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8.31 17:09최종 업데이트 22.09.21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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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가 SF를 친밀하게 느끼도록, 은밀하게 접근해 진입장벽을 슬그머니 무너뜨립니다. 이를 위해 SF 읽는 모습을 생활밀착형으로 전달합니다. [편집자말]
간혹 장르소설 세상에 살면 어떻게 될지 생각한다. 근대 유럽을 배경으로 삼는 판타지라면 위생 문제 때문에 괴로울 것 같다. 다른 판타지라면 혹시 휴지와 생리대는 있는지 물어보고 싶다. 좀비 바이러스가 창궐하는 세상이 되면 며칠 못 버티고 금방 죽고 말 것이다. 총은 없고, 둔기를 휘두르기에는 체력이 없다. 달리기도 느리다. 좀비가 쫓아오면 달리다가도 빠르게 포기할 자신이 있다. 호러 세상에 살기는 절대 싫다.

아픈 것도 귀신도 괴물도 싫다. 스릴러는 픽션으로 볼 때만 멋있다. 미스터리라면 분명히 경솔하게 굴다가 살해당하는 시체 2번 당첨이다. SF라면 좀 나을지도 모르겠지만, 디스토피아 세상에 살기는 또 싫다. 아니면 은하제국? 스페이스오페라? 시간여행? 아마도 평범한 시민 1로 살다가 폭발사고에 휘말리지 않을까. 싸움이 벌어지면 냉큼 내빼고 싶다. 슈퍼히어로가 거대한 힘을 지니고 거대한 책임을 지는 모습을 보면 손사래를 치게 된다. 아유, 됐어. 나는 소박하게 살래.

약간만 뛰어난 초인들

소박한, 소소한, 소규모의 것은 자꾸 소탈한, 소담한, 소심한 것으로 이어진다. 나는 드라마 <스타 트렉>이 한때 오프닝마다 읊던 "to boldly go"를 좋아한다. 말 그대로 '담대하게 나아갈' 것. 누구도 가보지 않은 곳을 향해서. 멋진 사람들은 담대하게 나아가 큼지막한 사건을 처리한다. 유능하고 배포 큰 사람을 보면 진심으로 존경스럽다.


한껏 닮고 싶어지는데, 동시에 괜히 겸연쩍어진다. 나는 만약 초능력을 얻는다면 그저 지각하지 않도록 텔레포트를 고르겠다고 공상하는 소시민이기 때문이다. 남의 못난 모습을 보면 눈살을 찌푸리는 쪼잔함도 갖췄다. 특히 혓바닥 긴 소인배를 흰 눈으로 본다. 요즘처럼 이기적인 걸 솔직하다고, 비열한 걸 현실적이라고 자부하는 모습을 보면 화가 난다. 아니, 사람이 그래도 염치는 있어야지!

이런 분노는 어느 정도 자기혐오에서 나온다. 까딱하면 똑같은 꼴이 되겠다는 위험을 느끼기 때문이다. 자신의 부족함을 정면으로 들여다보려면 다소 용기가 필요하다. 혹은 친구가 필요하다. 둘 다 청소년 소설의 단골 주제다. <소소하게 초인들이 모여서, 소초모>의 주인공은 뛰어난 능력을 지닌 청소년들이다. 문제는 '약간만' 뛰어나다는 점이다.
 

책 <소소하게 초인들이 모여서, 소초모> ⓒ 창비


현우는 고양이와 의사소통을 한다. 란주는 식물의 기억을 읽는다. 효석은 상대가 향하는 방향을 알아차린다. 율아는 기억력이 약간 좋다. 다들 전투와 거리가 멀다. 중력을 조종하거나 불을 뿜는 화려한 공격 능력에 비하면 소소하다.

그래서인지 모두 범국가 초능력 관리 본부(범초본)에서 10등급 판정을 받았다. 어중간하니 별 쓸모가 없다는 뜻이다. 학교 친구들도 뒤에서 속닥거린다. 쟤네 별거 아니라고. 소초모는 능력을 인정받고자 자기네 힘으로 최근 연달아 일어나는 실종사건을 해결하려고 한다.

반면 연휘는 활을 너무 잘 쏴서 초인이라는 의심을 받는다. 양궁부 부원들은 연휘가 사실 초인인데 아닌 척해서 대회에 출전하는 거라고 험담한다. 남들을 속여서 이기려 든다는 말이다. 그런 목적이 아니면 평소에 그렇게 과녁을 잘 맞히던 애가 하필 결정적인 순간에만 빗나가게 쏘았을 이유가 없다고.

애들은 연휘가 실수했을 가능성은 고려하지 않는다. 시합에 져서 분하고 원망스러우며, 연휘가 정말로 초인적으로 활을 잘 쏘기 때문이다. 소초모 친구들마저 연휘가 초인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연휘가 아니라고 부정해도 소용이 없다. 결국 연휘는 반쯤 자포자기해서 소초모와 같이 활동하기로 한다.

물론 이들은 투닥거리고 삐걱거린다. 설치류가 변이한 괴물 '라투스'들과 싸워야 하는데, 다들 한국의 평범한 학생이라 몸이 약하고 괴물이 무섭다. 그러다 보니 싸울수록 서로 부족한 점만 보이고, 서로가 원망스럽다. 나아가 소초모 회원 사이의 거짓말이 드러날 때는 서로에게 더욱 실망한다. 예를 들어 연휘에게는 왜 거짓말을 했냐는 비난이 쏟아진다. 연휘는 자기는 열심히 했는데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 속상하다.

다들 차분히 되짚다 보면 이해할 만한 일인데, 마음이 상하고 감정이 끓어올라 그럴 여유가 없다. 이때 인물이 어른스럽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청소년 소설의 장점이다. 물론 나이를 먹는다고 다 어른스러워지지는 않고, 나이를 덜 먹었다고 어른스럽지 못할 이유는 없다.

서툴고 정직한 쪽이 되고 싶다

그래도 감정을 정직하게 쏟아내는 일은 청소년에게 더 어울린다. 세상에 닳고 남 일에 무관심해진 사람들은 이리저리 변명하고 외면하곤 하기 때문이다. 소초모는 서툴고 뻣뻣하게 굴며 삐죽삐죽 어긋난다. 그리고 삐죽삐죽 자란다. 연휘는 자기도 배려가 없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다른 회원들도 자기가 고집을 부렸다고 인정한다.

소초모가 맞서는 악당은 이기적이고 비열한 어른이다. 자기합리화와 거짓말을 거듭하며 제 욕심을 채우는 사람이다. 뻔한 동기에 뻔한 정체를 갖춘 전형적인 인물이다. 그는 성장하지도, 사랑받지도 못한다. 자업자득이다. 반면 마음정리를 끝낸 소초모 아이들은 전투에 부쩍 익숙해진다.

각자의 장점을 살려 역할을 분담하고, 합을 맞춰 연계 공격을 펼친다. 소소한 능력으로는 그래야만 제대로 유효타를 날릴 수 있기 때문이다. 연대감도 한층 두터워진다. 소설은 익숙한 구도의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속편을 암시하는 약간의 어두컴컴함이 더해지긴 하지만.

책을 다 읽어도 여전히 소박하게 살고 싶다고는 생각한다. 괴물과 싸우긴 싫다. 하지만 변명하고 외면하는 사람이 되느니 서툴고 정직한 쪽이 되고 싶다. 설령 큼지막한 문제를 척척 해결하진 못하더라도, 그걸 쪼개고 쪼개 다른 사람들과 나눠질 수 있다면 내 몫 정도는 해내고 싶다.

이럴 땐 용기와 우정을 말하는 뻔한 이야기가 어른들에게도 충분히 도움이 된다. 사람은 그로 인해 성장한다는, 뻔한 희망을 뒷받침해주기 때문이다.


소소하게 초인들이 모여서, 소초모

권시우 (지은이), 창비(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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