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자취 생활을 하던 대학 시절. 우연히 TV를 보다 케이블 채널에서 제이미 올리버 요리 프로그램을 보게 됐다. 여러 지인들을 불러 모아 놓고 자신이 만든 요리를 대접하는 콘셉트의 프로그램이었다.

그는 오븐에 넣은 고기를 꺼내 썰거나 파스타 면이 제대로 익었음을 확인 할 때면 늘 "러블리!"라는 감탄사를 외쳤다. 요리를 하는 과정을 보는 것만으로도 허기가 질 수 있다는 사실을 그 무렵에 깨달았던 것 같다. 당연히 그 요리를 따라해 보고 싶은 마음이 샘솟았다.      

당연히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일단 구하기 힘든 식재료가 한둘이 아니었다. 때는 2010년이었고, '페타치즈'나 '생 바질', '베이비 루꼴라' 같은 식재료가 우리 동네 마트에 있을 리 없었다. 설령 구한다 해도 그 비싼 재료비를 감당할 여력이 없었다. 결국 한국의 식재료를 대체품 삼아 그의 요리들을 이따금씩 흉내내곤 했다.

맛은 그럭저럭 괜찮았다. 다만 약간의 '현타'가 왔을 뿐. '이 돈으로 피자 한 판 시켜 먹었으면 더 맛있었을 텐데', '이런 맛을 내려고 이 고생을 한 건 아니잖아!' 그 이후로 한동안 외국 음식을 만드는 도전은 엄두도 내지 않았다.     

그로부터 장장 10년. 강산이 한 번 바뀌었다는 말로는 지금의 변화를 설명하기 부족하다. 이제는 지구 저편의 식재료인 펜넬이나 물소 치즈, 양갈비도 앱으로 주문만 하면 다음날 새벽에 집 앞까지 배송해 주는 세상이 됐으니까.

집밥도 초기 투자비용이란 게 존재한다
 
왼쪽부터 바닐라 에센스, 계핏가루, 산초, 페페론치노, 사프란, 큐민, 파슬리. 산초는 마파두부 같은 중화요리를 할 때 쓰고, 큐민은 고기요리에 쓴다. 사프란은 종종 차로 내 마시기도 한다.
 왼쪽부터 바닐라 에센스, 계핏가루, 산초, 페페론치노, 사프란, 큐민, 파슬리. 산초는 마파두부 같은 중화요리를 할 때 쓰고, 큐민은 고기요리에 쓴다. 사프란은 종종 차로 내 마시기도 한다.
ⓒ 박종원

관련사진보기

개인적으로는 넉넉하진 않지만 아내에게 저녁밥을 만들어 줄 정도의 수입도 생겼다. 새로 도전하지 아니할 이유가 없었다. 제이미 올리버가 외쳤던 "러블리!"를 나도 같이 외칠 수 있게 된 것이다.   
    
신접살림을 꾸리면서 내가 제일 먼저 사기 시작한 건 생활용품이 아니라 조미료와 소스 그리고 향신료였다. 음식을 뚝딱뚝딱 만드는 데 필요한 초기비용이라는 핑계를 대면서(근데 사실이다). 중국에서 온 산초기름, 일본에서 온 가쓰오부시, 베트남에서 온 피시소스가 차곡차곡 집에 배송됐다.

상자를 뜯어 싱크대에 진열할 때면 엽서를 모으는 초등학생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다. 새로 온 조미료들을 이용해 그날 저녁을 차렸음은 물론이다. "러블리!"를 외치면서.      

이 취미가 주는 이점을 말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일단 다양한 메뉴를 빠르고 쉽게 만들 수 있다. 그리고 이미 초기 비용을 투자했기 때문에 금전적으로 무리하지 않고 새로운 메뉴에 도전해 볼 수 있다. '내일 뭐 해먹지?'라는 고민에서도 그만큼 자유로울 수 있다.

한두 달 만들다 보면 '사먹는 것보다 나은데?' 싶은 요리들도 슬슬 생기기 시작한다. 한 걸음만 더 들어가 찾아보면 각국에서 쓰이는 이른바 '국민 조미료'들을 발견하기 마련이고, 그것만 잘 사용해도 현지의 맛을 최대한 비슷하게 재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꼭 모든 조미료와 소스를 사 모을 필요는 없다. 직접 만들 수 있는 것들도 적지 않으니까. 최근에 만든 하리사 소스가 그랬다. 튀니지에서 즐겨 먹는 고추 소스로 아주 맵고 짜다.

조미료 모으기, 가성비 뛰어난 취미

로버트 카플란의 <지중해 오디세이>라는 책에서 작가가 카스 쿠르트(casse croute)라는 샌드위치를 먹는 장면이 나왔는데, 거기에 이 하리사 소스가 들어간다는 설명에 꽂혀버렸다. 현지인들은 이 소스를 바른 바게트에 토마토, 양파, 올리브 그리고 참치를 넣어 카스 쿠르트를 만든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핵심은 당연히 하리사 소스. 만드는 법은 어렵지 않았다. 물에 불린 건고추를 갈라 씨를 빼내고, 레몬즙, 소금, 커민을 넣고 갈면 끝이었다. 속 재료도 다 있겠다, 시도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카스 쿠르트(casse croute). 튀니지 해안지방에서 먹는 길거리 음식으로 버터에 구운 바게트에 참치, 올리브, 토마토, 양파, 매운 고추 소스인 하리사를 넣어 먹는다.
 카스 쿠르트(casse croute). 튀니지 해안지방에서 먹는 길거리 음식으로 버터에 구운 바게트에 참치, 올리브, 토마토, 양파, 매운 고추 소스인 하리사를 넣어 먹는다.
ⓒ 박종원

관련사진보기

 
로버트 카플란의 설명에 따르면 카스 쿠르트는 참치가 많이 잡히는 지중해 연안 지역에서 많이 먹는 샌드위치란다. 맵고 짠 지중해의 맛. 하리사 소스 속 커민의 향이 캔 참치의 비릿함을 완전히 지워버렸다. 여기에 버터로 구운 바게트의 향과 레몬의 새콤함은 화룡점정.      

외식보다는 집에서 해 먹는 장점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조미료 모으기는 꽤나 건전한 취미가 될 수 있다. 물론 어른의 취미에는 비용이 들기 마련. 사실 그걸 감안해도 이 정도의 지출은 꽤나 소소한 수준이다. 낚싯대, 카메라, 골프채의 가격을 생각해보면 말이다.

한 번 쓰고 버려지는 낭비를 저지르지만 않는다면, 많은 이들에게 추천해주고픈 즐거움이다. 여러 번 사용할 생각으로 구매해야 아내에게 혼나지 않는다는 사실, 절대 잊지 말고.

태그:#결혼생활, #실전가사, #주방노동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