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우리가 알고 있는 우정사업본부 상징(Symbol)은 '제비'다. 흥부전에서처럼 먼 강남에서 삼월삼짇날이면 봄 '소식'을 전해주러 다시 찾아오는 반가운 존재였기에 그리 삼았으리라 여긴다. 제비를 왜 붉은색으로 표현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지만.
 
제비를 모체로 한 우편상징은 여러 차례 변화해 왔고, 2010년 부터 이 문양을 상징으로 사용 중임.
▲ 우정사업본부 상징 제비를 모체로 한 우편상징은 여러 차례 변화해 왔고, 2010년 부터 이 문양을 상징으로 사용 중임.
ⓒ 이영천

관련사진보기

 
그럼 '최초 우표'를 사용한 편지는 언제 누가 무슨 목적으로 보냈을까? 불행하게도 추정만 할 뿐 실체를 확인할 수 있는 실물은 아직 확인되지 못하고 있다. 우표 수집가들 사이에선 이를 엔타이어(Entire, 소인이 찍힌 우표와 봉투 일체)라 부르며, 고액으로 거래하는 모양이다.

이렇듯 소식은 그 자체로 유용한 정보다. 정보는 문화와 문물이 될 수도 있으며, 빠르게 변화하는 국내·외 정세일 수도 있다. 따라서 남보다 빠른 정보 취득과 가공 및 활용이, 한 집단은 물론 국력을 가늠하는 척도인 것은 아주 오랜 일이다. 하지만 1870년대까지 우리 통신체계는 조금은 굼뜬 우역(郵驛)과 파발(擺撥), 봉화와 그리고 사람 발걸음에 기대고 있었다.

우정사업의 선구자 홍영식(洪英植)

북학파 맥을 이으며, 1860년대 초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서구 개화사상은 1874년 무렵 하나의 당파를 형성한다. 1884년 삼일 천하로 끝난 '갑신정변'을 일으킨 젊은 관료들이 그 주역이다. 이 중 특히 우정(郵政)사업에 힘을 쏟은 이가 홍영식이다.

그는 조사시찰단(朝士視察團) 일원으로 1881년 5월 일본에 간다. 이때는 중국인 황준헌(黃遵憲)의 조선책략(朝鮮策略)에 대한 반발로 영남만인소(嶺南萬人疏)가 일어나 수구 바람이 거셀 즈음이다. 홍영식 임무는 육군성 시찰이다. 하지만 그는 우정사업에도 지대한 관심을 보여 일본 우편체계를 깊이 살폈다는 일본 측 기록이 남아있다.

이런 공적이었는지, 1882년 설립되어 도로·전신·우편·수로(水路)를 관장하는 우정사(郵程司) 협판(協辦)에 임명된다. 이 무렵 그의 업무는 크게 둘이다. 하나는 '한미통상조약' 협상이고, 다른 하나는 나가사키와 부산 간 전신선을 가설하는 '부산구설해저전선조관(釜山口設海底電線條款)' 협상이다.

뒤 업무는 부산에 거주하는 일본인을 위한다는 명분에도 불구하고 불평등 조약이었고, 우리 전신사업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었다. 이 조약으로 해저전신선이 가설되고, 1884년 2월 부산에 일본 전신국이 문을 열어 업무를 개시한다.
 
서울 중앙우체국 앞에 서 있는 우정사업의 선구자 홍영식 동상.
▲ 홍영식 동상 서울 중앙우체국 앞에 서 있는 우정사업의 선구자 홍영식 동상.
ⓒ 이영천

관련사진보기


미국과 수교 후, 1883년 홍영식은 '보빙사절단' 일원으로 미국에 간다. 그는 미국의 우편·통신에서 엄청난 충격을 받는다. 기술을 넘어 잘 정비된 제도와 체계(System)에 대한 충격이다. 귀국 후 고종에게 신식 우편체계 도입을 건의한다. 잠시 함경도 병마절도사(北兵使)였다가, 1884년 4월 22일(우리가 기념하는 정보통신의 날) 신설된 우정총국 총판(總辦)에 임명되기에 이른다.

삼일천하와 문위우표

우정총국은 왕실 약재를 담당하던 전의감(典醫監) 터에 자리 잡는다. 5월에 일본인 실무자 2명을 고용하고, 우정수취소(郵征受取所)·우초매하소(郵鈔賣下所, 우표판매기구) 및 각 지방에 설치할 분국(실제 인천분국 설치)을 계획한다.
 
갑신정변으로 서울~인천 간 20여 일 우정사업을 끝으로 폐쇄되는 운명에 처한 우정총국.
▲ 우정총국 갑신정변으로 서울~인천 간 20여 일 우정사업을 끝으로 폐쇄되는 운명에 처한 우정총국.
ⓒ 이영천

관련사진보기

 
법체계를 세우는 한편, 우편에 필수인 '우표' 발행을 준비한다. 태극 문양 도안의 5종(5문, 10문, 25문, 50문, 100문) '문위우표'로 우정총국 개국 일정에 맞춰 발행할 예정이다. 인쇄술이 미치지 못해 일본 대장성 인쇄국에 발주한다. 총비용 760원으로 5문, 25문, 50문은 각 50만 매, 10문이 100만 매, 100문이 30만 매였다.
 
우정총국 개국과 함께 사용된 5문, 10문 우표(좌측부터)와 인쇄가 늦어 미 발행된 3종 문위우표.
▲ 문위우표 우정총국 개국과 함께 사용된 5문, 10문 우표(좌측부터)와 인쇄가 늦어 미 발행된 3종 문위우표.
ⓒ 이영천(우표박물관)

관련사진보기

 
이 중 5문과 10문 우표가 우정총국 개국 일자인 11월 18일 도착했으나, 나머지는 인쇄가 늦어져 발행되지 못하고 있었다. 업무를 개시한 우정총국은 한양과 인천 간 우편 업무만 우선 취급하였다.

우정총국 개국 17일만인 12월 4일 저녁, 우정총국 낙성식을 기화로 김옥균·박영효·서재필·서광범·홍영식 등 개화당이 무력 정변을 일으킨다. 청나라에 의존하는 수구당 민씨 외척 집단을 몰아내고 개화 정권을 수립할 목적이다. 정변은 3일 만에 끝이 난다. 과정에서 홍영식은 죽고, 나머지는 일본으로 도망친다.

그 바람에 우정총국은 20여 일 영업을 끝으로 문을 닫아야만 했다. 갑신정변 와중에 5문과 10문 우표 상당량이 유실된다. 일본 대장성은 1895년 3월 나머지 3종 우표를 조선 정부에 납품하면서, 우표 발행대금 지급을 독촉한다.

1896년 1월 정부는 남은 우표를 인천에서 독일인 마이어(E. Meyer)가 운영하는 세창양행에 전량을 매각한다. 760원이라는 당시로선 거금을 매각대금에 비용을 보태 대금을 지급한다.

20일 동안 서울∼인천 간 우정총국을 이용한 편지는 얼마나 될까? 우리 관청이 이용한 우편은 갑신정변 과정에서 사라졌을 개연성이 높다. 그리고 외국인 상점이나 기업, 외교관들이 주로 이용한 것으로 추정한다. 따라서 문위우표 엔타이어도 이들 후손이 보관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전신선으로 정보 네트워크 구축

일본군 장교를 죽이고 의연히 붙잡혀 사형당할 위기에 처한 백범 선생을, 고종의 긴급전화 한 통이 살려냈다는 일화는 유명한 이야기가 되어 있다. 백범일지에 기록된 이야기는 진위를 떠나, 신속한 정보전달의 중요성을 변증하고 있다. 전화기는 한참 후에나 사용되기 시작했으나, 이때 이용된 전신선이 1885년 8월 완공된 서로전선(西路電線) 중 서울∼인천 구간이다.

임오군란을 전후하여 청나라는 조선 전신선 권리를 집요하게 파고든다. 조선을 영구 속국으로 다스리는데 전신선 가설을 가장 시급한 처리 과제로 여긴다. 이홍장은 갑신정변 후인 1885년 6월 '의주전선합동(義主電線合同)'이라는 불평등 조약 체결을 강요한다.
 
세종문화회관 뒤 마당 자리 길가 한성전보총국 터 표석.
▲ 한성전보총국 터 세종문화회관 뒤 마당 자리 길가 한성전보총국 터 표석.
ⓒ 이영천

관련사진보기

 
조약은 "중국전보국(華電局) 승인 없이 조선 내 어떤 육로전신선도 가설할 수 없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조약에 따라 서울∼인천 구간이 8월 19일 완료되고, 다음날 '한성전보총국(漢城電報摠局)'이 업무를 시작한다. 서울∼의주 구간은 1886년 5월에 완료된다.

이에 놀란 일본이 서울∼부산 간 전신선을 요구한다. 조선은 여러 이유로 이를 거절한다. 앞서 맺은 조약을 근거로, 청나라가 남로(南路)전선까지 가설하겠다 나선다. 하지만 청나라도 덴마크 기술자 미륜사(彌綸斯, H.J. Mühlensteth)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처지로, 그가 병들어 있던 시간이 지난 후인 1886년 10월 서울∼충주∼대구∼부산 간 측량이 완료된다.

조선은 이를 탐탁하지 않게 여겨, 청과의 마찰을 감수하며 직접 발 벗고 나선다. 전선과 전신기는 세창양행을 통해 현물차관으로 들이고, 영국인 핼리팩스(Hallifax)를 감로(勘路)위원으로 임명해 측량에 나선다.
 
조선전보총국이 있었던 사역원 터 표석. 역시 세종문화회관 뒤 마당에 있음.
▲ 사역원 터. 조선전보총국이 있었던 사역원 터 표석. 역시 세종문화회관 뒤 마당에 있음.
ⓒ 이영천

관련사진보기

 
선로는 서울∼천안∼공주∼전주∼거창∼대구∼부산으로 삼남 주요 도시를 잇고 있다. 1888년 5월 선로가 완공되고, 아울러 6월 1일 '조선전보총국(朝鮮電報摠局)'을 개국시킨다. 명실상부 자주적 정보통신 기구가 생겨난 것이다. 이런 결실에 홍철주(洪澈周) 노력이 있었음은 잘 알려져 있지 못하다.

조선전보총국은 나아가 북로(北路)전선 가설에도 나선다. 이는 서울∼블라디보스톡 간을 전신선으로 연결해 상대적으로 요금이 비싼 해저전신선 수요를 끌어들이는 한편, 유럽과의 직접 연결을 도모하려는 의도다. 자금과 기술 부족은 물론 화전국(중국전보국) 방해가 극심하다.

이 갈등을 청나라와 1891년 2월 '원선합동(元線合同)'조약을 맺어 타결한다. 여러 악조건을 무릅쓰고, 1891년 6월 서울∼춘천∼안변∼원산에 이르는 선로가 가설된다. 당초 계획했던 원산∼함흥∼블라디보스톡 구간은 끝내 건설되지 못한다.
 
구한말에 사용된 전보 실물 사진.
▲ 조선전보국 전보 구한말에 사용된 전보 실물 사진.
ⓒ 서울역사박물관

관련사진보기

 
정보의 신속한 취득과 가공 및 활용을 위한 기본 인프라가 이로써 구축된 셈이다. 서울을 기점으로 서-인천, 남-공주·전주·대구·부산이 서북-평양·의주, 동북-원산을 잇는 전신선을 깔아 정보통신 네트워크 시대를 연 것이다. 하지만 전신선은 청일전쟁 당시 일본에 강점당해 그들 군사용으로 전용된다. 이는 나아가 동학혁명을 패퇴시키는 효과적 도구로 사용되기도 한다. 전신선은 곳곳이 파괴된 채 이듬해 조선에 반환된다.

역적들이 일으킨 정변이라 취급받아야 했던 갑신정변으로 인해, 우정(郵政)사업은 캄캄한 암흑기를 보내고 있었다. 이는 분명 정보통신의 균형이 깨진 왜곡된 상태로, 이를 이용하는 계층이나 대상이 무척 협소할 수밖에 없는 한계에 스스로를 가두고 있는 모양새였다.

-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 

태그:#홍영식_홍철주, #우정총국, #서로전선_남로전선_북로전선, #한성전보총국, #조선전보총국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새삼스레 타인과 소통하는 일이 어렵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그래도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소통하는 그런 일들을 찾아 같이 나누고 싶습니다. 보다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서로 교감하면서,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풍성해지는 삶을 같이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