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0월 어느 날, 전남대학교 교정을 산책하는데 갑자기 비가 내렸다. 비를 피해 건물 안으로 들어갔는데 뜻밖에 중국어 강연이 열리고 있었다. 강사는 바로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의 작가 옌롄커(閻連科)였다. Q&A 시간에 손을 들고 물었다.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에는 문화대혁명, 정권에 대한 비판과 낭만주의적 반항정신이 강하게 드러나는데 최근 작품에서는 그런 비판적 신랄함이 줄어든 것 같다. 문학적 지향점이 달라진 것인가, 아니면 중국 당국의 판금조치가 두려워진 것인가?"
 
"(웃음)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는 2005년, 제가 비교적 젊었을 때 쓴 작품이고 사실 그 파급력이 그렇게 크고 내 인생을 이렇게 바꿔 놓을지 몰랐다. 어차피 중국에서 출판과 판매가 안 되기 때문에 오히려 더 자유롭게 중국의 문제를 비판적으로 쓰고 있다. 나는 28년 군생활의 경험을 통해 쓸 이야기가 무궁무진하다. 다만 그 이야기를 담을 형식이 떠오르길 기다린다.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과 비판정신은 변함없이 견지해야 할 덕목이지만 작가로서 주목하는 문제는 시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 아닌가."

 
옌롄커의 문제작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가 영화로 만들어진다는 얘기는 오래 전부터 있어 왔다. 에로틱한 장면이 너무 많아 남녀 주연 배우 캐스팅에 난항을 겪는다는 2013년 보도 이후 벌써 9년이 흘러 드디어 영화가 개봉되었다. <은밀하게 위대하게>에 이어 장철수 감독의 9년 만의 신작이다. 원작의 느낌을 얼마나 잘 재현했을까? 관심과 기대를 안고 극장을 찾았다.
 
영화 속 성적 표현은 자유와 존엄이 억압받는 사회에 대한 통렬한 비판의 몸짓이었나? 영화는 성(性)을 통해 성(聖)을 돌아보게 하는 지점에 영화는 당도하지 못한다.

▲ 영화 속 성적 표현은 자유와 존엄이 억압받는 사회에 대한 통렬한 비판의 몸짓이었나? 영화는 성(性)을 통해 성(聖)을 돌아보게 하는 지점에 영화는 당도하지 못한다. ⓒ 조이앤시네마

 
# 높은 싱크로율에도 뭔가 겉도는 느낌은 왤까?
 
영화의 대사는 원작의 대화를 거의 그대로 활용한다. 영화에서 새롭게 추가된 장면은 남녀주인공이 숙소를 벗어나 자전거를 타고 데이트를 하는 씬이 거의 유일하다. 사단장이 자신의 군복에 총을 쏘는 장면이나 남자주인공이 위병소 신병에게 잣을 건네주는 짧은 씬을 제외하면 모든 장면이 원작을 시나리오 삼아 147분간 충실히 재현된다.

그런데도 뭔가 겉도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가장 큰 원인은 중국과의 외교적 마찰을 우려해 배경을 북한을 모티브로 한 가상의 사회주의 국가로 설정하면서 역사적 실체성이 사라졌다는 점일 것이다. 마오쩌둥의 아우라도 없고 문화대혁명의 처절함도 없는, 그 구체성이 증발한 시공간 위에 서로의 몸을 탐하는 욕망의 스토리만 맥없이 부유하는 느낌이다.

신분, 계급, 윤리, 이데올로기 등 온갖 금기를 넘어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이레간의 사랑은 남녀 간의 욕정을 넘어서 독재체제와 절대 권력에 대한 철저한 반항을 보여주는 설정인데 맞서야 할 투쟁의 대상이 모호하다보니 두 남녀의 파격적 몸짓이 그저 위험한 사랑에 대한 서사에 머무르고 마는 아쉬움이 있다.
 
# 성적 욕망에 대한 동경은 보편적 욕망인가, 죄악인가?
 
"그 짧은 한 달 동안 두 사람은 본능의 주인이 되었고, 동시에 본능의 노예가 되었다. 성의 유희가 두 사람 삶의 거의 전부이자 인생의 목표가 되었다." -책, 133쪽
 
성적 욕망에 대한 동경은 어디까지가 인간의 보편적 욕망이고, 어디서부터가 죄악이 되는 걸까. 사단장은 혁명전쟁에 참여했다가 허벅지에 총알이 박혀 성적 불구자로 살아간다. 자본주의적 사치인 개인의 욕망을 거세하고 오로지 혁명에 온몸을 바치는 사회주의가 요구하는 전형적인 인물이다. 반면 그의 아내는 성행위 후 "살아온 보람이 있었다고,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말한다.

남자주인공의 아내는 성을 남편의 승진과 출세, 즉 현실적인 목적을 위한 도구로, 육체적 포상의 수단으로 이용한다. 남자주인공은 성행위조차 자신에게 부과된 사회주의 책무로 인식하면서도 동시에 자신의 승진과 가족 부양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이중성에 머물다가 점점 누님과의 진정한 사랑의 감정에 빠져든다.

소설은 네러티브를 통해 욕망의 의미를 설명할 수 있지만, 영화는 연기를 통해 그 의미를 드러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두 배우의 연기가 영화의 성패를 가를 주요 변수가 되는 건 당연하다. 그런 의미에서 여주인공의 연기는 다소 아쉽고 연출도 성적 장면의 지속적, 양적 노출보다는 보다 상징적이고 극적인 방법으로 제시될 필요가 있었다.

친일파 처단을 위해 성을 도구화하는 영화 <색계>처럼 성은 쉽게 사랑의 감정으로 전이되는 속성이 있다. 그렇다하더라도 관객의 공감을 소구하기 위한 영화적 장치가 필요한데 이 부분에 대한 아쉬움이 남는다.
 
#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爲人民服務)"는 마오쩌둥이 한 말이다. 이 성(聖)스러운 혁명의 언어를 그들만의 성(性)스러운 수사로 비틀어낸다. 이 말이 새겨진 팻말은 두 남녀주인공의 은밀한 신호이자 육체적 결합의 약속이다. 계급의 옷, 윤리의 옷, 이데올로기의 옷을 모두 벗고 나면 그 거추장스러운 것들은 인간의 원초적 욕망 앞에 얼마나 하찮고 거추장스런 것들인가. 이런 성(性)을 통해 성(聖)을 돌아보게 하는 지점에 영화는 당도하지 못한 느낌이다.

유폐된 공간엔 오직 두 사람의 사랑만이 남는다. 그들은 서로에 대한 사랑이 더 크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서로를 이어준 팻말만 남기고 절대 권력의 석고상, 어록, 사진 등 모든 혁명의 성물을 다 때려 부순다.

통제사회, 군대, 사단장 사택, 1층 거실, 2층 침대. 점강적으로 옥죄어 오는 공간의 압박은 운신의 폭, 자유의 공간에 대한 압박이다. 그릇된 행동 하나가 자신의 삶을, 중대, 대대, 사단, 사회주의를 무너뜨리고 전 세계를 무너뜨린다는 점증적인 집단주의의 압박은 개인보다 전체를 생각하는 개인적 존엄의 증발이다. 두 남녀의 성행위는 보편적 사랑에 대한 표현이자 동시에 자유와 존엄이 억압받는 사회에 대한 통렬한 비판의 몸짓이어야 했다.
 
"사랑의 파도가 언제 각자의 마음속에서 서서히 퇴조했는지, 위대함과 신성함이 언제 일상성으로 변해버렸는지 (중략) 의식하지 못했다." - 책, 164쪽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의 하이라이트는 반전에 가까운 후반부 결말 부분에 있다. <색계>의 주모자들처럼 허무하게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 상관의 아내를 탐한 취사병은 자신의 소원대로 도시 호구를 얻어 잘 살게 되고, 바람을 피워 임신까지 한 아내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아니 더 높은 권좌에 앉아 안락한 삶을 살아간다.

하지만 그 두 사람에게 이제 사랑은 남아 있지 않다. 부대를 떠날 때 선물로 받은 약속 팻말은 여자에게 되돌려진다. 두 사람 사이 사랑의 파도는 그렇게 완전히 퇴조했음을 알리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뜨거웠던 혁명의 위대함과 신성함이, 그 숨막히는 집단주의와 절대 권력에 맨몸으로 맞섰던 낭만주의적 반항이 어느새 일상성에 묻혀 흔적도 없이 사라져 가듯.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옌롄커 장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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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베이징에서 3년, 산둥성 린이(臨沂)에서 1년 살면서 보고 들은 것들을 학생들에게 들려줍니다. 거대한 중국바닷가를 향해 끊임없이 낚시대를 드리우며 심연의 중국어와 중국문화를 건져올리려 노력합니다. 저서로 <중국에는 왜 갔어>, <무늬가 있는 중국어>가 있고, 최근에는 책을 읽고 밑줄 긋는 일에 빠져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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