을 두지 않았던 때에도 수많은 사람이 저곳에서 피를 뽑았을 것으로 생각하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만 16세가 되었을 때부터 꼬박꼬박 헌혈했더라면 적어도 7번은 더 할 수 있었을 텐데.

피의 성분을 골라내지 않고 전부 뽑는 전혈은 8주에 한 번, 성분 헌혈은 2주에 한 번 할 수 있다고 한다. 과연 8주 뒤에도 헌혈해야겠다는 다짐이 사라지지 않은 채 내 마음 구석에 남아있을까?

덧붙이는 글 | 필자는 고등학교 학생입니다.


태그:#헌혈, #대한적십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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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기심이 많고 글쓰기를 좋아하는 대학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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