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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글에서는 우리나라 국가교육과정과 교과서 국검정 및 인정제도의 역사와 그 양상에 대해 점검해보았다. 본래 교육과정은 궤도를 의미한다고 한다. 마차를 타고 다니던 시절, 마차 바퀴가 지나간 자리에 난 자국을 따라 마차들이 달리게 되어 굳어진 궤도를 의미하는 라틴어에서 온 말로, 말이 달라는 코스라는 의미를 가진다고 한다.

특히, 우리나라와 같이 학생들이 달려야하는 궤도를 국가에서 중앙집권적으로 결정하는 경우에 그 궤도의 경직성은 가장 강하게 나타날 것이다. 우리는 국가교육과정 뿐만 아니라, 국가가 만드는 국정교과서, 국가가 제시한 지침을 충실하게 따라서 만들어지는 검정교과서 제도까지 운영하고 있고, 초중고교 교육이 마감되는 시점에 국가교육과정과 교과서에서 제시한 교육내용과 성취기준을 기반으로 출제되는 대학수학능력시험까지 갖추고 있어 가장 경직적인 궤도달리기 교육이 되고 만다.

아무리 국가교육과정에 다양한 궤도를 내고, 일정 구간에서는 다양한 갈래를 허용한다고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궤도를 달리도록 만들어진 차라는 점은 달라지지 않는다. 4차산업혁명 시대, 선진국의 일원으로서 경쟁국들보다 앞서 가고자 하는 추월의 시대를 구가하고 싶은 대한민국의 교육에서 여전히 궤도를 따라 달리는 교육은 우리사회 발전과 성장에 커다란 장애요인이 아닐 수 없다.

궤도차를 아무리 다듬고 개선해도, 자율주행 자동차가 되지 못한다. 없는 길을 만들어가면서 스스로 판단하고 새롭게 도전해야 하는 우리 청소년 세대를 위한 자율주행 교육과정과 교과서 제도, 평가 제도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는 이유이다.

우리사회에서 교과서가 어떤 의미일까를 생각해보기 위해 지난 정부에서 있었던 역사교과서 국정화 정책을 검토해보자. 결국 국민과 학생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막대한 예산을 들여 국정 역사교과서를 개발하고, 수십억을 들여 홍보를 했지만, 한 번도 사용하지 못하고 그대로 폐기처분되고 말았다. 당시 국정 역사교과서에 반대하는 가장 핵심적인 이유는 특정 정부가 역사 해석을 독점하고 특정 해석만을 정통으로 주장하려는 독재적 발상이라는 점이었다.

그렇다면, 그게 역사교과서에만 적용되는 주장일까? 정치교과서, 사회교과서, 심지어 과학교과서에도 수많은 논란은 사라지고 오로지 하나의 주장이나 이론만이 올바른 것으로 지정되어 가르쳐지고 있다면, 그런 교과서는 반-교육적이다. 바로 한국의 교과서가 그렇다. 교과서는 수많은 논란을 제거하고 오로지 하나의 정답만을 제시해야한다. 그리고, 교과서는 곧바로 수능문제의 정답을 결정하는 기준이 된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역사교과서 국정화가 지닌 문제를 모든 국검정, 인정 교과서가 지니고 있다.

국가교육과정과 교과서 국검정제도의 세가지 폐해

첫번째, 교사와 학생의 사고와 활동을 일정 궤도에 가둔다. 우리는 전국의 거의 모든 학교가 동일한 내용을 비슷한 속도로 가르치고 있다. 지난 십수년간 검정교과서, 인정교과서가 늘어나고 있어 교과서를 제작하는 출판사별로 약간의 다양성이 있다고 하나, 기본적으로 국가교육과정이 제시하는 내용 체계와 성취기준, 평가 방법 등을 따라 제작된 교과서이다 보니, 각종 교과서의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이런 교과서 체제의 가장 큰 문제점은 교사의 전문적 창의성과 학생들의 학습 다양성을 제한하고 판박이 수업과 "따라 하기" 학습을 조장한다는 점이다. 교사에게서는 교육가의 전문성을 발휘할 기회를 박탈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 노력하여 수업 교보재를 제작하고, 자신의 학교 학생들에게 적합한 소재와 재료를 선택하여 수업을 설계할 유인을 빼앗는다. 학생들은 스스로 찾아보고, 생각해보고, 적용해 볼 자극을 받지 못하고, 교과서와 교과서를 해설한 참고서와 문제집 속에 빠져 틀에 박힌 학습자가 되도록 길들여진다.

교과서를 중심으로 학교 수업과 학습이 진행되는 상황은 학생들이 수많은 레고 블럭을 모으고 맞춰서 다양한 장난감을 스스로 만들 수 있는 상황임에도, 국가교육과정과 교과서가 제시한 장난감만을 가지고 놀게 하는 것과 같은 상황이다. 학생들은 자신의 관심과 욕망을 따라 수많은 도전을 감행할 기회를 박탈당하고, 학교에서 나눠준 장난감을 정리하고, 관리하는 사람으로 스스로를 규정하게 된다. 수전노가 돈을 끝없이 모으고 지키는 노예가 되었듯이, 교과서는 학생들을 지식과 정보를 고정된 어떤 것으로 이해하고 그것들을 끝없이 모아서 정리하고 관리하는 노예로 만든다.

재고를 아무리 많이 쌓아둔들 회사에 무슨 이득이 있을 것인가? 오히려 비용만 발생시킬 뿐이다. 70년대 일본기업들은 물리적 실체를 지닌 재화조차도 필요할 때 바로 활용하여 생산함으로써 재고를 최소화, 최적화하는 적시생산방식(Just In Time)으로 생산체제를 운용했다.

이제 디지털 네트워크 지식시대는 학습도 적시활용학습(Just In Time Learning)이 가능한 시대가 열렸는데, 학교는 여전히 더 많은 재고 관리방식의 교과서를 고집하고 있다. 철지난 근대학교 방식은 빨리 그만두어야 한다. 안타까운 점은 문재인 정부는 교과서 자유발행제를 공약으로 제시했지만, 이 정책 관련하여 별다른 노력이 진행되지 않고 5년이 지났다는 점이다.

두번째, 교육과 학습을 저장량 개념으로 타락시킨다. 이제 사회와 학생의 역량이 지식과 정보의 재고량에 좌우되는 시대는 끝났다. 지식과 정보의 재고관리체제는 지식 스트리밍 시대에는 비효율을 넘어 막대한 장애가 되고 있다. 기업에서 중요한 것은 재고가 아니라, 생산-유통-판매가 상호 유기적으로 상호작용하는 가치사슬이듯이, 이제 학습도 지식의 생산과 유통, 공유와 활용을 통해 새로운 가치와 활동을 창조하는 역량이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한국의 촘촘한 국가교육과정과 교과서는 학교를 지식과 정보를 저장하고 관리하는 조직으로 타락시키고, 학생을 창고지기로 만든다. 학교는 기존의 지식과 정보를 보관하고 관리하는 곳이 아니라, 지식과 정보를 활용하는 법을 배우는 곳이어야 한다. 지식과 정보는 이제 더 이상 머릿속에 저장하거나 책과 같은 물체화된 것으로 소유하는 대상이 아니다.

우리는 지식과 정보를 저장량이 아니라 유량으로, 스트리밍 서비스로 활용하는 사례를 멀리는 미네르바 스쿨에서, 가깝게는 거꾸로 캠퍼스와 많은 대안학교에서 이미 오래전부터 경험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공교육체제에서 낡은 교과서 중심 교육체제를 버리고 바로 새로운 학습체제를 허용하는 것이다.

아이들을 창고지기로 만들 것이 아니라, 창조자, 도전자, 판매자, 유통과 연결자로 성장하도록 도와야 한다. 학습은 디지털화되어 네트워크로 연결된 지식과 정보를 바로 검색하여 활용하고, 새롭게 창조하여 연결하고 공유하고 재창조하는 순환적 활동이 되었다. 학습을 저장량 개념으로, 수업을 통해 지식과 정보를 받아서 정리하고 보관해야하는 무엇으로 학습한 사람은 새로운 창조자, 향유자가 될 수 없다.

다른 곳에서 강습을 받은 경험이 있는 사람에게는 수업료를 더 높게 받았다는 베토벤의 유명한 일화가 말해주듯이, 지식과 정보를 외우고, 정리하고, 보관하는 무엇으로 배운 사람을 스트리밍 받아서 바로 쓰고 활용하고 덧붙이고 연결하여 새로운 일을 하는 재료로 대하도록 만드는 일은 두세 배의 노력을 필요로 한다.

최근 국제적으로 배운 것 지우기 학습(Un-learning)과 새롭게 배우기(Re-learning)를 강조하는 것도 근대학교 체제에서 진행된 교육의 폐해를 씻어내기 위한 노력이 필요함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지우기와 새롭게 배우기가 잘 되지 않는 재고관리자 역할에 머무는 학생은 마치 흑자 파산하는 회사와 같다.

저장량의 관점에서는 자본과 재고를 많이 가지고 있지만, 유량관리(현금흐름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파산을 맞이하는 흑자 파산과 같이 많은 지식과 정보를 머리에 담고 있지만, 그것을 활용해서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즉, 새로운 지식과 정보를 창출하지 못하는 학생은 새로운 세상, 새로운 아이디어, 새로운 문화와 제품을 만드는 데는 무능한, 흑자 파산하는 기업과 같다.

세번째, 자율과 창의의 바탕인 학교자치를 방해한다. 누가 무엇을 어떻게 가르치고 배울 것인가를 결정하는 과정이 교육자치의 핵심이다. 전통적으로 우리는 이 과정을 지역 주민의 자치를 통해 수행해왔다. 서당과 서원의 교육과정, 교보재, 교사는 지역 주민들이, 특히 학부모들이 교사와 협의하여 결정했다. 헌법이 보장하고, 1991년에 시행된 지방자치제에 따라 시행되고 있는 교육자치제도는 국가교육과정과 교과서 국검정 제도에 의해 반쪽짜리가 되었다.

누가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는 국가가 결정하고, 어떤 교보재를 사용할 것인가의 핵심 요소도 국가가 결정하고 나면, 교사는 겨우 수업 과정에서 조금의 변용과 전달 방식의 변화만을 응용하는 수준에 머물게 되고, 학부모와 학생은 학교의 가장 핵심구성원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학습자와 그 부모는 아무런 발언권도 결정권도 없는 상태에 방치된다. 결국, 교육자치는 속빈 강정이 될 처지에 놓여있는 상태로 30년이 지나고 있다.

또한, 학생 개개인의 학습 요구와 수준은 누구보다도 교사와 학부모가 잘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시스템에 들어온 학습자는 '닥치고 따라와!' 상황에 놓일 수밖에 없다. 학습자가 지난 학년에서 제대로 배웠든, 그렇지 못했든, 자신의 소질과 관심, 진로와 관련이 있든 없든, 일단 학교 시스템 안에 들어오면, 컨베이어벨트에 실려 가는 원광석처럼 속절없이 빠르게 따라가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개개인화된 교육과정은 감히 기대할 수조차 없다. 테드 로즈가 그렇게 "평균의 종말"을 외쳤지만, 우리의 교육과정과 교과서는 강고하게 평균만을 지향하고, 평균에 고정된 궤도를 무한정 돌리고 있다.

2022 교육과정에 따르면, 고등학교의 경우, 192학점을 졸업학점 기준으로 한다고 한다. 작금의 고교학점제는 저장량 개념에 입각해서 재고를 늘리는 교육 밖에 수행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든다. 앞만 보고 달려도 192학점을 채우려면 정신이 없을 것이다. 스스로 만들어가는 수업은 120학점을 해도 벅차다. 대학은 4년간 140학점을 이수한다. 도대체 누구와 무엇을 위한 교육과정인가?

어떻게 할 것인가? 학교와 학습자가 자율주행하는 체제로!

바야흐로 세계는 인공지능, 빅데이터와 초고속통신망을 통해 자율주행시대를 향해 가고 있다. 사실 30년 전 헌법이 보장했지만, 독재정부가 폐기했던 지방자치제를 부활시켰을 때, 지역별로, 도시와 삶의 공동체별로 자율과 자치를 통해 다양한 자율주행 체제를 통해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네트워크 국가체제를 만들고자 했다.

지난 30년간 숱한 우여곡절 속에서도 일반행정 영역에서는 많은 창조적 혁신과 지역단위 자치모델이 개발되고 운영되었다. 하지만, 교육분야는 여전히 국가중심적인 교육과정 체제와 교과서 교육내용 체제를 유지하고 있어, 지역단위는 고사하고 광역단위에서조차도 자치와 자율 속에서 창의와 혁신이 꽃피는 그런 학교를 만들지 못하고 있다.

이제 선진국이 된 대한민국답게, 민주주의와 자치 경험을 30년 넘게 운영해 온 시민들의 수준에 맞게 교육도 높은 수준의 자치체제로 전환해야 한다. 그 첫걸음이 교육과정과 교과서 자율 체제라고 할 수 있다. '어떤 교육과정을 어떤 미디어를 통해, 학생들이 배우게 할 것인가?'를 가까이에서 학습자의 상태와 수준을 가장 잘 진단할 수 있는 학교와 지역, 교사와 학부모가 함께 만들어가도록 보장하고 지원해야 한다.

특히, 선진국으로서 프런티어 역할을 수행해야하는 미래세대에게 주어진 궤도만 달리도록 해서는 안 된다. 스스로 기획 설계하고, 함께 만들어가는 경험을 통해 창조와 혁신이 일상이 되고, 도전을 통해, 실패와 성공의 과정 자체를 즐기고 배울 수 있는 자치와 자율체제로 학교교육을 전환해야 한다.

더 이상 잘 갖추어진 재고목록(국가교육과정)으로는 새로운 창조가 어렵고, 아무리 많은 재고를 갖춘 창고(교과서)를 잘 지어도 개개 학교와 학생별 학습요구를 맞출 수 없으며, 어떤 체계적인 재고 조사(수능시험)도 혁신적 창조 역량을 측정할 수는 없다. 이런 과정을 통과한 학습자는 잘 해야 저장된 재고목록을 잘 외우는 창고지기 밖에는 안 된다.

이제 국가교육과정을 대폭 축소하여 방향과 원칙만 제시하고, 시도 교육과정체제로 전환하고, 나아가 핵심적인 교육과정과 내용, 수업과 평가 방식은 학교가 교사-학부모-학생-지역사회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고 자치적으로 결정하여, 현장에 맞게 실천할 수 있도록 전환해야한다. 교육대전환의 첫발은 여기서 떼어야 한다.

태그:#국가교육과정, #교과서, #디지털 네트워크 지식시대, #학습자 중심, #학교자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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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서울시교육청에서 근무 중. 플로리다주립대 정책학 박사: 「차터스쿨이 공립학교의 학업성취도 및 인종분리에 미치는 영향 분석」 (2012) 강의: 순천대 객원교수(2015), 숙명여대 및 광주교대 등 강의 저서: 《교육을 교육답게》(2018), 《포노사피엔스 학교의 탄생》(2020), 공역서 《교육은 어떻게 사회를 지배하는가》(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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