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9.13 11:54최종 업데이트 22.09.13 14:26
  • 본문듣기
한국의 공론장은 다이내믹합니다. 매체도 많고, 의제도 다양하며 논의가 이뤄지는 속도도 빠릅니다. 하지만 많은 논의가 대안 모색 없이 종결됩니다. 소셜 코리아(https://socialkorea.org/)는 이런 상황을 바꿔 '대안 담론'을 주류화하고자 합니다. 구체적으로는 ▲근거에 기반한 문제 지적과 분석 ▲문제를 다루는 현 정책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거쳐 ▲실현 가능한 정의로운 대안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소셜 코리아는 재단법인 공공상생연대기금이 상생과 연대의 담론을 확산하고자 학계, 시민사회, 노동계를 비롯해 각계각층의 시민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열린 플랫폼입니다. 기사에 대한 의견 또는 기고 제안은 social.corea@gmail.com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편집자말]
최근 영국에서는 BBC에서 제작한 <셔우드(Sherwood)>라는 드라마가 인기를 끌었다. 2004년 노팅엄셔의 쇠락한 탄광 마을에서 실제 일어난 살인사건에서 영감을 얻은 드라마다. 줄거리를 따라가다 보면 시청자들은 곧 영국 역사상 가장 길었던 파업인 영국 광부 대파업 (1984~1985년)과 이를 중단하기 위한 마거릿 대처 정부의 정치적 술수에 대해 알게 된다.

처음에는 의아했다. 이미 드라마 초반부터 살인사건의 범인이 누구인지 알려져 있고, 수사 과정의 전개에도 스릴이 별로 없는 이 드라마가 어떻게 시청자의 눈길을 끌었을까. 넷플릭스와 같은 초국적 스튜디오에서 거대 자본을 들여 생산한 쟁쟁한 드라마들을 제치고 말이다. 해답은 드라마 후반 극중 인물이 나지막이 읊조리는 대사에 녹아 있다.


"대처 정부가 광부 대파업에서 승리한 후로 영국은 변했습니다. 영원히요."

영국에서 사회 정책을 공부한 나는 학생 시절 대처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이 지난 30~40년간 눈에 띄게 증가한 불평등의 단초를 어떻게 제공했는지 설명하는 영국 학자들의 연구를 수없이 접했다. <셔우드> 최종편 역시 광부 대파업 이후 쇠락한 탄광 마을에서 신자유주의 개혁의 패배자로 전락한 광부들과 자녀들의 희망이 어떻게 사라졌는지 보여준다.

불평등 콘텐츠가 뜨는 이유
 

BBC 드라마 <셔우드>의 한 장면 ⓒ BBC

 
이 드라마가 그려내는 암울하고도, 또 어떻게 보면 우리에게 이미 사뭇 익숙한 불평등이 대다수 시청자에게 커다란 공감대를 형성한 것이 인기의 이유가 아닐까. 이는 최근 몇 년간 아카데미상과 에미상을 수상한 <기생충>, <오징어 게임>과 같이 불평등이라는 조금 무거운 주제를 다룬 콘텐츠들이 세계적인 인기를 끈 것과  일맥상통한다.

선로를 벗어난 열차처럼 걷잡을 수 없이 증가하는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무언가 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이 공감한다. 그러나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견해가 다르거나, 뚜렷한 해결책이 있어도 그 실행이 만만치 않은 경우가 부지기수다.

정치경제학적 입장에서 사회정책을 연구하는 나는 늘 정치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여기서 정치란 사회 내 다른 세력 사이 힘의 관계를 말한다. 근본적으로 불평등을 줄이기 위해서는 사회 내 자본과 노동 사이 세력의 균형을 회복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자본과 노동 사이의 힘의 시소가 지난 30~40년간 탈규제의 바람을 타고 자본 쪽으로 엄청나게 기울어져 버렸다. 

노동의 힘을 보여주는 척도 중 하나인 노조 조직률은 전 세계적으로 하락하는 추세이다. 국제노동기구(ILO)에 따르면 세계 노조 조직률은 지난 몇 년 사이에도 계속 하락하여 2008년에 20.0%였던 것이 2019년에는 16.8%로 3.2%포인트나 떨어졌다. 한국은 10% 미만으로 떨어졌다가 문재인 정부를 거치면서 조금 회복되어 간신히 10%를 넘은 정도이다. 노조 조직이 가장 잘 된 나라 중 하나로 알려진 스웨덴에서조차도 2000년 81%라는 꽤 높은 수치에서 지금은 65%대로 떨어진 상태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점점 거세지는 불평등이라는 파도를 잠재우기 위해서는 노동자들 간의 연대의식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연대의식의 출발점은 가장 큰 공통분모를 찾는 것이다. 노동시장이 아무리 급변하고 다양해져도 노동자만큼 사회 구성원 대다수를 포함하는 공통분모를 가진 집단을 찾기는 힘들다. 아무리 시민사회가 발달한 선진국에서도 노조를 대신할 만한 대표성을 가진 시민사회 집단을 찾기 힘들다.
 

유최안 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조선하청지회 부지회장이 6월 22일,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 1도크 바닥에 가로세로 1미터 크기의 철판을 붙여 만든 공간 안에서 농성하고 있다. ⓒ 금속노조

 
그러나 아쉽게도 노동조합과 노동운동에 대한 일반인들의 인식이 그리 곱지만은 않은 것도 사실이다. 흔히 선진국이라 하는 OECD 국가들에서도 노동시장 탈규제화로 비정규직이 양산되면서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 불평등이 증가하는 양상이다. 이에 따라 정규직 중심의 노조가 비정규직을 끌어안기 위한 노력이 부족하다고 질타받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특히나 한국처럼 복잡한 하청구조가 만연한 나라에서, 그리고 세계 제1위의 생산 자동화로 그 어떤 산업국가보다 더 빨리 노동자들을 기계로 대체해온 나라에서 노동자들이 연대의식을 가지고 노동 약자를 끌어안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한국의 군부독재는 노조가 유럽처럼 정치세력으로 성장하는 것을 막기 위해 산업별 노조를 불법화하고 기업별 노조만을 허용했다. 이 유산은 아직까지도 한국의 노조들이 내 작업장 또는 내 회사를 넘어 더 넓게, 더 멀리 보며 노동자 연대의식을 형성하는 것을 너무나도 어렵게 하는 걸림돌로 남아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노조가 이를 극복하고 연대의식을 공고히 할 수 있을까? 그 핵심은 노조가 사회적 대화의 중요성을 깨닫고 이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자본과 정부와 한 테이블에 앉아 협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과 기업 단위의 파업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 사이에는 결과물의 크기에서도, 더 나아가서는 질에서도 너무나 큰 차이가 있다.

나에 대한 결정을 남이 내리는 현실

지금 한국의 조선산업이 겪고 있는 어려움을 바라보면 과거 영국과 현재 중국의 조선산업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한때 영국도 조선업 강국이었으나 한국과 같은 신흥공업국과의 경쟁에 밀려 쇠퇴했다. 과거의 영국처럼 현재의 한국은 중국의 부상으로 경쟁력을 높여야 하고 동시에 고용과 임금을 위협받는 노동자들을 보호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이런 산업이 어디 조선업뿐이겠는가. 이런 큰 난제는 일개 작업장이나 회사 수준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이의 해결을 위해서는 노동조합이 가장 높은 수준의 대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필요가 있다는 절실한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

지금 당장 사회적 대화 기구에 전면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부담스럽다면 산업별 노조 수준에서라도 업종별 위원회에 참여하여 이러한 난제들의 해결을 위한 협상에 나서야 한다. 실제로 산업 전환을 대비하기 위해 업종별 위원회에 참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노조 내부에서도 커지는 상황 아닌가.

당장 비정규직이나 영세기업 노동자를 대변하는 큰 걸음은 아니라 할지라도, 개별 기업을 넘어서 산업 수준에서 바라보는 넓고 먼 시야를 길러가야 한다. 그러다 보면 노동자 전체를 대변하는 더 큰 시야를 기르는 데 한 걸음 더 다가가게 되리라는 게 나의 전망이다.

대화를 거부하고 장외 투쟁만 추구할수록 대화의 기술과 협상력은 줄어든다. 나에게 영향을 미칠 결정을 남들이 내리고, 나는 이 결정에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하지 못하게 된다. 어찌 보면 지극히 상식적인 이런 깨달음이 노조 지도부에 절실히 필요한 때이다. 

 

이수현 / 영국 킹스컬리지 런던 대학교 부교수(소셜 코리아 운영위원) ⓒ 이수현

 

필자 소개 : 이 글을 쓴 이수현은 영국 킹스컬리지 런던 대학교(King's College London)에서 부교수로 정치경제학을 연구하며 가르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동아시아와 유럽이라는 굉장히 다른 근대화의 길을 걸어온 두 지역의 국가들이 공통적으로 당면한 복지국가와 노동시장 과제들을 어떻게 다르게 또는 비슷하게 해결하려고 노력하고 있는지를 비교 연구하고 있습니다. 또한 <소셜 코리아> 운영위원이기도 합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소셜 코리아>(https://socialkorea.org)에도 게재됐습니다. <소셜 코리아> 연재글과 다양한 소식을 매주 받아보시려면 뉴스레터를 신청해주세요. 구독신청 : https://socialkorea.stibee.com/subscribe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