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9.22 12:18최종 업데이트 22.09.22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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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수하는 한일 정상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21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한 컨퍼런스 빌딩에서 한일 정상 약식회담에 앞서 인사하고 있다. ⓒ 연합뉴스


한국 시각으로 20일 한일 외교장관회담이 열린 데 이어, 22일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총리의 한일 정상회담이 뉴욕에서 열렸다. 양국 최대 현안인 강제징용 문제가 20일 외교장관회담에 이어 22일 정상회담에서도 거론됐다. 양국 정상은 이 문제와 관련해 양국 관계를 개선할 필요성에 공감하고 대화를 계속해 나가기로 했다.

정상회담을 계기로 대화의 물꼬가 트이게 됐고 양국 협의에 속도가 붙을 수 있게 됐다는 점에서 정상회담의 의의를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이 문제의 현 수준을 보여주는 것은 정상회담 이틀 전에 열린 외교장관회담이었다.


박진 외교부 장관을 만난 하야시 요시마사 외무대신은 20일 회담에서 종래의 입장을 되풀이했다. 일본 외무성 홈페이지는 하야시 대신이 "일본 측의 일관된 입장"을 표시했다고 소개했다.

한국 외교부 보도자료는 "박 장관은 과거사 현안 관련 바람직한 해결 방안을 조속히 도출하기 위해 진정성을 가지고 함께 노력해 나가자고 하였다"고 설명했다. '함께 노력하자'는 박진 외교부 장관의 제안에 대해 하야시 대신이 '일본 측의 일관된 입장'으로 대응했던 것이다.

'일본 측의 일관된 입장'은 한국이 식민지배에 대한 일본의 행동을 촉구할 때 일본 정부가 자주 보여주는 태도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문제가 이미 다 끝났다', '더 이상 할 것이 없다'라는 방침을 고수하는 일본 정부의 태도를 지칭할 때 사용된다.

'일본 측의 일관된 입장'은 강제징용(강제동원) 문제에서는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에 의해 문제가 다 해결됐다는 입장이고, 위안부 문제에서는 청구권협정과 더불어 2015년 한일 위안부합의에 의해 문제가 종결됐다는 입장이다.

이번 뉴욕 회담의 의제 중 하나는 강제징용 문제였다. 따라서 하야시 대신이 밝힌 '일본 측의 일관된 입장'은 1965년 협정에 의해 강제징용 문제가 다 끝났다는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함께 노력하자'는 박 장관의 메시지가 어떤 것이었나를 살펴보면, 강제징용 문제에 관한 '일본 측의 일관된 입장'이 좀 더 명료히 드러난다. 그동안 박 장관과 외교부가 밝힌 입장 표명이나 양국의 언론보도를 종합하면, 박 장관이 촉구한 '일본의 노력'은 배상에 관한 것은 아니다.

윤석열 정부 내에서 논의되는 강제징용 해법은 미쓰비시나 일본제철 같은 전범기업들이 피해자들에게 배상하도록 만드는 방안이 아니다. 아직 최종 입장이 정리된 것은 아니지만, 전범기업들에 배상책임을 부과하지 않는 방향으로 윤 정부는 움직이고 있다.

외교부 민관협의회를 거치면서 부각된 것도 전범기업 이외의 제3자들이 기금을 조성하고 제3의 재단이 피해자들에게 지급하는 방안이다. 지난 6일 자 <니혼게이자이신문> 등에 보도됐듯이 한국 행정안전부 산하의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같은 기구가 전범기업과 일본 정부를 대신해 피해자들에게 금전을 지급하는 방안이 한국 정부 내에서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다.

윤석열 정부의 희망 사항
 

박진 외교부 장관(오른쪽)과 하야시 요시마사 일본 외무상이 19일(현지시간) 오후 맨해튼의 한 호텔에서 열린 한일 외교자관 회담에서 인사하고 있다. ⓒ 연합뉴스

 
이런 상황이기 때문에, 외교부 장관이 일본 외무대신에게 건넨 '함께 노력하자'는 제안은 배상 문제와는 거리가 멀다. 이 점은 한국 외교부 고위인사의 말을 인용해 '일본 기업의 사과·배상을 요구하기는 어렵다고 본다'는 말로 한국 정부 분위기를 소개한 지난 7일 자 <지지통신> 보도에서도 나타난다.

그렇기 때문에 박 장관이 일본에 촉구한 노력은 지금 단계에서는 일본 정부의 사과 표명이 될 수밖에 없다. '일본 정부와 전범기업'이 아니라 '일본 정부'가 사과하도록 유도하는 쪽으로 윤 정부가 움직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위 <지지통신> 기사에도 윤 정부의 희망 사항이 '일본 정부의 사과 표명'이나 '김대중·오부치선언의 재확인'이라는 점이 언급됐다. 일본 정부의 사과 표명을 받아내든가, 그게 여의치 않으면 식민지배에 대한 사과 표명을 담은 김·오 선언의 유효성을 재확인하도록 하든가 하는 방향을 윤 정부가 추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박진 장관의 발언을 들은 하야시 대신이 '일본 측의 일관된 입장'을 표시했다는 외무성 발표는 일본 정부가 강제징용 문제에 대해 그 같은 사과 표명마저도 할 생각이 없음을 반영한다. 1965년 협정으로 다 끝났으므로 사과도 할 필요가 없는 종전 입장을 반복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1965년 협정은 강제징용·위안부 문제와 무관했다. 식민지 시기에 발생한 한일 간의 일반 청구권 문제를 다룬 협정에 불과했다. 그런 협정을 또다시 거론하면서 하야시 대신이 '다 끝났다'는 입장을 견지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윤석열 정부가 설령 사과를 받아낸다 해도, 그것이 갈등을 감소시키기보다는 오히려 확대시킬 수도 있다는 점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다. 윤 정부 입장에서는 '배상을 받아내지 못해도 사과 표명 정도만 받아내도 외교적 성과가 될 수 있지 않나' 하는 판단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역대 일본 정부의 사과 패턴을 살펴보면, 그것이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다는 우려를 갖게 된다.

1993년 고노담화는 위안부 강제연행과 그 불법성을 시인하면서도 피해자들의 손해를 복구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같은 잘못을 절대 반복하지 않겠다"며 미래지향적인 결의를 표명했을 뿐이다. 이미 저질러진 잘못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는 언급하지 않았다.

위안부 강제연행은 길 가다가 남의 발을 밟는 정도의 잘못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인생을 망가트리는 잘못이었다. 그런 범죄를 범해놓고도 피해 복구에 관한 언급이 없었다. 그냥 말뿐인 사과였다.

패전 50주년에 맞춘 1995년 무라야마 담화 역시 피해 복구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미래에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다짐했을 뿐이다.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의 이 담화는 누구에게 사과하는지도 불분명했다. "아시아의 여러 나라의 사람들에게" 하는 불특정 다수를 향한 사과였다. 한국인들에게 하는 사과인지, 중국인들에게 하는 사과인지가 모호했다.

한국을 불쾌하게 하는 사과
 

2015년 8월 14일 당시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도쿄 총리관저에서 일본의 전후 70년에 관한 역사인식을 반영한 담화(일명 아베 담화)를 발표하고 있다. ⓒ 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과 박진 외교부 장관이 '한일관계가 가장 좋았던 시절'로 손꼽는 1998년 김대중·오부치선언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 선언은 "한국 국민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안겨주었다"며 사과의 대상이 한국 국민들임을 명시했지만, 피해 복구에 관해서는 입을 열지 않았다. "통절한 반성"을 한다고만 했을 뿐이다.

패전 60주년에 즈음한 2005년 고이즈미 담화는 사과 대상이 불투명하고 피해 복구도 언급되지 않았다. 거기다가 사과 표명하기 전에 침략전쟁을 합리화하는 발언을 먼저 언급했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평화와 번영은 전쟁으로 어쩔 수 없이 목숨을 잃으신 고귀한 희생의 위에 있음을 생각"한다는 등등의 표현이 있었다. 침략전쟁을 '고귀한 희생'으로 미화한 뒤에 사과 입장을 표시했다. 피해자들이 아니라 일본 극우세력을 의식하면서 준비한 담화라고 할 수 있다.

민주당 내각 때인 2010년에 나온 간 나오토 총리의 '간 담화'는 한국에 관한 담화인데도 사과를 밝히는 대목에 한국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 식민지 지배가 가져온 다대한 손해와 고통에 대하여, 이에 다시금 통절한 반성과 진심 어린 사죄의 마음을 표명"한다고 했을 뿐이다.

패전 70주년에 나온 2015년 아베 담화는 상당히 황당하다는 느낌을 주었다. 일제 침략전쟁이 대공황 때문에 발생한 부득이한 일이었다고 합리화한 뒤 이상한 방식으로 사과 입장을 표명했다. '사과한다'가 아니라 '사과했다'라는 표현을 썼다. "일본은 지난 대전에서의 행동에 대해 거듭 통절한 반성과 진심 어린 사죄의 마음을 표명해왔습니다"라고 아베 신조는 천명했다.

그는 그해 12월 한일 위안부합의에 즈음한 사과 표명도 이상한 방식으로 처리했다. 공식 성명 대신 전화 통화를 선택했다. 박근혜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사죄와 반성의 마음을 표명한다"고 말했다. 이 사과에서도 피해 복구에 관한 의지 표명은 없었다.

그나마 그 사과도 이틀 뒤 <산케이신문> 보도에 의해 사실상 철회됐다. 아베 신조가 측근들에게 했다는 "어제 일로 모두 끝이니 더 이상 사죄하지 않는다"라는 발언이 보도됐다. 하기 싫은 사과를 억지로 했다는 것을 그런 방식으로 표시한 셈이다. 더 황당한 것은 박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사과할 때도 '이게 끝입니다'라는 취지의 언급을 덧붙였다는 점이다.

이 같은 종래의 행태에서 나타나듯이 일본은 이제껏 한 번도 제대로 사과한 적이 없다. 누구에게 사과하는지 불분명하거나 사과 표명 문구 앞에 침략전쟁을 합리화하는 문구를 배치했다. 결정적으로, 피해 복구에 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말뿐인 사과였고 건성으로 하는 사과였다.

그동안 식민지배 문제 해결이 답보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올바른 사과가 한 번도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은 '왜 자꾸만 사과를 요구하느냐?'고 하지만, 한국을 불쾌하게 하는 사과가 문제를 더 악화시켰다.

이 같은 일본의 사과 패턴을 고려하면, '일관된 입장'을 고수하는 일본 정부를 설득해 윤석열 정부가 사과를 받아낸다 해도 그것이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문제를 악화시킬 가능성이 있다. 22일 한일 정상회담으로 인해 보다 많은 대화가 가능하게 되긴 했지만, 일본이 종래 입장을 고수하는 상황에서는 제대로 된 사과 표명이 나오기가 쉽지 않다.

윤석열 정부는 사과의 공동 주체인 일본 정부와 전범기업 중에서 전범기업을 빼놓는 방향으로 논의를 진행시키고 있는 데다가 가해자의 직접 배상을 배제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 정부 사과문에 피해 복구 문제가 거론될 가능성은 극히 낮다. 알맹이 없는 이런 사과가 되풀이된다면 한국 국민들의 분노도 그만큼 배가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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