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의 한 장면.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의 한 장면. ⓒ SBS

 
어떤 조직 내부에서 부정부패와 비리 등을 외부에 폭로하는 사람을 '내부 고발자'라고 한다. 영어로는 내부 고발을 휘슬 블로잉(Whistleblowing)이라고 하는데, 이는 호루라기를 불어서 위험을 알리는 신호를 전하는 것을 의미한다. 조직 문화의 특성상 비리는 그 속사정을 잘 아는 내부자의 증언이 아닌 이상 외부로 드러나기가 쉽지 않다.
 
역사적으로 어떤 시대-어떤 조직이든 내부 고발자는 대개 배신자 취급을 받으며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고, 개인의 생계에서 명예-생명까지도 위협받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위험을 무릅쓰고 거대한 권력-사회-조직의 부조리를 세상에 들춰내어 바로 잡으려했던 이들의 용기 덕분에 묻혀질 뻔했던 수많은 진실이 밝혀질수 있었다. 내부 고발자들은 훗날 우리 세상의 공익과 공동체의 좀더 발전하는 데 기여했다는 재평가를 받았다.
 
5월 12일 방송된 SBS 예능프로그램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아래 꼬꼬무)에서는 1990년 대한민국 사회를 충격에 몰아넣었던 '윤석양 이병 양심선언 사건'을 조명했다. 당시 대한민국 국군의 최고 정보부대인 보안사령부에 근무하던 윤 이병이 군의 민간인 불법사찰 자료를 가지고 탈영해 그 목록을 세상에 공개한 내부 고발 사건이다. 장현성-장도연-장성규 3MC와 가수 미노이, 배우 온주완-한승연이 이야기 친구로 출연했다.
 
'윤석양 이병 양심선언 사건'의 시작

1990년 9월 29일 박상규 목사는 친하게 지내던 한 선배 목사로부터 "사람 한 명을 숨겨줄 수 있겠냐"라는 부탁을 받는다. '그 사람'이 누군지, 왜 숨어야 하는지도 밝히지 않았다. 고민 끝에 박 목사는 부탁을 받아들이고 10월 4일 약속 장소에서 의문의 그 사람을 만난다.
 
현장에 나타난 것은 한눈에 봐도 나이가 어려보이는 젊은 청년이었다. 박 목사는 "너무 순진하게 생겼더라"며 청년의 첫 인상을 회고했다. 박 목사는 청년을 차에 태우고 옛 스승 집에 데려가 숨겨줬다. 두 달 뒤 다시 박 목사를 찾아온 선배는 거처를 옮겨야 한다며 한 번 더 도움을 부탁했고, 이번에도 박 목사는 기꺼이 수락했다.
 
수상한 청년의 정체는 누구였을까. 이름은 윤석양, 당시 나이는 24세로 전국에 수배가 내려져서 도망다니고 있는 지명수배자였다. 죄목은 '탈영'으로 입대한 지 4개월 만에 군무를 이탈한 현역 군인 이등병 신분이었다.
 
일반적인 탈영이라면 보통 최대한 자수를 설득하는 게 최선이다. 하지만 윤 이병은 자수하라는 자수 권유를 단호하게 거부했다. 윤 이병이 쓴 편지를 보면 "자수란 뭔가 잘못이 있는 사람의 경우에만 해당되는 것 아닌가, 따라서 자수란 없다"고 선언했다. 탈영한 군인이 이토록 당당하게 자신을 잘못이 없다고 주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군입대 3년 전인 1987년, 학생운동에 투신했던 윤석양은 최종규라는 가명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당시는 군사정권의 서슬이 시퍼렇던 시절로 대학교 내에 사복경찰이 다수 잠복해있었고, 사회 곳곳에 감시의 눈들이 퍼져있던 시대였다. 군사정권은 대학생들을 단속하기 위해 대학가 앞 복사집이나 레스토랑 카페에 군인들을 위장취업시켜 학생운동을 감시했을 정도였다.
 
윤 이병은 군입대를 3번 연기한 끝에 1990년 5월 결국 강원도 철원으로 자대배치를 받아 군복무를 하게 된다. 그런데 어느 날 윤 이병은 갑자기 다가온 지프차를 타고 어딘가로 끌려갔다. 그가 도착한 곳은 놀랍게도 군사정보 수집과 수사를 목적으로 하는 국군보안사령부였고, 전두환과 노태우 2명의 대통령을 잇달아 배출했을 만큼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보안사는 윤 이병이 최종규라는 가명으로 학생운동을 했다는 사실까지 이미 파악하고 있었고, 같이 학생운동에 몸담았던 동료들의 신상까지 자백할 것을 요구한다.
윤 이병이 끌려간 곳은 간첩 사건을 조사하는 보안사 대공처 6과, 이른바 '빙고호텔'로 불렸던 서빙고 분실로 끌려갔다. 빙고 호텔은 남영동 대공분실과 함께 군사정권에서 악명높은 양대 고문 시설로 불리던 곳이었다. 협박과 공포에 못이긴 윤석양은 결국 함께 학생 운동했던 동료들에 대한 정보를 다 털어놓고 말았다.
 
이 당시 체포된 이들은 48명에 이르렀고 대학생부터 군복무중이던 사람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대부분 대공전담 시설에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뉴스에서는 반국가단체를 결성한 불순한 무장투쟁 조직이 검거되었다며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큰 실적을 올린 보안사는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 윤 이병을 향한 대우도 달라졌다. 학생운동을 일망타진한 공로로 승진까지 하게된 보안사 수사관들은 윤 이병을 데리고 술판을 벌였다.

윤 이병은 당시의 참담했던 심경에 대하여 "이날을 기록하려니 손이 떨린다. 지우려 애써도 지워지지 않는, 지워질 수도 없고 지워져서도 안되는 사실을 지우려 하니까 말이다. 증인이 없으니 보안사가 매도한 거라고 하면 그만이지 않을까. 그러나 증인은 있었다. 바로 나였다"라고 고백했다. 이어 윤 이병은 "양심의 소리는 아주 작고 고요하지만 때로는 그 소리가 너무 커서 듣기조차 거북하다고 느낄 때가 있다"며 죄책감을 드러냈다.
 
"잡히면 죽는다는 위기감이 스쳐갔다"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의 한 장면.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의 한 장면. ⓒ SBS

 
보안사는 이제 윤 이병이 완전히 전향했다고 판단하고 함께 근무할 것을 제안한다. 윤 이병은 제안을 수락하고 보안사에서 일하게 된다. 보안사는 검거된 학생운동조직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윤 이병은 자료조사를 빌미로 보안사에서도 기밀문서를 관리하는 부서인 분석반까지 들어갈 수 있게 된다.
 
자료를 정리하던 윤 이병은 보안사가 비밀리에 사찰하고 있던 민간인들의 신상기록 카드를 발견한다. 해당 자료에는 인물별로 번호가 매겨져 있었고, 정치인, 언론인, 법조인, 학생에 이르기까지 무려 1303명에 이르는 명단 안에는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등 유명한 재야인사들의 이름도 포함되어 있었다.
 
윤 이병이 보안사에 남은 이유는 보안사의 추악한 비밀을 밝혀내서 세상에 알리겠다는 목표 때문이었다. 윤 이병은 보안사의 기밀 자료가 담긴 대량의 플로피디스크들을 빼내어 탈영을 감행한다. 윤 이병은 수기에서 이 당시를 회상하며 "많은 얼굴들이 스쳐갔다. 보안사 수사관들, 학생운동 동료들, 떠난다, 그리고 간다. 보안사의 빗장을 풀었다. 지옥에서 벗어난 해방감, 잡히면 죽는다는 위기감이 스쳐갔다"고 긴박했던 순간을 떠올렸다.
 
당연히 보안사는 비상이 걸렸다. 보안사는 윤 이병의 행적을 찾기 위하여 본가는 물론이고 윤 이병 누나의 직장과 지인들까지 들쑤시며 서빙고 분실로 데려가 협박했다. 한편 탈영한 윤 이병은 대학 선배에게 부탁하여 한겨레 신문의 이인우-김종구 기자와 접촉한다. 윤 이병을 만난 김 기자는 그가 가져온 자료를 확인하고 "소름이 돋았다"고 회상하며 "이건 정말 굉장히 큰 사건이다. 시대를 바꿀 수도 있는 사건이겠다"는 직감을 느꼈다고 밝혔다.
 
김 기자는 윤 이병의 안전을 위하여 당시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에 도움을 요청했다. 한편으로 김 기자는 잘못된 비밀을 세상에 터뜨리기 위하여 '윤이병 기자회견 사수작전' 준비에 돌입한다. 보안사의 감시는 언론사와 KNCC도 예외가 아니었다. 김 기자가 택한 디 데이(D-DAY)는 추석 연휴가 끝나는 10월 4일이었다. 김 기자와 KNCC 측은 실제로 고향에 내려가서 잠시 사무실을 비웠고, 보안사가 방심한 틈을 타 극소수 관계자들만이 다시 모여서 비밀리에 기자회견을 준비했다.
 
운명의 날이 밝았다. 김 기자는 미리 신문을 만들어 편집까지 마쳐놓고 기자회견만 하면 쓸 수 있게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아는 기자들에게 연락하여 비밀리에 기자회견 사실을 전했다. "경찰들을 배치하고 있다가 기습적으로 윤 이병을 끌어내면 기자회견이 무산될 수도 있다는 걱정에 입이 바짝바짝 말랐다"는 게 김 기자의 회상이었다.
     
오후 5시, 약속된 기자회견 시간을 맞이하고 윤 이병이 모습을 드러냈다. 기자들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초스피드로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윤 이병은 "보안사가 동향 파악 대상자를 분류해 주요 활동을 감시, 매달 동향 관찰보고서를 작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폭로하고 군에서 가지고 나온 자료까지 세상에 모두 공개했다. 당시의 긴박했던 분위기는 MBC 뉴스에서 촬영된 자료화면에 생생하게 담겼다.
 
윤 이병이 공개한 자료 중 당시 국회의원이었던 노무현의 동향 보고서를 보면 언제 어디서 누구와 만났는지 모든 행적을 감시한 내용들이 세세하게 기재되어 있었다. 사찰에는 인물에 대한 분석도 담겨있었는데 '노동문제와 관련하여 반정부적인 과격한 언동으로 노동자를 선동하고 있으므로 지속적인 동향관찰 요망됨'이라고 적혀있었다.
 
군사정권은 감시대상자마다 요원을 배정하여 1대 1로 감시했고 매달 동향보고서를 작성하고 있었다. 또한 감시대상자에게는 위험도에 따라 등급이 분류되어 있었고, 거주하는 집의 경비 유무, 담장높이, 아파트 도면까지 관찰보고서에 포함되어 있었다. 유사시 감시대상자에게 위해를 가할 수도 있는 의도로 작성되었음을 보여준다.
 
훗날 이 사건은 노태우 정부가 추진한 '청명계획'의 일환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맑고 깨끗하게 한다는 의미'의 청명은, 계엄같은 국가 급변 사태시에 정부에 반하는 인물을 검거하겠다는 계획이었다. 윤 이병의 양심선언은 언론을 통하여 전국에 알려졌고, 대한민국은 발칵 뒤집혔다. 국민들은 군의 불법적인 정치개입과 민간인 사찰에 강하게 분노하며 대규모 시위가 확산됐다. 보안사의 불법사찰 대상이 된 사람들은 저항의 의미도 자신의 사찰카드 번호를 달고 등장했다고.
 
정권의 물타기 시도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의 한 장면.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의 한 장면. ⓒ SBS

 
양심선언 3일 만에 국방부 장관이 물러나고 보안사령관이 해임됐다. 하지만 8일 만에 국민 앞에 선 당시 노태우 대통령은 대국민 사과 대신 뜬금없이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며 보안사 민간인 사찰 사건에 쏠린 여론의 관심을 돌리는 물타기를 시도했다.
 
윤 이병은 양심선언 이후에도 KNCC의 도움을 얻어 한동안 도피생활을 계속했다. 폭로하고 나면 홀가분해질 줄 알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윤 이병은 수기에서 "어떤 사람들은 나를 두고 양심의 승리, 어떤 사람들은 변절자라고 말했다. 학교 교문에는 '자랑스러운 우리의 선배님'이라는 대형 현수막이 걸렸지만, 어떤 선배는 나에게 입에 담지 못할 극단적인 폭언을 퍼부었다. 그런 이야기를 번갈아 듣다보니 어떤게 진짜 나인지 종잡을 수 없었다. 나 자신과 세상 모든 것으로부터 달아나고 싶었다"며 혼란스러웠던 순간을 회상했다.
 
도피생활을 이어가던 윤 이병은 결국 보안사에 체포되어 특수 근무 이탈죄로 2년형을 선고받고 육군교도소에 수감된다. 윤 이병은 감옥 안에서 처음 들어왔을 때 공포에 떨던 신참들이 고참이 되어 다시 신참들을 괴롭히는 악순환을 지켜보며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게 인간이구나, 나만 그런 게 아니구라"라는 것을 깨닫게 됐다고.

윤 이병은 형기를 마치고 출소한 이후에도 '나는 누구인가'를 끝없이 번민했다. 윤 이병은 독서와 수기를 통하여 고민의 해답을 찾았고 '아담의 곪은 사과'라는 자전적인 글을 집필한다.

윤 이병은 성경에 나오는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를 통하여 '우리 내면에는 선과 악이 불분명하게 뒤엉켜 있는게 가장 큰 고통의 원인'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서빙고에서 협박과 고문 앞에 비겁한 모습을 보였던 윤석양과, 양심선언을 했던 용감한 윤석양 모두 자신의 모습으로서 솔직하게 받아들이게 된 것.
 
윤석양 씨는 <꼬꼬무>의 인터뷰 요청을 정중하게 거절하면서 "그날의 양심선언은 세상을 바꾸는 거창한 일이 아니라, 벼랑 끝에 선 청년이 살기 위하여 했던 선택"이라는 이야기를 남겼다고. 윤 이병의 수기에는 "삶에는 무수하게 잡다하고 복잡한 모든 것이 뒤죽박죽 뒤엉켜있다. 그렇데도 그안에는 더 옳은 길과 덜 옳은 길이, 더 나쁜 길과 덜 나쁜 길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으로 본인의 삶을 함축하고 있다.
 
흔히 세상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과거에 비하면 많은 것이 끊임없이 변한 세상에서 살고 있다. 양심에 대한 책임을 지고 끝까지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조금이라도 더 나은 세상으로 변해가는 데 보탬이 된 것은 아닐까.
청명계획 꼬꼬무 내부고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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