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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농·귀촌 1번지 지리산권(구례, 남원, 하동, 함양, 산청)에 사는 청년들은 독특하다. 퀴어, 페미니즘, 동물권, 비혼·비출산, 탈성장 등 진보적 의제들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풀어내고 작지만 놀라운 실험을 벌인다. 그들은 왜 지리산 시골을 무대로 택했을까. 이전 귀농·귀촌 세대와 무엇이 다를까. 남원시 산내면 등을 중심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본다.[편집자말]
보석(왼쪽)과 상글(오른쪽)은 찌찌순례에 이어 국내 최초 시골 퀴어축제 '성다양성 축제'를 기획했다. 도시뿐 아니라 농촌에도 그들의 존재가 있다는 걸 표현하기 위해 내린 결정이었다. ⓒ 김혜리
     
[이전기사] 시골에서 찌찌순례, 퀴어축제... 주민들이 고맙대요 http://omn.kr/1wa0u)
 
찌찌순례가 몸이 주제였다면, 이번에는 '성'을 주제로 이야기를 펼치고 싶었다. 보석과 상글이 대안대학에서 숙소 생활을 할 때부터 품었던 고민이다. 남녀는 단 둘이 한 공간에 들어가는 자체가 금지였다. 반면 남-남, 여-여는 한 방을 같이 쓸 수 있었다. 공동체 어른들은 동성 연인이 있을 거라고 의심하지 않는 눈치였다.
 
남-남과 여-여도 사랑할 수 있다고, 세상에는 다채로운 성과 사랑이 존재한다고, 도시뿐만이 아니라 농촌에도 그들의 존재가 있다고 어떻게 말해야 할까. 친구들과 머리를 맞대고 수다를 떨다가 나온 것이 '산내 성다양성 축제'다.
 
"시골에 살면서 주변 어른들에게 '남편은 있어?'라는 질문을 자주 받아요. 여성 친구나 커플이 길을 걸으면 '둘이서 언제까지 살래? 빨리 시집가야지'라고 해요. 지역 안에서 더 다양한 생각을 못해봤기 때문에 그런 말이 오고간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도시의 퀴어 페스티벌에 참여하는 걸 넘어 여기, 농촌에서 축제를 열어야겠다고 생각한 배경이에요.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건 음란한 게 아닌 자연스러운 거고, 이미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이라고 편하게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상글)
 
"맞아요. 최대한 많은 분들이 왔으면 했어요. 아이들도 왔으면 좋겠고, 또 농촌엔 노인 계층이 많잖아요. 어르신들도 오면 좋겠는데 영어로 '퀴어 퍼레이드'라고 쓰여 있으면 잘 모르세요. 무엇보다 '뭐하는 축제인지 알고 오셨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어요. 알아듣기 쉬운 언어가 있지 않을까 논의하다가 '성 다양성' 축제로 가게 됐죠." (보석)
 
"여러분 아니었으면 이런 재밌는 경험을 해보겠어요?"
 
지난해 11월 열린 1회 산내 성다양성 축제는 공연부터 부스·전시, 토크쇼, 퍼레이드까지 큰 호응을 얻으며 성공적으로 막을 내렸다. 뜻한 대로 남녀노소 60여 명이 모여들었다. 초등학생 아이와 함께 온 가족도 있었다(관련기사 : 지리산 산골의 퀴어축제, 이토록 촌스러운 힙함이라니 http://omn.kr/1tsg2).
 
중·고등학생 자녀를 둔 주민들은 주최한 청년들에게 '여러분이 아니면 우리 애가 시골에 살면서 어떻게 이런 재밌는 경험을 해보겠냐'며 반겼고,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말하라며 환대해줬다. 많은 또래 청년들 역시 '덕분에 산내에 사는 게 행복하다'고 말해줬다.
 
새해가 되자 "이번엔 언제 해?"라고 주변에서 물어왔다. 보석과 상글 역시 즐거웠던 경험을 동력 삼아 지난 8월 2회 성 다양성 축제를 개최했다. 테마는 그들의 새로운 고민을 담은 '종평등'이었다. 우리 주변의 자연, 함께 살아가는 비인간 동물과 곤충 등 소외된 존재와의 연대를 이야기하고 싶었다.
 
첫 축제 소식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2회 때는 전국적인 관심을 받았다. 타 지역을 포함해 100여 명이 온·오프라인으로 참가 신청을 했다. 기획과 준비에 새로 합류한 청년들도 늘었다. "이슈에 공감하는 동네 모든 친구들이 축제를 같이 만들었다 해도 무방"할 정도다. 지리산작은변화지원센터 지원사업으로도 선정돼 금전적 지원을 받았다.
 
제2회 산내 성다양성 축제를 기획한 상글과 친구들 ⓒ 임송학
 
2021년 8월 제2회 산내 성다양성 축제 현장 ⓒ 이원걸

그런데 코로나19 재유행으로 어쩔 수 없이 마을 주민만을 초대해 숲에서 열었다. 초록이 무성한 나무들 사이에 프라이드 플래그를 걸어놓고 축제를 만끽했지만, 몇몇 참가자는 아쉬워했다. 도시의 페스티벌처럼 '젠더'를 주제로 선명하고 역동적인 퍼레이드를 펼치기보다는, 평화롭고 안전한 분위기 속에서 다양한 존재들의 평등을 이야기하는 것이 '퀴어축제답지 않다'는 지적이었다.
 
"저희가 2회 축제를 준비하며 염려한 지점이기도 했어요. 정체성이 뭘까 하는...? 그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우리 식대로 풀면서 재밌게 놀자는 마음이 컸는데 그런 반응을 마주하니 주눅이 든다고 해야 할까요. 우리가 뭘 놓친 건가, 잘못한 건가 싶었어요." (보석)
 
"전국퀴어연합 대표를 만나서 내년에도 산내에서 축제를 또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고민을 털어놓은 적이 있어요. 그분께서 해주신 말씀이, 이 축제만의 색깔을 만들어가는 걸 너무 칭찬하고 응원해주고 싶다는 거였어요. 서울, 인천, 광주 등 대도시 퀴어축제 모양이 하나로 지정되어버린 게 안타깝다고 생각했는데, 농촌 퀴어축제가 다양한 모습으로 가고 있어서 좋다고요. 그제야 '우리가 잘못한 게 아니네', '다양한 모습의 퀴어축제를 만들어내고 있는 거네' 하고 생각하게 됐어요." (상글)
 
"버티고 살아줘서 고맙다"는 말

어찌 보면 마을에서 시끌벅적 판을 벌이며 소용돌이를 일으키는 그들이 주민 입장에선 반갑지 않을 수도 있을 터. 그렇지만 대부분 동네 어른들은 보석과 상글을 탓하지 않는다. 오히려 만날 때마다 반겨주며 고맙다는 말을 안부 인사처럼 건넨다. "버티고 살아줘서 고맙다"고.
 
쌀이나 들기름을 나눠주는 건 기본이다. "그런 건 왜 해? 궁금해서 그래~ 우린 잘 모르잖아. 호호호" 하며 청년들의 목소리를 이해하려 노력하는 주민들도 많다. 식당, 호프집 사장님은 비건 지향인 친구들을 위해 메뉴를 개발하고 국을 따로 끓여주시며 식기도 다회용품으로 바꿔주신다. 마을에 하나뿐인 편의점에도 비건을 위한 선택지가 다채롭다.
 
이처럼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도록 공감해주고 그들의 활동을 지지해주는 또래 친구와 어른들을 만날 때, 보석과 상글은 지리산 산골에서 좀 더 오래 살고 싶다는 마음을 키운다.
 
보석의 2022년 계획은 하고 있는 일을 줄여 남은 활동들을 집중해서 해내는 것, 그리고 농사에 시간을 더 많이 할애해 먹거리 자급률을 높이는 것이다. 상글은 텃밭교사 일을 확장해 어린이들과 직접 키워서 먹는 일의 감각과 재미를 나누고자 한다. 내년에도 두 사람은 지리산에서 살아갈 예정이다.
  
"자연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이곳에서의 삶을 추천하고 싶어요. 산내는 지리산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면서 귀농·귀촌을 시도해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거든요. 비건을 실천하고 싶은 사람들에게도 잘 맞을 것 같아요. 시골에 가면 식당이 적어 채식할 수 있는 기회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 있는데, 음료 옵션 등 선택지가 많아 살기 좋습니다(웃음)." (상글)
 
"저는 카페나 식당보다는 '관심 있는 이슈에 같이 목소리 낼 사람이 없으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이 컸어요. 실제로 산내에 온 지 한 달쯤 됐을 때 'N번방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이 터졌는데, '나는 여기서 뭐하고 있지'라는 생각에 무기력해졌어요.

그러던 중 삼거리를 지나는데 관련해서 1인시위하는 분들을 봤어요. '이 마을 뭐지?' 했죠(웃음). 알아보니 '성폭력 근절을 위한 지리산 여성회의'라는 마을 자치기구가 있더라고요. 비거니즘이나 지역 페미니즘 운동 등 문화적 인프라를 원하는 분들이 오면 좋을 것 같습니다." (보석)

 
보석과 상글은 비거니즘을 실천하는 청년들을 위해 변화하는 마을에 대해 고마움을 전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지리산 산골에 좀 더 오래 살고 싶다는 마음을 표현했다. ⓒ 김혜리
 
태그:#지리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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