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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을 뭐라고 번역하시나요? 우린 '성평등주의'로 읽습니다. 성별로 인한 차별을 없애자는 얘기죠(오바마도 페미니스트라네요!). 페미니즘이 오해받는 한국, 그 안에서 페미니스트로 사는 두 여성의 이야기. 2주마다 한번씩 편지를 주고받으며, 연대와 성장을 꾀해봅니다.[기자말]
피곤한 당신에게, 성애가 드립니다

(* 아래 오디오 버튼을 누르시면 편지를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편지낭독 서비스는 오마이뉴스 페이지에서만 가능합니다.)

당신 곁의 페미니즘 · 여덟번째 편지: 피곤한 당신께

편지가 늦어져서 죄송해요. 머릿속 떠다니는 말들이 잘 정리되지 않아 답장을 쓰기가 쉽지 않았네요. 정신적으로, 신체적으로도 지쳐 있어서 편지를 쓸 엄두가 잘 나질 않았어요. 모성쓰기 문제로 시작된 불길이 시가에 번지고 그게 제 생활 전반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치면서, 우울하다고 느끼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불행하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습니다. 내가 무슨 여성인권을 위해 싸우는 투사도 아닌데 이런 일을 겪어야 하나 싶었고, 불행하다고 느끼다 보니 쉽게 짜증이 났어요. 부정적 감정에 갇히니 마음이 팍팍해지더라고요. 무장세력 탈레반이 점령한 아프가니스탄 사진들을 보면서, 난민을 다룬 기사들을 보며 눈살 찌푸리는 저를 발견했습니다. 

'당장 나 살기도 힘든데, 저 사람들까지 신경 써야 해?'

네, 부끄럽지만 그런 생각을 했었어요. 제 우울과 불행은 손 닿을 듯 가깝고, 전쟁과 인권 같은 단어는 멀게만 느껴졌거든요. 어쩌면 많은 이가 비슷할지 모릅니다.  
 
아프가니스탄 현지 조력자와 가족들이8월 26일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해 코로나19 검사 순서를 기다리는 모습.
 아프가니스탄 현지 조력자와 가족들이8월 26일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해 코로나19 검사 순서를 기다리는 모습.
ⓒ 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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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고 낯선 그 이름, 난민... 하지만 

아프간 난민을 받느냐 마느냐는 이미 전세계 화두가 됐습니다. 한국도 뜨겁게 논쟁 중인데, 무엇보다 아직은 '난민'이란 말 자체가 우리에게 낯선 것 같습니다. 한국 정부가 아프간 조력자와 그 가족들을 데려오면서 굳이 '특별기여자'라고 부른 것도 그런 이유겠지요.

그런데 유엔난민기구(UNHCR)에 따르면, 한국 또한 6.25 전쟁 때 많은 이가 난민이었다고 해요. 홍범도 장군 등 많은 독립운동가들도 낯선 땅에서 불안정하게 하루하루를 보냈을 테고요. 일제강점기 땐 모두가 일본인이 되길 강요받았습니다. 난민이 딴 세상 일인 것 같지만, 우리도 한때는 나라 잃은 난민이었던 셈이죠.

혜미씨, 어떤 난민 집단이든 통상 50%는 여성과 아동이라는 걸 알고 계셨나요? 유엔난민기구 설명인데, 저는 처음 알았거든요. 390명을 구출해낸 이번 작전 '미라클'도 그랬습니다. 8월 27일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한 조력자 자녀들 중 대부분이 영유아였고, 덕분에 현장에 있던 이들은 우렁찬 신생아 울음소리를 들었다고 해요(관련 기사: "응애 응애!" 인천공항 온 아프간 아기, 목청 높여 울었다).

자연스레 아프간 여성들이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졌는데, 마음 아프더라고요. 단지 한국 아닌 아프간에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여성의 취업·교육을 옥죄는 탈레반 치하라는 이유로 그곳 여성들은 전신을 천으로 가려야만 하고 외출도 마음대로 하지 못한답니다. 운동이나 운전 같은 어쩌면 '당연한' 일상을 위해 여성들이 남장을 하고 남자로 살아간다는 KBS 다큐멘터리 <세계는 지금 : 아프간의 딸들 남자로 살아가는 이유>를 유튜브에서 보고선 참 안타까웠어요. 
 
아프간 최초의 여성 시장인 자리파 가파리(왼쪽)가 8월 30일 "아프간 여성으로서, 독일 외교부 장관과 아프간 상황 및 여성 인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며 본인 트위터에 올린 사진. 그는 "탈레반이 여성들을 존중하도록 압박해줄 것을 요청했다"고 덧붙였다. (사진 출처 트위터 @twitter.com/Zarifa_Ghafari)
 아프간 최초의 여성 시장인 자리파 가파리(왼쪽)가 8월 30일 "아프간 여성으로서, 독일 외교부 장관과 아프간 상황 및 여성 인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며 본인 트위터에 올린 사진. 그는 "탈레반이 여성들을 존중하도록 압박해줄 것을 요청했다"고 덧붙였다. (사진 출처 트위터 @twitter.com/Zarifa_Ghafari)
ⓒ 자리파 가파리 트위터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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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파 가파리', 아프간 역사상 최초의 여성 시장이자 이미 세 번의 암살 시도를 견뎌냈다는 그의 이름도 이번에 알게 됐습니다. 최근 탈레반의 수도 점령 뒤 "탈레반이 나를 죽이러 올 것"이라며 가족들과 죽음을 기다리던 그는 결국 아프간을 탈출해 독일로 갔다고 해요. 그는 도착 직후 기자와 만나 말합니다. "독일 내의 난민·이주민 논란을 안다. 하지만 나는 이민을 온 게 아니다. 일은커녕, 말 한마디 못하는 아프간 여성들 목소리를 내려 여기에 왔다"고요.

들리지 않는 이야기, 보이지 않는 사람들

도움받던 한국이 도움을 주게 된 건 기쁘지만, 어쩌면 이젠 피할 수 없는 논의이자 미래일 거란 생각도 듭니다. 난민과 이주민 등에 대한 사회적 논의요.

실제 경기도 안산, 충남 지역 등 외국인노동자가 많은 곳 초등학교에선 10대 1 정도로 이미 그 자녀들, 다문화 아이들 숫자가 한국인 수를 앞지른다고 해요. 교실에선 한국말보다 러시아어 등 외국말이 더 많이 들린다고 하고요. 사는 지역과 동선이 겹치지 않아 그 존재가 잘 감지되지 않을 뿐, 이들과 더불어 조화롭게 살아야 하는 건 우리 앞에 당도한 현실인 듯합니다.

<보이지 않는 여자들>을 알려준 혜미씨에게 동화책 <보이지 않는 이야기>(글 이섶, 봄나무 출판사)도 소개하고 싶습니다. 기자인 저자는 실제 자신이 만났던 이들의 삶을 동화형식으로 풀어내요. 정세랑의 책 <피프티피플>처럼 여기 나오는 사람들은 모두 어디선가는 서로 연결돼 있습니다.

제 마음을 가장 울린 건 콩고 출신 이주노동자 자녀로 한국서 태어난 아이 심바의 얘기였어요. 열두살인데 초등학교 3학년, 뜀박질을 좋아하고 잘하는 심바는 어느날 갑자기 아버지의 부고를 듣습니다.

"아빠가 붙잡힌 건 건물 아래에서였다. 출입국 사람이 옷깃을 막 잡아채려 할 때 아빠는 옥상에서 뛰어내렸다. 뛰어내린 건물은 오층짜리, 오층 아래에서 아빠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날은 아빠의 월급날이었다. 그날 저녁 아빠는 술을 마시지도 내 이름을 부르지도 않았다. 이틀 뒤 화장터 사진 속에서, 아빠는 웃는 것 같기도 했고 우는 것 같기도 했다."

난민을 비롯해 성 소수자·무슬림 등 우리 사회 비주류에 대한 비난과 혐오는 당분간 계속될 것입니다. 일부 정치인들은 그 두려움을 자극해 표를 얻어내려 할 것이고요. 타인에 대한 무지와 공포, 내 것을 빼앗기는 게 아닌가 하는 근거 없는 조바심은 무엇으로 잠재울 수 있을까요. 알려는 노력, 들리지 않는 얘기를 들어보려는 작은 시도에서부터 변화는 시작되지 않을까요.
 
압둘와합이 지난 2015년 9월 요르단에 있는 자타리 난민캠프(Zaatari refugee camp)에서 아이들과 찍은 사진. 이곳은 시리아 난민들이 시리아 내전을 피해 오는 곳이라고 합니다. (인스타그램 @wahabaga)
 압둘와합이 지난 2015년 9월 요르단에 있는 자타리 난민캠프(Zaatari refugee camp)에서 아이들과 찍은 사진. 이곳은 시리아 난민들이 시리아 내전을 피해 오는 곳이라고 합니다. (인스타그램 @wahabaga)
ⓒ 압둘와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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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친구이자 가족이 난민 신분인, 동국대 대학원생 '압둘와합'을 당신께도 소개하고 싶어요(그는 시리아 난민을 돕는 단체 '헬프시리아'를 설립해 운영 중이고 지난해 한국 국적을 취득했어요).

난민과 가까운 친구가 주변에 한 명 있고 없고는, 난민에 대한 우리 인식에 큰 변화를 가져다줄 것이라 믿습니다. 우선 "친구여, 이게 당신의 새로운 삶입니다. 비참한 천막에서도 사랑은 터질 것입니다"라며 며칠 전 그가 쓴 '시리아 난민이 아프간 난민에게 보내는 메시지'(링크)를 읽어보시길 권해요.

불확실한 삶과 답답한 일상, 넘쳐나는 혐오 속 우리의 몸과 마음이 건강하길 빕니다.

▲ 당신에게 추천합니다: 책 <보이지 않는 이야기>. "라만 형, 나 방글라데시 우리 집에 가고 싶어. 오늘은 공장에서 한국 사람한테 맞았어. 학교선 나보고 하병우라지만 나 하병우 될 생각 없어. 내 이름은 하비브야, 하.비.브!" 타인의 삶이 궁금한 당신에게 추천합니다.

2021년 8월 31일
아기고양이 쨔삐의 온기와 함께, 성애 드림

* 혜미와 성애가 2주에 한 번씩 주고받으며, 격주 금요일에 게재될 예정입니다.
* 긍정적인 피드백과 공유는 큰 힘이 됩니다. 편지를 즐겁게 읽으셨다면, 여기(링크)를 눌러 응원을 남겨주세요. 

덧붙이는 글 | <김혜미>
연재는 처음이라. 마포에 살고, 녹색 정치를 하며, 사회 정책에 관심있게 움직이는 사람. 셰어하우스에 살며 분리수거를 잘 하고싶은 페미니스트. 삶과 이상을 잇고-짓고 싶은 사람. 날기싫은 비행기와 춤추고 싶은 멋쟁이 토마토를 간신히 연주할 수 있는 우쿨렐레 초보. 토마토 음식으로 해장하는 사람.

<유성애>
아픈 몸을 사는 사람, 편집노동자. 스스로 장애인-비장애인 경계에 있다고 생각한다. 20대 초반 한 팔 두 다리가 부러졌던 경험이, 의도치 않게 여자로 태어나 살며 겪었던 일들이 지금의 나를 만든 것 같다. 소외된 사람들 목소리에 마음이 더 기운다. 성평등한 국회, 성평등한 오늘을 꿈꾸는 페미니스트.


태그:#당신곁의페미니즘, #아프가니스탄, #난민, #이주민, #혐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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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플러스 에디터. 여성·정치·언론·장애 분야, 목소리 작은 이들에 마음이 기웁니다. 성실히 묻고, 세심히 듣고, 정확히 쓰겠습니다. Mainly interested in stories of women, politics, media, and people with small voice. Let's find ho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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