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9.21 18:29최종 업데이트 22.09.21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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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마을 한 달 살기 자전거로 논 사이를 달리는 기분은 더없이 행복했다. 하지만, 시골에 계속 살기 위해서는 갖춰야 할 것이 많다. ⓒ 김나라

 
20대엔 '서울병'과 '외국병'으로 앓더니 몇 년 전부터는 시골앓이를 한다.

도로 소음 때문에 시골앓이가 정점에 이른 지난해 여름, 경주에 여행을 갔다가 한 현수막을 봤다. 예술인 한 달 살기 체험. 시에서 숙박비를 지원해주고 방문객은 체류하는 동안 경주시를 홍보하는 이주 독려 사업이었다. 옳다구나! 조용한 데서 글을 쓰며 한숨 돌리라는 하늘의 뜻 같았다.


한 달 살기 숙소로 어렵게 구한 민박집은 논밭이 펼쳐진 시골마을에 있었다. 지원 조건인 홍보 점수를 채우려 블로그 포스팅에 열을 올리다 보니 내 글을 쓰진 못했지만, 머무는 시간 자체로 시골살이에 갈급한 마음을 달랠 수 있었다. 황금물결 굽이치는 논두렁을 자전거로 달리고 개인마당에 누워 별을 볼 때는 호사스럽기까지 했다. 역시 나는 서울 쥐가 아니고 시골 쥐야. 정말로 시골로 이주해 버릴까?

하지만 현실적으론 의문이 들었다. 시골 동네로 이사 오더라도 월세를 내려면 근처에 아르바이트할 만한 곳 몇 군데는 있어야 하는 법이었다. 마을에 있는 전원주택 단지는 딴 세상 같고, 누가 빈집 하나 안 주나 하는 궁상스러운 생각을 했다.

뚜벅이인 내겐 대중교통도 중요하다. 한 달 살기를 하면서는 버스가 일찍 끊겨 막차를 놓칠 뻔하기도 했고, 자전거 도로가 정비돼 있지 않아 보도블럭이 심하게 무너진 인도 위를 달려야 했다. 사람 마음 간사하기도 하지. 한 달간 시골살이의 매력을 두루 느끼면서도 대도시의 장점을 동시에 실감했다.

포기하기 어려운 가성비

지방 중소도시에 살다가 부산에 온 지 6년째, 다시 이주를 고민한 지는 3년째다. 다니던 직장도 그만뒀고 반년 후 집 계약도 끝날 터인데, 막상 부산을 떠나려니 망설여진다. 완벽한 지역은 없는 걸 알면서 이러는 내가 서울 쥐도 시골 쥐도 아닌 박쥐인가 싶지만, 그럴 만한 이유는 있다.

내 병에 전문성을 지닌 주치의를 동네 병원에서 만나고, 다른 도시에 없는 특수치료를 받을 수 있다는 것. 내킬 때 전시회를 감상하고 상영관이 적은 영화도 손쉽게 보며 풍부한 예술적 자극을 받을 수 있는 것. 자전거를 타고 조금만 가면 도서관, 미술관, 공원 등 다양한 공공복지 서비스를 누릴 수 있는 건 빈곤한 예술인에게 큰 이점이다. 
 

도시 생활 근거리에서 누리는 다양한 문화적 혜택과 일자리에 대한 걱정이 도시를 떠나기 어렵게 한다. ⓒ 김나라

 
"비용 지불 능력이 적은 분들은 도시에서 한꺼번에 제공하는 인프라들을 적절히 사용할 때 부자들과 비슷한 수준의 도시 향유권을 얻게 된다."

EBS 다큐프라임 <도시예찬> 3부 '나는 도시인이다'에서 음성원 도시건축 전문 작가가 한 말이다. 도시에서는 많은 사람이 모여 살기에 기반 시설에 드는 비용을 함께 부담하는 공동구매가 가능하다는 뜻이다. 한편 공통점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 다양한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다는 점도 도시의 장점이다.

결정적으로 일자리 수의 차이를 무시하기 어렵다. 가끔 아르바이트를 하지만 일단은 프리랜서인 나와 달리, 함께 이사를 고민한 동거인에겐 일상과 생계 전체가 걸린 문제였다. 구직 애플리케이션에 올라온 전라북도 전체 일자리 수가 부산 해운대구의 일자리 수와 비슷하다는 걸 알았을 때는 둘 다 충격을 받았다.

사실 도시든 아니든 서울에서 먼 지역은 비슷한 처지다. 대부분 소멸의 길을 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통계청이 발표한 올해 7월 국내 시도별 인구이동 통계에 따르면 경남, 경북, 전북, 광주, 부산의 순유출은 -0.5%, 울산은 -0.9%다. 최근 부울경(부산·울산·경남)이라 불리는 거대 지역 역시 빠르게 인구가 감소하고 있다. 살고 싶은 지역은 둘째치고 살 수 있는 지역마저 사라져가는 느낌이 든다.

그래도 이런 시골이라면

만약 대도시가 아니라도 내게 맞는 일자리를 갖고 충분한 문화적 자극을 받으며 살 수 있다면 어떨까. 사실 마음에 둔 곳이 하나 있다. 고향인 전북 전주에 인접한 완주군이다. 불편한 대중교통 체계를 감수할 만큼 완주에 끌리는 이유가 있다.

완주군은 로컬푸드, 청년지원, 공동체문화도시, 귀농귀촌 등의 사업을 통해 지방 혁신 모범 사례로 자리잡았다. 예술과 공동체는 완주의 중요한 정체성이다. 역사와 문화에 기반해 콘텐츠를 선정하고 주민들이 주도하는 방식으로 문화예술 정책을 지속해왔다.

지난해 완주문화도시지원센터에서는 대표없는 회의, 완주문화민회, 시민문화배심원단, 문화현장주민기획단을 추진해 주민 누구나 문화 정책 수립부터 실행까지 의견을 개진할 수 있게 했다. 또한 우리동네 생활실험, 우리동네 문화공유공간, 메이드인공공을 통해 공동체의 문화활동 및 개인간 교류를 독려했다.

완주군이 발표한 '2020년 사회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서로서로 잘 알고 지내는 편이다", "어려운 일이 있으면 서로 돕는다" 등 공동체 의식을 조사한 질문의 긍정 응답이 전북 평균보다 최고 10%p 높았다. 공동체 문화도시라고 할 만하다.
 

전북 완주군 삼례문화예술촌 1920년대 일제가 수탈에 이용한 양곡 창고를 활용해 전시, 공연, 체험 등 복합 문화예술 활동을 위한 공간으로 조성했다. ⓒ 김나라

 

청년거점공간 '완충지대' 전북 완주의 청년거점공간 중 삼례에 위치한 곳. SF공유책장, 공유주방, 회의실, 휴식공간, 바테이블,, 컴퓨터 등을 갖추고 있다. 정석 교수는 책 <천천히 재생>에서 지방 재생의 핵심으로 자생과 상생을 꼽는다. 그는 지역을 어느 부분을 죽이고선 살아남을 수 없는 생명체, 유기체로 본다. 지역 간 소통과 교류는 물론 지역 구성원들 사이의 연결이 중요한 이유다. ⓒ 청년메카완주 홈페이지


청년정책도 면밀하다. 청년전담팀을 개설해 청년기본조례를 제정하고 매년 프로젝트를 개선하며, 청년창업공동체, 청년쉐어하우스, 청년정책아카데미, 청년마을학교 등 일자리, 주거, 문화, 복지를 아우르는 매우 다양한 사업을 진행해 왔다. 청년이 소비되는 것이 아닌 정주하는 환경을 만들고, 사회적경제 기반시설과 연계해 대안적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이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완주군의 전체 인구는 지난해 후반기에, 청년 인구는 올 4월에 증가세로 돌아섰다. 공단 활성화도 원인 중 하나지만, 청년층 인구 증가에는 귀농귀촌 활성화 정책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된다.

지역에 오래 머무는 사람이 많아지려면 정신적 가치가 있어야 함을 완주가 보여준다. 모든 조건에서 훌륭하진 않아도 그곳만의 고유성을 누린다는 자부심, 내 삶이 다른 구성원의 삶과 어우러질 때의 소속감 말이다. 이 가치들은 지역이 겪는 문제들을 해결하는 자원이 된다. 정부와 지자체의 사업이 한시적 행사에 그치지 않고 주민들이 고민하며 만드는 '생활'이 될 때 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나는 어디에 살아야 할까? 가진 게 까다로움뿐인 내겐 여전히 어려운 문제지만, '삶터 되살림'이라는 본질에 충실한 지방 재생 사업들이 이어진다면, 십수 년 후에는 어디를 고를까 하는 행복한 고민을 할 수 있지 않을까.

* 완주군의 청년 정책은 '청년메카 완주'(https://youth.wanju.go.kr/index.wanju),
문화지원 사업은
'완주문화도시지원센터'(https://www.wanjuculture.com/)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참고도서]
정석, <천천히 재생>, 메디치미디어, 2019
김진애, <도시의 숲에서 인간을 발견하다>, 다산초당,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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