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0.07 10:37최종 업데이트 22.10.07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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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래드 피트와 에드워드 노턴 세기말에 두 오빠는 시대의 아이콘이었다 ⓒ 21세기 폭스


"유명인 중에 붙고 싶은 놈 있어?"
"살아 있는 놈들 중에?"
"아니, 죽은 놈도 포함해서."
"링컨! 키 크고 마르면 깡이 세지."
"그럼 나는 간디로 할게."


싸움에는 눈곱만치도 관심이 없는데 데이빗 핀처 감독이 연출한 영화 <파이트 클럽>을 본 건 주연 배우들 때문이었다. 지금에야 한 명은 가정폭력범(브래드 피트)으로 밝혀졌고 나머지 한 명은 조용히 늙었지만(에드워드 노턴) 당시에 이 두 오빠는 시대의 아이콘이라 불릴 정도로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영화는 기대 이상이었다. 척 팔라닉의 원작 소설까지 구해서 읽을 정도로(제발 소설은 읽지 마시라) 재미있었고 그 바람에 태어나 처음으로 싸움에 관한 호기심이 싹텄다. 만약 이 영화의 설정대로 지루한 일상에 싸움이라는 자극이 끼어들면 어떻게 될까? 도파민 중독자들이 매일 밤 피, 흉터, 고통을 얻으면서도 제 발로 파이트 클럽에 다시 찾아가는 걸 보면서 싸움이 주는 쾌감과 전율이 얼마나 강렬한지 알고 싶었다.

시간이 흘러서 주짓수 블루벨트를 받던 무렵, 나는 여전히 알고 싶었다. 그러나 이때의 호기심은 비디오테이프로 <파이트 클럽>을 보던, 이제 막 성인이 됐던 시절과 두 가지 면에서 차이가 있었다. 하나는 주짓수를 배웠으니 이전보다 싸움에 관한 구체적인 이해가 쌓였다는 거고 나머지 하나는 이 호기심이 비단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거였다. 

나의 주짓수 자매들, 낮 동안 멀쩡하게 살아가는 우리는 밤에 모여 술을 마시며 십 대 남자애들처럼 싸움에 집착했다. 격투기 때문에 테스토스테론이 과도하게 분비된 탓일까? 싸움을 향한 우리의 열망은 방향성을 갖지 못한 채로 술집 한구석에서 마구 분출되며 흩어지고 있었다. 그 모임은 '가슴 성형 견적'과 '사람을 때리면 소위 깽값을 얼마나 물어줘야 하는지?'처럼 도무지 어울릴 수 없는 화제가 한꺼번에 도마에 오르는 기이한 구석이 있었다.

그러다가 우리에게는 시청각 교육이 필요하다는 데로 결론이 모였다. 마침 한국의 종합격투기 단체라는 '엔젤스파이팅'의 자선대회가 열렸고 우리는 그곳으로 몰려갔다. 누구를 응원할지 알 수 없었다. 누가 출전하는지도 몰랐으니까. 술집에서 분출하던 열망이 눈앞에서 펼쳐질 거라는 사실에 흥분해서 다른 건 중요하지 않았다.

어두운 체육관 내부는 현란한 조명으로 어지럽게 번쩍거렸다. 박진감 넘치는 음악과 함께 이 시끌벅적한 이벤트에 돈을 댄 중요한 사람들이 소개되는데 특이하고 재미있는 인간 군상을 구경하면서 기대감이 마구 증폭됐다. 아무리 봐도 밤의 제왕쯤 될 것 같은 여러 대표님과 회장님(포마드 스타일로 머리를 넘기고 드레시한 수트에 행거칩까지 꽂은)이 이름에 불릴 때마다 일어나서 상체를 구십 도로 숙이며 깍듯하게 인사했다. 또 놀랍게도 심사위원 가운데 법복을 입은 스님도 껴있었다. 

초반에는 아마추어로 분류된 선수들이 나와서 한바탕 신나게 싸웠다. 여성 파이터도 있었는데 여성들이 싸우는 광경을 보는 것만으로도 감격해서 특별히 더 크게 환호했다. 그리고 잠깐 쉬어가는 타임에 캔맥주를 마시며, 놀이공원에 처음 온 아이들처럼 사진도 찍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할 말을 잃었다
 

우리는 방탕한 로마인들처럼 소리 질렀다. ⓒ 게티이미지뱅크


바로 그때 난데없이 조명이 꺼지더니 '마법의 성'처럼 서정적인 음악의 전주가 흘렀다. 그렇지 않아도 '엔젤'과 '파이팅'이 도대체 무슨 연관이 있을까 했는데 알고 보니 이 단체는 기부를 목적으로 만든 자선단체였다. 대회 수익금을 난치병 아동의 수술과 치료를 위해서 쓴다나? 그래서 이 짤막한 뮤지컬은 병마와 싸우는 어린이를 응원하는, 지극히 건전하고 공익적인 메시지를 주고 막을 내렸다. 천사의 손길에 희망을 얻은 아이들이 무대 밖으로 힘차게 달려갔다. 

거기까지 하면 좋으련만. 갑자기 삼바 페스티벌에나 어울릴 것 같은 라틴 음악이 울려 퍼지고 조명이 극도로 화려해지더니 여러 인종과 연령대로 구성된 여성들이 퍼레이드걸 같은 차림새로 나타났다. 여기저기서 열렬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종합격투기와 난치병 아동과 헐벗은 여성의 이질적인 조합에 우리는 모두 할 말을 잃었다. 

이게 뭘까? 도대체 뭘 의도하는 걸까? 그러다가 이 이벤트의 본질이 마치 내장탕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하니 퍼뜩 납득이 됐다. 온갖 내장과 채소를 넣고 끓인 국밥 한 그릇으로 간밤의 숙취를 해소하고 단백질도 보충하듯 아저씨들이 좋아하는 모든 걸 투박하게 섞어 놓은 거대한 잡탕. 신나는 싸움 구경도 하고 좋은 일도 하고 미녀로 눈요기도 하는. 

아저씨들이 열광하는 기호의 잡탕에 몸을 담갔다고 생각하니까 썩 유쾌하진 않지만 그래도 그날 밤의 일은 주짓수 자매들과 나눈 소중한 추억으로 남았다. 당시에 우리가 배우던 기술인 암락이나 초크로 순식간에 승패가 결정되고 게임을 끝내는 걸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이 너무 즐거웠다. 마치 막 한글을 배운 아이가 거리의 간판만 봐도 반가운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승패의 순간마다 콜로세움을 가득 채운 방탕한 로마인들처럼 소리 질렀다. "때려! 더 때려!"

집으로 오는 길에 브래드 피트와 에드워드 노턴처럼 유명인 가운데 누구와 싸우면 좋을지 고민했다. 그날 밤 가장 싸워 보고 싶은 유명인은 다름 아닌 푸틴이었다(몇 년 뒤에 일어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예감한 걸까?). 무려 러시아 출신인데다가 이미 온몸으로 싸움꾼의 아우라를 풍기는 푸틴을 이길 수 없겠지. 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이기면 너무 자랑스러워서 동네방네 떠들 수 있을 텐데!

잠들기 직전까지 싸움에 몰두해서인지 그날 밤이 새도록 싸우는 꿈을 꿨다. 상대는 약간 젊어진 아버지였다. 나는 지금까지 배운 기술을 전부 동원해서 아버지를 공격했다. 어찌 된 일인지 그는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사실 나는 그가 싸움을 잘하는지 어떤지도 모른다.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고함을 지르는 모습은 수도 없이 봤지만 누군가와 드잡이하는 건 본 적이 없다.

이 황당은 꿈은 뭔가 싶다가 따지고 보면 아버지는 우리 집의 푸틴이다. 장신에, 강퍅하고, 아무 명분도 없이 폭주해서 모두의 미움을 사는 독재자. 어릴 때도 싸울 줄 알았다면 그를 암락으로 제압하는 건데. 하긴 앞날은 누구도 알 수 없으니, 어쩌면 그 꿈은 예지몽일지도 모른다. (관련 기사 : 아버지가 엄마를 때렸다, 순간 내 입에서 나온 말)
덧붙이는 글 브런치에도 게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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