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3.04 19:30최종 업데이트 22.03.04 19:30
  • 본문듣기

우크라이나 군인들이 26일 오전(현지시각)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에서 러시아 공격대와 교전 후 불발탄을 찾고 수거하고 있다. ⓒ AFP=연합뉴스

 
"그때 우리 식구들은 광장에 텐트를 치고 몇 날 며칠을 시위했어. 밥도 광장에서 먹었고 출근도 애들 등교도 다 광장에서 했어."

미국 와서 처음 사귄 친구 이리나(Iryna)는 우크라이나 출신이다. 조용하고 차분한 사람이었지만 2004년 오렌지 혁명 당시를 얘기할 때면 들뜬 얼굴에 목소리가 높아지곤 했다. 부정선거로 집권한 친러 대통령 야누코비치 퇴진은 이리나 같은 평범한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끈질기게 싸운 결과였다. 


수도 키이우에서 공부해 국립은행에 다니던 이리나는 미국에 살면서도 고국에 대한 자부심을 숨기지 않았다. 노랑과 파란색 손 국기가 펄럭이는 집에서 양배추 롤이 들어간 음식을 선보이며 자신의 조국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설명해줬다. 그렇게 늘 착하고 순한 이의 말이 거칠어졌다. 

"그 개자식이 내 조국을 어떻게 할지 난 너무 무서워."

보이콧 러시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왼쪽)이 2008년 2월 27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마린스키 극장 건립 225주년 기념식에서 러시아 오페라 가수 안나 네트렙코에게 러시아 인민 예술가 상을 수여한 뒤 축하하고 있다. ⓒ 연합뉴스

 
3월 3일 목요일,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이사회가 성명을 발표했다.
 
안나는 메트로폴리탄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가수 중 한 명입니다. 하지만 푸틴이 우크라이나에서 무고한 양민들을 살해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는 앞으로 우리와 함께 할 수 없습니다... 그가 메트로폴리탄으로 복귀하는 시나리오는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메트 오페라의 슈퍼스타인 러시아 출신 소프라노 안나 네트렙코가 더 이상 메트 오페라 무대에 설 수 없다는 발표다. 그는 지난 20년간 메트 오페라단의 대표 배우였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내 친 러시아 단체의 깃발을 들고 찍은 사진을 비롯해 그동안 푸틴 대통령과 거리를 두라는 오페라단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메트의 결정 후 예정됐던 밀라노, 취리히, 함부르크 등의 공연도 취소됐다. 

"그 짧은 시간에 합주를 맞춰 무대에 올랐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정말 잘했어요. 연주 끝나고 기립 박수가 끊이지 않아서 앙코르 곡도 했어요."

2월 25일, 카네기홀에 다녀온 이가 그 감동을 커뮤니티 게시판에 남겼다. 공연 하루 전 갑자기 바뀐 스케줄에 어리둥절했지만 덕분에 조성진이 연주하는 라흐마니노프를 들을 수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부럽다는 댓글이 줄을 이었다. 

이 공연은 친 푸틴 성향의 지휘자와 피아니스트의 공연이 취소돼 만들어진 깜짝 공연이었다. 지휘자 게르기예프는 2014년 푸틴에 의한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을 지지한 사람이다.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그의 공연을 반대하는 이들이 목소리를 냈다. SNS 상에서 #CancelGergiev 시위를 벌였고 그 영향력에 카네기 홀이 급히 일정을 변경한 것.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왼쪽)이 2016년 9월 22일 러시아 모스크바 크렘린에서 열린 시상식에서 당시 마린스키 극장의 예술감독 발레리 게르기예프에게 메달을 수여하고 있다. 독일 뮌헨 시장은 게르기예프가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지지하고 우크라이나 침공을 거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를 상임 지휘자에서 해임했다고 밝혔다. ⓒ 연합뉴스

 
영국도 러시아 국립발레단과 볼쇼이 발레단의 공연을 취소했다. 러시아 음악가들은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에 참가할 수 없게 됐다는 보도도 나온다. 

카네기 공연이 취소된 게르기예프는 그가 몸담았던 뮌헨 필하모니 상임 지휘자 자리에서 해고됐다. 뮌헨 필하모니 최종 책임자는 세계적 지휘자의 해고 사유를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가 러시아 지도자에 대한 매우 긍정적인 평가를 재고하고 수정할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았을 때, 우리의 유일한 선택은 즉각적인 관계 단절일 뿐입니다.

보드카에서 축구 경기까지 러시아 이름이 새겨진 모든 부문의 불매 운동이 벌어지고 있는 중이다. 러시아 내 영업장을 폐쇄하는 이케아(Ikea)와 개봉 중단을 선언한 월트 디즈니 등 러시아 정부에 대한 압박이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독재자 푸틴은 무리수를 계속하고 있다. 현지 시간 4일 새벽,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남동부 원자력 발전소를 공격해 화재가 발생했다고 한다. 

<미스터 션샤인> 의병들 

우크라니아 출신 이리나와 체코 출신 렌카(Lenka)와 영화를 본 적이 있다. <Kite Runner(연을 쫓는 아이)>라는 소설을 바탕으로 만든 작품이었다. 소련의 침공과 탈레반 정권 등장 등 아프가니스탄의 굴곡진 현대사를 배경으로 아버지와 아들이 고향을 떠나 난민이 되어 떠도는 내용이다. 이슬람에 대한 선입견을 심어준다 싶어 중간 중간 좀 불편했다. 소설이지만 너무 과장했다 싶었다. 영화가 끝나고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을 얘기했다. 신기하게도 우크라이나와 체코 친구가 같은 부분을 말한다. 

"아빠가 몸이 안 좋아서 병원에 가 진료를 받는데 의사가 소련 출신이라고 말하잖아. 갑자기 의사 멱살을 잡고 너 따위한텐 진료 안 받는다고 나오는 부분, 거기 너무 시원했어."

자신도 좋았다며 손바닥까지 부딪치며 반가워한다. 난 오버 연기라고 느꼈던 부분이었는데.
 

왼쪽이 체코 Lenka 오른쪽이 우크라이나 Iryna. ⓒ 최현정

 
그때 깨달았다. 체코나 우크라이나 같은 주변국들에게 러시아란 존재를 말이다. 이웃 국가로 침략과 교류와 전쟁과 공생으로 만들어진 오랜 원한이 쌓인 관계라는 사실을. 우리가 일본과의 사이에서 짐작하는 그런 관계구나 생각했다. 

그런 깨달음 덕인지, 지금 우크라이나 사람들의 처절한 저항이 조금은 이해된다. 비교 불가능한 군사력이지만, 그들은 숙명적으로 러시아와의 싸움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유럽의 빵 바구니라는 드넓은 흑토 지역에서 1000만 인구가 사라진 기근의 원인이기도 했고, 체르노빌의 피해를 고스란히 안고 있는 것도 이웃 러시아 탓이다. 뼛속 깊은 분노와 원한을 푸틴은 계산하지 못한 듯하다.

러시아 군 탱크를 막아서는 이들이나 자원입대하는 운동선수, 음악가, 댄서들의 얘기를 들으며 나는 <미스터 션샤인> 의병들이 생각났다. 

"그 어떤 나라도 당신들의 투쟁을, 이 작은 나라의 슬픔을 알지 못합니다. 조선의 사정이 외국에 알려지는 것도 의미가 있소."
"이 작은 나라 하나 어찌 되든 세상은 알려 하지 않으나, 우리 전해봅시다. 조선의 주권을 향해 나아가는 두려움 없는 걸음의 무게에 대해서."
"당신이 본 것을 세계에 전하여 알려주시오."

고애신과 유진 초이는 영국 기자에게 일제에 맞서는 조선의 투쟁을 세상에 알리는 게 중요하다고 의병들을 설득한다. 허름한 복장에 장난감 같은 무기를 들었지만 형형한 눈빛으로 조국을 지키던 그들이 생각났다.
 

실제 의병들의 모습을 재현한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극중 의병들 ⓒ tvn

 
이리나가 내게 당부했다. 

"많은 이들이 이 전쟁이 자신들과는 거리가 멀고 그것에 대해 걱정하지 않는다고 말해. 하지만 평화와 민주주의가 얼마나 연약한지, 우리의 삶이 얼마나 쉽게 재앙으로 변할 수 있는지 꼭 알았으면 좋겠어. 이 전쟁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일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와 전체주의의 전쟁이기도 해. 푸틴은 위험한 미치광이야. 나는 또한 우크라이나인들이 얼마나 용감하고, 얼마나 단결하며, 승리하고자 하는지 꼭 알려주고 싶어."

그리고 지금 국제사회가 힘을 모아야 하는 이유를 말한다. 

"우크라이나인들은 한계가 있어. 푸틴은 매우 잔인한 사람이야. 국제 사회의 제재로 그를 막을 수는 없을 거야. 아마도 더 잔인해질 거야. 그는 일반 러시아 시민들의 삶을 더 좋게 만드는 데 관심이 없어. 핵계획을 가동하기 전에 미국이 나서지 않으면 최악의 시나리오가 우려돼. 부디, 내 예상이 틀리기 바라." 

미국에 사는 우크라니아인의 두려움이 미국에 사는 한국인의 절박함과 다르지 않아 보였다. 한반도가 고향인 내게도 남의 일이 아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침공을 개시한 24일(현지시간) 독일 수도 베를린의 브란덴부르크문 앞에서 시민들이 우크라이나 지지 시위를 벌이며 전쟁 중단을 촉구하고 있다. 2022.2.24 ⓒ 연합뉴스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1,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