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0.20 05:24최종 업데이트 22.10.20 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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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이 14일 오전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출근길 기자들과 질의응답을 마친 뒤 집무실로 향하고 있다. ⓒ 연합뉴스


우린 아무래도, 망한 것 같다. 도처가 폐허다. 총체적 난국이란 말은 마치 오늘 같은 시절을 대비하여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뭐만 잘못하면 다 정부 탓을 하는 사람들도 아니꼽지만, 작금의 정부는 도무지 탓을 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다. 삽질도 정도껏 해야지, 정도껏. 대통령은 '미안, 카메라 있는 줄도 모르고 욕을 해버렸네'라고 사과했으면 지나갔을 일을 질질 끄느라 '외교 참사'라는 말이 나올 지경까지 사태를 몰고 갔고, 자기를 놀리는 그림 하나에 길길이 날뛰는 소인배다.


정부의 인사는 줄줄이 망해서 정부 출범 6개월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 내각 구성도 하지 못했다. 멀쩡한 청와대 놔두고 굳이 차 막히는 용산으로 집무실을 옮겨서는 돈은 돈대로 쓰질 않나, 자기들 욕먹는 건 다 언론 탓이라며 방송국 앞에서 시위도 한다. 정도껏 해야지, 정도껏. 좀 과격한 표현일 수 있지만, 이 정부는 아무래도 출범 6개월 만에 망한 것 같다.

정부가 이 난리를 피우고 있는데 언론은 뭘 하고 있나. 어느 언론사는 이 정부 편들기 바쁘고 어느 언론사는 이전 정부 편들기 바쁘다. 각자의 독자들은 서로의 언론사를 '기레기'라고 부르느라 정신없다.

그러는 새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저널리즘'은 실종됐다. 스토킹을 밀착 취재라고 부르고, 벌건 대낮에 휘두른 폭력을 응징 취재라고, 음모론을 합리적 의심이라 부른다. 언론인들은 '우린 유튜브만 봐'라고 말하며 유튜브 렉카를 언론이라 여기는 사람들을 통탄하지만, 사실 그건 다 자초한 일이다.

(이 글이 실리는 매체를 포함하여) 어느 언론사가 '우리는 정론지'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쓰다 보니 문득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오늘날 저널리즘의 요체는 뻔뻔함일 수도 있겠다는 우려가 드네.) 유튜브 렉카보다도 신뢰받지 못하는 언론, 정론지 하나 없는 언론이라니. 한국의 언론은 아무래도 망한 게 분명하다.

와중에 신난 건 '자본'이다. 재벌 기업과 그 밑의 마름들. 사람이 죽은 빵 공장에서 빵을 만들어 파는 사람들, 직원들에게 자사주를 판매해놓고 자기들은 수천억 수익 챙겨 도망가는 사람들, 사람을 녹여 쇳물을 만드는 사람들, 안전하게 일하고 싶어 노조를 만들었더니 직장을 폐쇄하는 사람들, 거대한 건물을 짓겠다고 사람을 불태워 죽인 사람들, 걔네들은 안 망했다. 하지만 우린 걔네가 아니니까. 걔네를 우리라고 해 줄 수도 없고.

사실 놀랍지만은 않은 일이다. 생각해보면 이 나라 정부는 원래 망해 있었다. 군홧발로 청와대에 쳐들어가서 체육관에서 대통령을 뽑고, 그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총으로 쏴 죽이던 정부가 이 나라 정부였다.

그런 정부를 옹호하고 미화하다 못해 찬양까지 하던 것이 이 나라의 언론이었고, 그런 정부와 그런 언론에 돈을 주고 자기들이 하는 온갖 나쁜 짓, 그러니까 탈세나 밀수나 노동착취나 부정축재를 눈감아 달라고 한 것이 이 나라의 자본이었다. 우리는 원래 망해 있긴 했다. 그래도 우리는 어떤 희망 같은 것을 만들어 왔다(찾은 것이 아니라). 그리고 우리가 어쩌면 진짜로 망했을지도 모르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우리는 망했다
 

지난 5월 26일 정의당 여영국 공동상임선대위원장, 배진교 공동상임선대위원장, 이은주 공동선대위원장과 의원 및 지방선거 출마 후보들이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중앙선대위 특별기자회견을 열고 지지를 호소하는 인사를 하고 있다. ⓒ 국회사진취재단


우리는 희망을 만들어 가는 어떤 노력들, 우리가 주로 운동이라고 부르던 것들을 열심히, 꾸준히 했다. 찾을 수 없는 희망을 만드는 일.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체육관에서 대통령을 뽑지 않고, 언론이 문제라고 말도 할 수 있고, (이 글이 실리는 매체를 포함하여) 두려움 없이 입바른 소리를 내는 언론사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농사꾼 국회의원도 있었고, 노조위원장 국회의원도 있었다. 언감생심 상상도 못 해본 '누구나 교육받고 누구나 치료받는 세상'에 대한 꿈도 키웠다. 그 쇳물 쓰지 말라는 노래도 만들어 불렀고, 85호 크레인에 오른 노동자가 드디어 살아서 내려오게도 만들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노동자 국회의원 한 명이 세상을 바꿀 것이라고 믿지 않았지만, 노동자 국회의원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세상이라면 조금은 더 좋은 세상일 것이라는 믿음이 진보정당운동의 요체였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서 번듯한 '사 자'직업을 가진 사람이 아니어도 국회의원이 될 수 있고, 대통령이 될 수 있는 세상이라면 가난하거나 좋은 대학에 다니지 못했거나 아프거나 외로운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세상일 것이라는 믿음.

그런데 지금 농사꾼 국회의원과 노조위원장 국회의원과 장애인 국회의원을 배출해냈던 진보정당은 사람들에게 외면받고 있다. 어느 날부터 진보정당운동은 우리가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이 될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보다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이 되는 일 자체에 몰두했다. 어느 날부터 새로운 상상력보다는 그저 유명한 사람을 찾았다.

사람들이 진보정당의 지난 시절에 보내는 믿음을 모종의 '지분'으로 인식했다. '페미정당'이라고 불리며 안티페미들에게 공격받지만 그 공격에서 도망치다 정작 당내 페미니즘은 지리멸렬했다. 세대갈등을 극복하겠다면서 하는 일이란 고작 유행하는 밈을 따라 하면서 표를 달라고 손을 내미는 일에 그쳤다. 그러는 동안 민주당 2중대라고 놀림 받았고, 이젠 민주당의 2중대 노릇도 하지 못할 만큼 쪼그라들었다.

전태일을 계승한다는 노동운동은 도처의 전태일과 각지의 평화시장, 그 곳곳의 어린 여공들로부터 외면받고 있다. 정파싸움 같은 걸 하느라 정신이 없기도 하고, 조직의 세를 불리는 영업에 바쁘기도 하다.

주말의 도심, 사람들에게 등을 돌리고 앉아서 자기들끼리만 통하는 운동권 사투리로 한참을 외치다 해가 지면 집으로 돌아간다. 그들 중 몇몇은 집으로 가는 길에 자기의 영혼을 끌어넣은 주식이나 부동산의 가격변동을 확인하고 있을 것이고, 그들 중 몇몇은 어느 으슥한 술집에서 아까 다 하지 못한 운동권 사투리를 문어체로 말하고 있을 것이고.

언론과 언론운동은 모든 곳에서 욕을 먹고 있다. 심지어 자기 내부로부터도. 언론을 욕하기만큼 쉬운 일도 없지만, 언론만큼 욕먹을 짓을 많이 하는 집단도 없다. 심지어 언론인들은 모종의 엘리트 의식에 빠져있다. 자기들을 비판하는 뭇 여론의 목소리가 왜 잘못된 것인지는 생각할 수 있지만 그 목소리가 왜 나온 것인지는 생각하지 않으려는 태도. 언론운동을 하는 이들도 자유로울 순 없는 노릇이다. 소위 '민주정부' 시절에만 유독 둔해지던 그 비판의 목소리들.

우리가 망한 것은 이 망한 세상을 바꿔 갈 운동마저도 이 망한 세상에서 같이 망해버린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희망 같은 것은 도통 '찾을 수' 없다.

'진짜' 망하지는 않았다
 

우린 아직 진짜 망한 것은 아니다. ⓒ 조명신


사실 놀랍지만은 않은 일이다. 생각해보면 우리의 운동은 원래 언제나 망해 있었다. 근로기준법을 지키라는 당연한 말을 도통 듣지 않아 스물두 살의 전태일이 제 몸에 불을 붙일 때부터, 거리에서 창당한 진보정당의 대선후보가 한푼 두푼 모은 돈으로 나선 대선에서 중도에 사퇴할 수밖에 없었을 때도, 좋은 기사를 쓰겠다고 다짐한 기자 160명이 한 번에 해고됐을 때도 운동은 언제나 외면받고 있었다. 그때마다 지금 내가 하는 것과 꼭 같은 냉소를 보내는 말들이 없었을까. '우린 망했어, 희망 같은 건 보이지 않아.'

그러나 희망은 원래 찾아지지 않는다. 희망이라는 게 그렇게 호락호락 찾아지는 것이라면 지금을 난세라고 부르지도 않겠지. 희망은 본래 없는 것을 만드는 일에 가깝다. 제 몸에 불을 붙인 스물두 살의 전태일 이후, 완주하지도 못하고 끝났던 백기완선본 이후, 끝내 복직되지 못하면서도 끝내 기자이길 포기하지 않았던 동아투위 이후에 민주노총도, 민주노동당도, (이 글이 실리는 매체를 포함하여) 진보언론도 태어났다. 희망을 보아서가 아니라 희망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잔뜩 냉소하더니 고작 낭만적인 말을 하는 것처럼 들릴 수 있지만, 생각해보면 이성적으로 따져봐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희망을 만들어내는 것뿐이다. 이미 망한 세상에서 희망마저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면 100% 망한 것이지만, 만들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지만 일단 희망을 만들려 한다면 희망을 찾거나 찾지 못하거나 둘 중 하나, 50%만 망한 게 되니까. 매우 간단한 산술이다.

그래서 우린 아직 진짜 망한 것은 아니다. 진짜 망하는 순간이란 그저 냉소에서 사고가 끝났을 때, 희망을 만들려는 모종의 노력도 하지 않을 때, 우리 사는 세상에 그런 노력과 믿음을 지닌 사람이 한 명도 남지 않았을 때.

좋아하는 말은 이성으로 비관하고, 의지로 낙관하라는 말이다. 본래 희망은 이성의 영역이 아니라 의지의 영역이다. 다행히 우리 사회엔 여전히 더 나은 세상의 희망과 상상을 품고 사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이 다 사라지기까지 우리가 '진짜' 망할 일은 없다(어쩌면 이제 많지는 않은 것 같아 조금 슬픈 일이지만).

벤야민은 "인생이란 살만한 값어치가 있어서 산다기 보다는 죽을만한 값어치가 없어서 사는 것"이라고 했다. 예전엔 이 말이 생이 얼마나 무의미하고 허무한지를 말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우리 어머니가 종종 하던 '죽지 못해 산다' 같은 말도 마찬가지.

그러나 이제 와 곰곰히 생각해보면 이런 말들은 오히려 '살아갈 값어치를 찾아낼 때까지'를 의미하는 생의 의지 같은 말은 아니었을까. 세상은 윤석열이나 좌빨이나 기레기 때문에 망하는 것이 아니라 희망도 생의 의지도 없이 냉소하는 우리, 나나 당신 때문에 '진짜' 망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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