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타르 월드컵 16강 진출한 태극전사들 3일 오전(한국시간) 카타르 알라이얀의 에듀케이션 시티 스타디움에서 열린 2022 카타르 월드컵 조별리그 H조 3차전 대한민국과 포르투갈 경기에서 승리를 거두며 16강 진출에 성공한 대표팀이 기념촬영을 하며 기쁨을 나누고 있다.

3일 오전(한국시간) 카타르 알라이얀의 에듀케이션 시티 스타디움에서 열린 2022 카타르 월드컵 조별리그 H조 3차전 대한민국과 포르투갈 경기에서 승리를 거두며 16강 진출에 성공한 대표팀이 기념촬영을 하며 기쁨을 나누고 있다. ⓒ 연합뉴스

 
4년에 한 번, 월드컵 시즌이 되면 각 언론들과 축구 전문가들, 그리고 축구 마니아들은 저마다 한국의 16강 진출에 대한 희망적인 분석들을 내놓곤 한다. 하지만 실제로 1986년 멕시코 월드컵부터 2018년 러시아 월드컵까지 지난 9번의 월드컵에서 한국이 16강 무대를 밟은 경우는 단 두 번에 불과했다. 현실적으로 한국 축구에게 월드컵 16강은 지금까지 22.2%에 불과했던 매우 낮은 확률의 목표라는 뜻이다.

이번 2022 카타르 월드컵에서도 한국은 우루과이와 0대 0 무승부에 이어 가나에게 2-3으로 패하면서 조별리그 2경기를 치를 때까지 1무1패에 머물렀다. 마지막 상대는 가나와 우루과이를 모두 꺾은 H조 1위이자 이번 월드컵에서 우승을 노리는 FIFA 랭킹 9위의 강호 포르투갈. 하지만 한국은 16강 진출 가능성이 매우 낮다는 예상을 깨고 포르투갈에게 2-1로 역전승을 거두면서 기적적으로 16강 진출을 이뤄냈다.

이제 한국은 오는 6일 오전 4시 FIFA 랭킹 1위이자 이번 대회 강력한 우승후보 브라질과 8강 진출 티켓을 놓고 격돌할 예정이다. 이번에도 세계 축구 팬들 대부분은 브라질의 완승을 예상하겠지만 월드컵은 그 어떤 이변이 일어난다 해도 이상하지 않은 무대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축구 팬들은 이미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한·일 월드컵을 통해 축구에서 어떤 이변이 일어나고 그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가 될 수 있는지 생생하게 목격한 바 있다.

월드컵 첫 승 이후 온 국민이 걸린 집단 최면

사실 나의 '월드컵 거리응원'은 1998년 프랑스 월드컵부터 시작됐다. 당시엔 광화문 거리응원이 활성화돼 있지 않아 요즘처럼 대규모의 인원이 모이진 않았지만 소수의 인원들이 빨간색으로 의상을 맞추고 광화문에 모여 신문사 전광판의 화면으로 월드컵을 보며 한국을 응원했다. 하지만 한국은 멕시코와의 첫 경기에서 하석주의 선제골 이후 내리 3점을 내주면서 1-3으로 아쉽게 역전패를 당하는 등 1무2패로 조별리그 최하위로 탈락했다.

한국이 거스 히딩크 감독을 선임해 2002 월드컵 준비에 박차를 가하는 동안 나는 병역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군에 입대했고 월드컵을 넉 달 앞둔 2002년 2월에 전역했다. 당시 각 기업에서는 '월드컵 특수'를 노린 마케팅에 한창이었고 나는 친하게 지내는 후배와 함께 폴란드와의 조별리그 첫 경기를 상암공원에서 관람했다(당시엔 각 통신사 별로 각각 광화문과 상암공원, 서울시청 광장에서 거리응원을 주도했다).

상암공원에 모인 사람들은 모 통신사에서 준비한 응원단의 구호에 맞춰 한국 대표팀을 응원했고 한국은 예지 두덱과 에마누엘 올리사데베가 버틴 폴란드에게 2-0으로 승리하며 월드컵 역사상 첫 승을 따냈다. 그때부터 대한민국 국민들은 '우리들의 응원과 승리에 대한 염원은 선수들의 경기력 향상에 크게 도움이 된다'는 열성 축구팬들의 막연한 무속신앙(?)을 함께 믿기 시작했고 이는 거리응원의 폭발적인 증가로 이어졌다.

폴란드전을 상암공원에서 관람했던 나는 미국전에서는 시청 앞 광장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이때부터는 '전 국민의 붉은악마화'로 인해 대기업의 응원단장은 필요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갑작스런 소나기도 아랑곳하지 않고 열정적인 응원을 펼쳤고 한국은 안정환의 동점골에 이은 '오노 세리머니'를 통해 지난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의 억울했던 마음을 위로받았다. 그리고 이제 남은 상대는 세계적인 미드필더 루이스 피구가 이끄는 포르투갈이었다.

하지만 나와 후배는 두 번의 거리응원 이후 '거리응원의 비효율성'을 깨닫기 시작했다. 물론 푹신한 의자에 앉아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편안하게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 더욱 컸던 게 사실이다. 그렇게 우리는 친구들을 더 불러 포르투갈전을 앞두고 식당과 술집들이 운집한 신촌을 찾았다. 우리는 대형 스크린을 설치한 몇몇 술집들을 돌아다닌 끝에 한 호프집에 자리 잡았고 한국이 포르투갈을 꺾고 사상 첫 16강에 진출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속초 여관의 작은 TV로 목격한 4강 신화
 
 2일 밤 서울 종로구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2022 카타르 월드컵 H조 예선 한국과 포르투갈 경기 합동 응원에 나선 시민들이 한국 선수들이 그라운드에 몸을 풀기 위해 나오자 승리를 기원하며 열띤 응원을 펼치고 있다. 2022.12.2

2일 밤 서울 종로구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2022 카타르 월드컵 H조 예선 한국과 포르투갈 경기 합동 응원에 나선 시민들이 한국 선수들이 그라운드에 몸을 풀기 위해 나오자 승리를 기원하며 열띤 응원을 펼치고 있다. 2022.12.2 ⓒ 연합뉴스

 
D조 1위로 16강에 진출한 한국의 상대는 G조 2위 이탈리아였다. 사실 축구팬이라면 당시 한국이 월드컵에서 프란체스코 토티와 크리스티안 비에리 같은 슈퍼스타가 있는 이탈리아를 꺾을 수 있을 거라 기대하긴 어려웠다. 따라서 우리는 마지막이 될 것이 유력한 이탈리아전을 더욱 편안한 장소에서 관람하기로 했다. 그렇게 적당한 장소를 물색하던 중 우리는 영화 상영 후 곧바로 축구 중계를 틀어주는 종로의 어느 멀티플렉스 극장을 찾아냈다.

그리고 모두가 아는 것처럼 한국은 16강에서 설기현의 동점골과 안정환의 골든골에 힘입어 이탈리아를 2-1로 꺾었고 극장 안은 그야말로 흥분의 도가니로 물들었다. 사람들은 경기가 끝난 후에도 30여 분간 "대~한민국!"을 외치며 승리에 도취됐다. 간신히 흥분을 가라앉히고 거리로 나오니 광화문 응원을 끝낸 사람들이 종로까지 넘어와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날 나는 지하철로 20여 분 걸리는 거리를 1시간 넘게 걸어서 귀가해야 했다.

스페인과의 8강전은 2002년 6월 22일 토요일에 열렸다. 주말에 열리는 월드컵의 기회를 놓칠 수 없었던 나는 주말에 친구 3명과 1박2일의 '월드컵 응원여행'을 가기로 했다. 전국 어디나 거리응원의 열기가 대단할 거라 확신했던 우리는 경기가 열리는 광주와 동 떨어진 강원도 속초를 행선지로 정했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속초에는 거리응원 분위기가 전혀 조성돼 있지 않았다(당시 속초에서는 체육관과 시민회관 등에서 단체응원을 진행했다).

그렇게 우왕좌왕하는 사이 경기시간이 임박했고, 우리는 숙소의 작은 TV를 통해 스페인과의 8강전을 감상했다. 비록 화면은 작았지만 승부차기까지 가는 내내 한 순간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고 이운재 골키퍼의 선방과 홍명보의 환한 미소에는 세상 누구보다 기뻐했다. 경기가 끝난 후 우리는 속초해수욕장 근처의 해산물과 '속초의 명물' 오징어순대를 안주 삼아 월드컵 이야기로 밤이 새도록 술잔을 기울이며 즐거운 추억을 만들었다.

이탈리아와 스페인을 꺾을 때만 해도 우승이라도 할 수 있을 법한 기세였지만 결국 한국은 4강에서 독일, 3위 결정전에서 터키에게 패하며 4위로 월드컵 일정을 마쳤다. 20세기까지 16강은커녕 월드컵 무대에서 단 1승도 없었던 한국을 4강으로 이끈 히딩크 감독은 '국민영웅'이 됐다. 그리고 그 뜨거웠던 시간을 각자의 자리에서 선수들과 함께 호흡했던 사람들은 저마다 2002년 6월을 인생에서 쉽게 잊을 수 없는 좋은 추억으로 가슴 한 편에 새겼다.

2022년의 거리응원, 훗날 좋은 추억이 되길

2002 월드컵의 뜨거웠던 6월 이후 20년이라는 긴 시간이 흘렀다. 당시 6월의 추억을 함께 했던 친구들 중에는 요즘도 가끔 소주 한 잔을 하며 2002년 월드컵의 추억을 이야기하는 친구도 있지만 크고 작은 오해들로 사이가 멀어지며 연락이 끊어져 버린 친구도 있다. 하지만 내가 2002 월드컵을 추억할 때 그 친구들이 먼저 생각나는 것처럼 그들도 월드컵의 추억을 떠올리면 내 얼굴이 자연스럽게 생각날 것이다.

2002 월드컵 당시 혈기왕성한 20대 청년이었던 나는 어느덧 40대 중반의 아저씨가 됐고 적지 않은 체력이 필요한 거리응원은 이제 엄두도 내지 못한다. 이제는 그 시절 너무 어려 거리응원에 참여할 수 없었던 세대, 또는 당시 세상에 없었던 세대들이 거리응원의 주역이 돼 광화문에서 선수들을 응원하고 있다. 그리고 그 응원에 힘입어 대한민국은 조별리그 1승1무1패로 우루과이를 '다득점'에서 앞서며 극적으로 16강에 진출했다.

이재 한국은 오는 6일 오전 4시 16강에서 우승후보 브라질을 상대한다. 한국에겐 상당히 가혹한 대진인 것은 분명하지만 월드컵의 녹아웃 토너먼트에서 '최강' 브라질을 상대할 기회는 자주 찾아오지 않는다. 물론 선수들이 다치지 않고 좋은 경기를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만 거리응원을 하는 사람들도 아무런 안전사고 없이 좋은 추억을 만들기를 기원한다. 이날의 경험이 훗날 그대들의 인생에서 소중한 추억의 한 페이지로 남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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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카타르 월드컵 2002 한·일월드컵 거리응원 16강 브라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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