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기간, 한국 대중가요를 선곡해 들려주는 라디오 음악방송 작가로 일했습니다. 지금도 음악은 잠든 서정성을 깨워준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날에 맞춤한 음악과 사연을 통해 하루치의 서정을 깨워드리고 싶습니다.[편집자말]
 아이에게 보내는 물건과 함께 손글씨로 쓴 짧은 편지도 동봉했다.

아이에게 보내는 물건과 함께 손글씨로 쓴 짧은 편지도 동봉했다. ⓒ pixabay

 
아침저녁으로는 너무 추워져서 이불을 한껏 끌어당기게 되는 이즈음이다. 일교차가 커 옷을 입기에 애매해진 계절인 데다 서울은 남쪽에 위치한 고향보다 계절이 더 빠르고 실감 나게 다가온다는 아이의 말에, 서둘러 따뜻한 옷가지 몇을 챙겨 우체국으로 향했다. 

요즘 같은 세상엔 집에서 가만히 앉아 편리하게 택배를 이용할 수도 있지만 이상하게도 아이에게 보낼 물건들이 생기면 우체국으로 직접 향하는 것이 나의 불문율이라면 불문율이다. 여기엔 어떤 거창한 뜻이 담겨 있거나 계획이 있는 것은 아니고 '우체국'이라는 공간이 주는 아련함, 혹은 애틋함, 단지 그 때문이다.

막 고등학교에 입학한 무렵으로 기억된다. 문학소녀를 꿈꾸던 내게 국어시간, 교과서를 통해 배우는 시들과 오빠가 용돈을 아껴가며 사온 시집에서 만나는 시어들은 놀라움과 환희의 연속이었다. 어쩌면 시인들은 이렇게 말과 감정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조합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가에 대한 찬탄도 매번 이어졌었고.

그해 가을 시화전을 준비하며 또 한 편의 인생 시를 만나게 되었는데, 이 시로 말미암아 '우체국'은 이후 내게 사랑의 장소, 혹은 아름다운 만남의 장소, 간혹은 마음이 쓸쓸해질 때 들르고 싶은 고유의 장소가 되어버린 것이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 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더 의지 삼고 피어 헝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방울 연련 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유치환 시 (행복)


아마도 우체국 이야기가 나올 때부터 많은 분들이 짐작하셨으리라, 누군가를 사랑하고 아끼고 그리워하는 일을 이토록 절절하면서도 간결하게 표현해낸 시는 바로 이 시 '행복'일 것이라고. '행복'을 읽고 있으면 오래 멈추고 있던 '손 편지'를 쓰고픈 마음이 절로 들고, 그것이 까마득한 일일지라도 그리워했던 누군가를 수줍게 떠올리게도 된다. 진정한 '사랑'의 의미, 즉  '사랑하지만 함께 할 수 없는 비극' 마저도 '행복'으로 가슴에 아로새기는 시인의 삶이 왠지 쓸쓸하면서도 아름다운 영화의 엔딩 같아 언젠가는 몰래 눈물을 훔친 적도 있었다.

'가을 우체국 앞에서'의 온기
 
 윤도현의 <가을 우체국 앞에서>가 수록된 앨범.

윤도현의 <가을 우체국 앞에서>가 수록된 앨범. ⓒ (주)엔에이치엔벅스

 
어쩌면 이 시를 읽고 영감을 떠올린 것일까, 이 시가 지닌 서정적 고요함을 그대로 입은 노래 '가을 우체국 앞에서'의 가사는 마치 누군가가 원고지에 끄적거려 놓은 한 편의 습작시로 다가옴이다. 
                                                                       
 가을 우체국 앞에서 그대를 기다리다
 노오란 은행잎들이 바람에 날려가고
 지나는 사람들 같이 저 멀리 가는걸 보네
 세상에 아름다운 것들이 얼마나 오래 남을까
 한여름 소나기 쏟아져도 굳세게 버틴 꽃들과
 지난겨울 눈보라에도 우뚝 서있는 나무들같이
 하늘 아래 모든 것이 저 홀로 설 수 있을까
 가을 우체국 앞에서 그대를 기다리다
 우연한 생각에 빠져 날 저물도록 몰랐네
 세상에 아름다운 것들이 얼마나 오래 남을까
 한여름 소나기 쏟아져도 굳세게 버틴 꽃들과
 지난겨울 눈보라에도 우뚝 서있는 나무들같이
 하늘 아래 모든 것이 저 홀로 설 수 있을까
 가을 우체국 앞에서 그대를 기다리다
 우연한 생각에 빠져 날 저물도록 몰랐네
 날 저물도록 몰랐네 /윤도현 (가을 우체국 앞에서) 가사


'가을 우체국 앞에서'는 1994년 겨울에 발매된 윤도현의 데뷔 앨범에 실린 곡이다. 개인적으로는 윤도현의 목소리로 불린 모든 노래들 중에 가장 따스한 곡이라는 생각을 한다. '너를 보내고'나 '사랑 two' 같은 초기의 명곡들 속에서도 차별화되는 온기를 가진 노래여서 가을이면 즐겨 선곡을 하곤 했다.

가사를 자분자분 따라가다 보면 큰 은행나무가 서 있는 어느 시골 우체국 앞 벤치에 앉아 있는 한 청년이 떠오른다. 계절의 흐름에 몸을 싣고 흩날리는 노란 은행 잎들을 보는 그의 시선에, 푸른 바다와 에메랄드 빛 하늘이 바라다보이는 우체국에 앉아 사랑하는 이에게 편지를 쓰곤 하던 유치환 시인이 자연스레 오버랩되는 것이다.

청년은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그대'를 하염없이 기다리며 오고 가는 사람들을 통해 인생의 거대한 순환을 각성하며 그 순간, 어쩌면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라는 문장을 혹 떠올리진 않았을까. 그리고 기다리는 '그대'가 오지 않아도 괜찮을 거라 스스로를 위로하였을지도.

시와 노랫말은 이렇게 닮아 있다. 전혀 다른 언어로 조합되었지만 그려내고 있는 감정과 다가오는 의미는 유사하다. 그래서 전달하고자 하는 바가 잘 배합된 가사를 펼쳐 읽다 보면 '시'를 읽을 때의 감동에 절대 뒤지지 않는 뜨거운 무언가를 느끼곤 하는 것이다. 물론, 가사를 듣는 이에게 전달하는 메신저로서의 가수 몫도 상당하다. 그런 기준으로 본다면 우리는 이 '가을 우체국 앞에서'를 통해 가을이 가진 특유의 계절성을 충분히 느끼고 있으니 윤도현은 십분 성공한 셈일 테다.

아이에게 보내는 물건과 함께 손글씨로 쓴 짧은 편지도 동봉했다. 예쁜 편지지는 아니나 쓰다 보면 자꾸 형식적이 돼 가는 문자나 SNS상의 안부보다는 아이에게 전해지는 마음이 한결 따뜻하리라 믿는다. 그리고 말미엔 '가을 우체국 앞에서'를 들으면 오늘도 소녀처럼 설레는 엄마가' 라고 덧붙여 본다. 
덧붙이는 글 기자의 개인 브런치에도 함께 게재됩니다
윤도현 가을노래 좋은노래 가을 우체국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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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음악방송작가로 오랜시간 글을 썼습니다.방송글을 모아 독립출간 했고, 아포리즘과 시, 음악, 영화에 관심이 많습니다. 살아가는 소소한 이야기에 눈과 귀를 활짝 열어두는 것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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