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 영화 <쿠바와 카메라맨> 포스터

다큐멘터리 영화 <쿠바와 카메라맨> 포스터 ⓒ Netflix

 
재즈와 시가가 유명한 중남미의 작은 섬나라 쿠바. 한국에서는 꽤 낯선 나라다. 단순히 물리적 거리가 멀어서만은 아닐 것이다. 같은 사회주의 국가로서 북한과 혈맹을 맺은 쿠바는 아직 한국과 수교하지 않은 유일한 아메리카 대륙 국가이기도 하다. 국가 차원의 교류가 드문 이유다.
 
최근 쿠바의 상황이 심상치 않다. 지난 7월 쿠바에서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발생했다. 쿠바 역사상 최대 규모의 시위다. 참가자들은 "배고픔으로 죽어가고 있다"고 소리치며 거리로 나왔다. 정부의 강경한 대응이 잇따랐다. 시민들이 경찰에 끌려가는 모습이 고스란히 생중계됐다. 시위 과정에서 사망한 시민도 나왔다.
 
수십 년째 지속되고 있는 미국의 경제 봉쇄 조치는 쿠바의 경제를 옥죄어 왔다. 미국과 소련의 냉전 시기, 쿠바가 소련의 편에 선 대가다. 최근엔 코로나 19로 인해 상황이 더 악화됐다. 쿠바의 주 수입원인 관광산업이 어려워지고 해외 송금이 막혔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8월에 들어서며 거의 1만 명에 가까운 코로나 확진자가 매일같이 쏟아지고 있다.
 
많은 국가적 문제의 증상이 그렇듯이, 현 쿠바의 상황은 수십 년에 걸쳐 누적되어 온 사회 구조적인 문제가 코로나 19를 계기로 분출된 것이라 보는 게 옳다. 터질 일이 터진 것이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낯선 나라, 쿠바에선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을까. <쿠바와 카메라맨>은 다큐멘터리라는 장르를 십분 활용해 궁금증을 해소해준다. 감독 존 알퍼트는 40여 년에 걸쳐서 세 쿠바 가족의 일대기를 카메라에 담았다. 쿠바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성공시킨 피델 카스트로와의 밀착 인터뷰도 영화의 한 축을 이룬다. 평범한 쿠바 사람들과 피델 카스트로의 모습이 교차로 나오는 영화 구성은 관객이 쿠바를 보다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쿠바의 반세기를 담다
 
 영화 <쿠바와 카메라맨> 스틸. 피델 카스트로

영화 <쿠바와 카메라맨> 스틸. 피델 카스트로 ⓒ Netflix


2016년 피델 카스트로 사망 직후 열린 추도식에서 영화는 시작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참석해 광장을 메웠다. "피델은 가장 위대한 통치자였어요"라고 한 참가자가 말했다.
  
피델 카스트로는 1959년 쿠바에 사회주의 혁명을 일으켰다. 갑작스러운 혁명 발발에 나라를 떠나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새로운 세상에 희망을 건 사람들이 더 많았다. 실제로 꽤 성공적인 변화가 있었다. 쿠바 사람들은 무상 의료·교육·주거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받은 만큼 나라에 기여하겠다는 사람들의 의지도 보였다. 사탕수수를 재배하는 크리스토발은 목장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돌덩이들을 한데 모으며 말했다.
 
"나라 땅에서 돌덩이를 모으고 있어요. 자원해서 하는 거예요. 이런 식으로 혁명을 돕는 거죠. 나라를 위한 거예요."
 
젊은 시절의 피델 카스트로는 사람들의 마음을 휘어잡는 매력이 있었다. 좌중을 이끄는 카리스마와 탁월한 연설 능력이 돋보였다. 강대국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그의 당찬 연설은 오랫동안 외부세력에게 침탈당한 역사를 가진 쿠바인들의 마음을 울렸다.
 
"우리는 투쟁하고 있습니다. 쿠바의 노동자가 미국 부자에게 기댈 일이 없도록 말입니다. 미국이 보는 앞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한 것을 그들은 견딜 수 없을 겁니다."
  
혁명 16년 후인 1975년, 존 알버트가 찾은 쿠바는 분명 달라져 있었다. 무료로 양질의 교육을 받으며 각자의 꿈을 그리는 아이들. 무료로 병원을 이용하는 노인들. 무료로 제공받는 주택. 상점 안에 부족함 없이 쌓여있는 각종 물자들까지. 피델 카스트로가 목표로 한 사회주의 이상이 실현되어 가는 듯했다. 
    
 영화 <쿠바와 카메라맨> 스틸. 존 알퍼트(가운데)와 쿠바 사람들.

영화 <쿠바와 카메라맨> 스틸. 존 알퍼트(가운데)와 쿠바 사람들. ⓒ Netflix

   
그런데 1990대 초, 분위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동독과 서독을 나누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사회주의 국가들의 대들보였던 소련이 붕괴한 것이다. 소련으로부터 막대한 자금의 원조를 받던 쿠바로선 치명적인 일이었다. 여기에 미국의 경제 봉쇄 조치까지 더해졌다.
 
이와 같은 국제 정세의 변화는 쿠바의 풍경을 바꿨다. 도심에는 자재가 조달되지 않아 2년째 완공되지 못한 건물이 있었다. 상점에는 물자가 부족했다. 배급되는 식량이 적다고 호소하는 이들도 있었다. 병원에는 의료 기구가 모자랐다. 약이 떨어지고, 의료진은 소독도 못한 주사기와 장갑을 재사용했다. 도적질도 빈번했다. 농장에 있는 가축들을 몰래 잡아가는 일도 잦았다.
 
쿠바는 경제적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 관광 산업에 몰두했다. 관광 산업은 꽤 성공적이었다. 전 세계에서 여행객이 왔고, 댄서들과 술이 있는 축제가 연일 열렸다. 그런데 관광 산업의 혜택은 쿠바의 모든 사람에게 고루 가지 않았다. 관광 산업과 무관한 사람들은 여전히 가난에 시달렸다.

사회주의 국가 쿠바 거리엔 암시장과 성매매가 성행했다. 경제적 어려움을 이유로 이러한 불법 행위들마저 정부의 암묵적인 동조 아래 허용되었다. 
 
피델 카스트로는 2008년 지도자의 자리를 동생 라울 카스트로에게 넘겼다. 라울 카스트로는 취임 이후 시장경제를 과감하게 도입하는 등 개혁개방의 방향으로 쿠바의 경제 노선을 수정했다. 반 세기 동안 존속했던 피델 카스트로 식의 사회주의 노선은 이로써 끝이 났다.
 
사람에 대한 애정
  
 영화 <쿠바와 카메라맨> 스틸. 쿠바인과 팔씨름을 하는 존 알퍼트.

영화 <쿠바와 카메라맨> 스틸. 쿠바인과 팔씨름을 하는 존 알퍼트. ⓒ Netflix

 
존 알퍼트는 이상이 넘치던 20대부터 머리가 희끗한 60대가 될 때까지 5~6년 주기로 꾸준히 쿠바를 찾았다. 그는 긴 시간 동안 많은 쿠바인과 오랜 관계를 유지했다. 인상적인 건 일관되게 지속된 감독의 태도다. 그는 공산주의니 자본주의니 같은 정치 이념을 내밀지 않았다. 대신 쿠바 사람들이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친구가 되기를 선택했다.

그는 친구로서 이들의 집과 일터를 찾아갔다. 밥은 배불리 먹는지, 집은 안전한지를 물었다. 술을 같이 마시고 팔씨름과 야구를 했다. 덕분에 영화에 나오는 쿠바인들은 익명의 누군가가 아니라 실존하는 사람으로 관객에게 다가온다. 시간에 따라 굴곡을 겪는 세 가족의 이야기와 쿠바를 둘러싼 국내외 상황의 변화를 연결짓는 것은 관객의 몫이다.

존 알퍼트는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동안 촬영해온 사람들의 사진을 하나씩 보며 말한다.
 
"친구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찍는 건 괴로운 일이에요."
 
그럼에도 그는 무려 40년이나 카메라를 들고 쿠바를 찾았다. 자신의 조국인 미국이 정치적 이유로 쿠바를 수십 년간 억압해온 상황이다. 그런데 정작 정치와는 무관한 평범한 쿠바인들이 괴로워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이를 알려야 한다는 저널리스트로서의 책임감이 촬영을 지속하게 만든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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