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역을 마친 남자라면 모두 알고 있을 명품 무기가 있다. 개발 뒤 현재까지 수출로만 수조원에 이르는 수익을 올린 K9 자주포다. 세계 최고급 성능을 자랑하는 자주포를 한국 순수기술로 만들어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절로 어깨가 으쓱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불행히도 K9 자주포엔 민망한 사연이 하나 있다. 한국을 대표하는 여러 상품들이 그러하듯 자주포 역시 수출용과 내수용이 다른 것이다. 이런 경우 대개 그렇듯 자주포도 수출용이 더 낫다. 차이는 다름 아닌 탑승자의 편의다. 내수용 K9 자주포엔 에어컨 설비가 없다.

이 같은 사실이 알려진 건 뉴스를 통해서였다. 북유럽 국가인 노르웨이에 수출되는 자주포에 에어컨이 달려 있는 반면, 한국군이 운용하는 동일모델엔 에어컨이 없다는 얘기였다. 인터뷰에 응한 제조사 한화디펜스의 공정품질팀장은 기술력으론 얼마든지 에어컨이 탑재된 자주포를 한국군에 납품할 수 있지만 예산 문제로 그러지 못하고 있다고 털어놨다. 요컨대 여름에도 선선한 북유럽국가 자주포에도 달려 있는 에어컨을 폭염 속에서 기동하는 한국군은 이용하지 못한다는 우스꽝스런 이야기다.
 
웨스트윙 시즌4 포스터

▲ 웨스트윙 시즌4 포스터 ⓒ NBC

 
에어컨 없는 자주포, 문득 떠오른 장면

이 이야기를 들으며 아론 소킨의 드라마 <웨스트윙>을 떠올렸다.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극작가를 거론할 때면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아론 소킨은 <웨스트윙>을 통해 세계적인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이 드라마는 무려 일곱 시즌이나 제작되었는데,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무척이나 좋아해 청와대 참모들과 수차례나 보았다는 일화도 유명하다. 미국 대통령과 보좌진의 이야기를 다룬 이 드라마 네 번째 시즌엔 미국이 제 나라 군인을 바라보는 시선을 생각하게 하는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백악관 비서실에서 근무하는 차장 수석비서 도나(재널 멀로니 분)가 이제 막 첫 출근을 한 잭 리슨 소령(크리스찬 슬레이터 분)과 대화를 나눈다. 잭에게 은근한 호감을 품은 그녀지만 그가 현직 대통령인 민주당 후보 대신 공화당 후보를 지지했다는 게 못내 불편하다. 도나는 그에게 어째서 공화당 후보를 지지했느냐고 꼬치꼬치 캐묻는다.

말을 아끼던 잭이 답한다. 자신은 군인이라 정치를 잘 모른다고, 다만 민주당에서 국방예산을 줄여 공화당을 택하게 됐다고 말이다. 사안을 잘 알고 있던 도나가 신이 나서 말한다. 그건 당신이 잘 몰라서 하는 말이라고, 중요한 예산이 아니라 공구를 너무 비싸게 구입하는 걸 제한했을 뿐이라고 말이다. 그녀는 잭의 책상에 놓인 재떨이 같은 게 400달러씩이나 한다고 덧붙인다.
 
웨스트윙 스틸컷

▲ 웨스트윙 스틸컷 ⓒ NBC

 
그 재떨이가 400달러인 이유

잭이 책상 위에 놓인 망치를 집어든다. 그리고는 재떨이를 내려친다. '쾅' 소리와 함께 재떨이가 부서진다. 깜짝 놀란 도나 앞에서 잭이 말한다.

"이 재떨이는 그린빌 같은 핵잠수함에 있는 거에요. 어뢰가 잠수함 곁을 스치기라도 하면 항해장비가 깨지고 유리파편이 장교들 눈에까지 들어갈 수 있죠. 그런데 이건 딱 세 조각으로 깨지게 돼있어요. 우린 보통 사람들과 약간 다른 삶을 살고, 그래서 돈이 더 많이 듭니다."

도나는 반박하지 못한다.

이 장면을 다시 보며 생각한다. 우리는 얼마나 쉽게 오만해지는가를, 잘 알지 못하면서도 얼마나 섣불리 판단하는지를 말이다. 우리는 스스로 틀릴 수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얼마나 많은 것들을 결론짓고 마는가. 정말이지 우리는 언제나 틀릴 수 있다.

미군이 산산조각나지 않는 50만 원 짜리 재떨이에 예산을 편성한 건 아론 소킨이 취재를 통해 알아낸 사실이다. 방만한 지출이라고 볼 수 있는 구석도 없지 않지만, 한편으론 그 지출에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한다. 산산조각나지 않는 재떨이를 비싼 돈을 들여 사들이는 것엔 어떻게든 군인을 보호하고 말겠다는 군의 고려가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웨스트윙 출연진

▲ 웨스트윙 출연진 ⓒ NBC

 
왜 우리 자주포엔 에어컨이 없을까

노르웨이를 비롯한 나라들이 에어컨이 있는 K9 자주포를 주문하는 것도 그런 인식이 밑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에어컨이 없는 모델로 예산을 아끼는 대신 군인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나은 환경을 마련해줘야 한다는 의지 말이다. 그런 사소한 결정에서 제 나라 군인을 대하는 국가의 자세가 읽히는 듯하여 나는 왠지 모르게 민망해지고 말았다.

<웨스트윙>의 주역은 민주당 행정부 인사들이다. 대통령과 그의 공보 참모들의 활약은 시즌을 가로질러 시청자를 민주주의의 중심부로 이끌어간다. 아론 소킨은 드라마 내내 민주당에게 호의적으로 각본을 써내려간다. 그러면서도 곳곳에서 그들이 모든 면에서 진보적이고 합리적이지는 못하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또 이들이 얼마나 쉽게 오만해지며, 이따금씩은 사람을 바라보지 않고 중요한 일을 결정한다는 사실도 내보인다.

이 드라마 속 백악관 직원들이 훌륭한 건 그들이 옳아서가 아니다. 훌륭함은 그들이 제 잘못을 인정하고 바로잡길 주저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그들의 정치가 시민과 국가를 향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서 어긋난 걸 알아차릴 때마다 언제고 방향타를 수정하길 주저하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이것이 세상을 떠난 대통령이 이 드라마 시사회를 청와대에서 수차례나 연 이유일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더 옳아서가 아니라 틀렸다는 걸 인정할 줄 알아서 더 나은 사람이 되어가는 걸지도 모른다. <웨스트윙>의 도나 모스가 그렇듯이 말이다.

미국 드라마를 대하며 무더위 속에서 복무하는 한국 군인들을 떠올리는 건 적잖이 민망한 일이다. 그들이 아직까지 에어컨 없는 자주포 안에서 복무하고 있다는 걸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50만원짜리 재떨이와 에어컨 없는 자주포의 상관관계 속에서 군인을 대하는 한국과 미국의 인식차가 그대로 묻어나고 있는 건 아닌가. 정말이지 이런 현실을 놔두고 우리가 스스로를 선진국이라고 불러서는 안 되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웨스트윙 NBC 아론 소킨 노무현 김성호의 씨네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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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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