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2.22 07:14최종 업데이트 23.01.12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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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는 현실을 비추어 인간의 욕망을 드러내는 거울이다. 특히 영화는 텍스트, 음악, 영상 등을 두루 다루는 종합예술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막대한 자본을 투자할 수 있는 시장이 있고 나날이 발전하는 최첨단 기술로 구현할 수 있는 세계가 넓어진다는 면에서 또 웅장하고 화려한 화면에서 다른 대중문화 매체보다 확실한 강점이 있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전쟁이라는 소재와 영화라는 매체는 찰떡궁합일지도 모르겠다. 종합예술로서 영화가 음악, 영상, 이야기를 동원해 화면에 구현해 낸 전쟁 이야기는 화려한 전투 장면부터 전쟁을 마주하는 사람들의 삶과 죽음 그리고 전쟁을 추동하고 전쟁과 함께 폭발하는 다양한 욕망까지, 단순하게 전쟁을 반사하여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전쟁이 우리에게 숨기는 전쟁의 이면까지도 드러내는 거울이다.


모든 전쟁영화가 전쟁을 반대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지는 않다. 영화는 그 대중적 파급력 때문에 때로는 전쟁 체제에 동원되기도 한다. 혐오를 부추기고 적대감을 불러일으켜 전쟁 찬성 여론을 드높이는 데 일조한 나치의 선전 영화가 대표적이다.

전쟁 선동까지는 아니더라도 많은 전쟁 영화가 보편적인 세계 평화에 대한 갈망은 접어둔 채 애국심만을 고취하고,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 적대국에 대한 적대 감정만 부추기기도 한다.

영화라는 그릇에 어떤 생각을 담을지는 결국 창작자와 관객의 몫이다. 다만 웅장하고 화려한 화면을 재현하면서 드라마를 보여주기 좋은 영화라는 매체의 특성상 잘 만든 전쟁 영화, 다시 말해 전쟁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영화는 어쩔 수 없이 보는 이가 전쟁에 반대하게 하기 쉽다. 

영화가 보여주는 전쟁의 모습: <1917>, <덩게르크>, <바이스>

전쟁 영화를 보면 전투의 역사가 어떻게 바뀌어왔는지를 알 수 있다. 아카데미 시상식 작품상의 유력한 후보로 뽑히며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과 겨뤘던 샘 맨더스 감독의 영화 <1917>은 1차 세계대전의 특징을 아주 잘 보여주는 영화다.

영화의 주된 줄거리는 몇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을 정도로 간단하다. 참호를 파고 지루한 전투를 이어가는 가운데 독일군이 참호를 두고 후퇴하는데 영국군은 이것이 함정이라고 뒤늦게 알게 된다. 돌격을 준비하는 최전방 부대에 함정이라는 것을 알려야 하는데 전투로 통신 장비들이 모두 마비되어 사람이 직접 전해야 하는 상황이다. 막중한 임무를 맡은 두 명의 병사 스코필드와 블레이크가 돌격을 앞둔 매켄지 중령(베네딕트 컴버배치)에게 이 소식을 알리러 가는 여정이 영화의 전부다.

블레이크(조지 매케이)와 스코필드(딘-찰스 채프먼)는 영화 초반 영국군의 기나긴 참호를 가로지르고 독일군의 텅 빈 참호에 도달한다. 영국군 참호와 독일군 참호 사이에는 시체가 즐비하다.

참호전은 1차 세계대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전투 방식이다. 적대하는 양쪽의 군대가 일렬로 늘어서 참호를 파고 그 안에 들어가 마주 보고 싸웠다. 참호는 때로는 몇 킬로미터씩 이어지곤 했는데 길게 늘어선 참호에서 전투를 벌이는 동안 양쪽 모두 많은 사상자를 냈다. 양쪽의 시체가 참호 안팎으로 쌓여가는 동안 두 세력은 한 발짝도 전진하지 못하고 지리멸렬한 전투만 이어가는 전쟁. 그것이 1차 세계대전의 모습이었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전투 중 가장 유명한 베르됭 전투는 프랑스 북부 베르됭 요새를 두고 독일군과 프랑스군이 맞붙은 전투였는데, 공격하는 독일군이나 방어하는 프랑스군 모두 한 발짝도 전직하지 못한 채 참호 안에서 무려 4개월 가까이 전투를 벌인 끝에 각각 30만 명이 넘는 사상자만 남겼다.

<1917>의 전쟁도 참호를 중심으로 이어진다. 이 전선이 얼마나 오래 고착되어 있는지는 모르지만 참호 안의 영국군은 이미 죽음조차도 지겹다.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 가늠도 되지 않는다. 층층이 쌓여가는 죽음의 의미를 아무도 모른다. 영화는 직접적으로 전쟁 반대 메시지를 던지지는 않지만 참호전을 충실하게 재현해냄으로써 영화를 보는 관객이 스스로 전쟁의 의미를 비판적으로 되묻게 한다.
 

<1917> 스틸컷. 길어 늘어선 참호 안에서 끝이 없는 전투에 지친 병사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 1917

   
<인터스텔라>, <인셉션>, <다크나이트>와 같은 걸출한 영화를 만든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덩게르크> 또한 전투를 충실히 재현한 전쟁 영화로 2차 세계대전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의 도버해협 건너편인 프랑스 덩게르크 해안에 고립된 40만 명의 영국군을 영국 본토로 탈출시키는 내용이 영화의 줄거리다. 지상의 독일 육군과 바다의 어뢰도 만만치 않았지만 후퇴 작전의 가장 큰 걸림돌은 독일군의 전투기였다.

1차 세계대전의 상징이 참호전이었다면 2차 세계대전의 상징은 전투기 폭격이었다. 1차 세계대전 당시에도 비행기는 있었지만 대량 살상이 가능한 수준은 아니었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에서부터 전투기는 아주 중요한 전략적 역할을 수행한다. 전차군단으로 유명한 나치의 군대도 지상에서 전차부대가 진격하기 전에 전투기가 먼저 해당 지역을 폭격했다.

<덩게르크>에서도 철수 작전을 방해하는 독일군 전투기와 영국군을 싣고 탈출하는 배들을 항공 엄호하는 영국군 전투기가 전투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한편 전투기 폭격은 일종의 심리전이기도 했다. 나치 독일이 항복 선언을 하기 14주 전 연합군은 작센 왕국의 수도였던 아름다운 도시 드레스덴을 폭격해 도시를 초토화한다. 이 폭격으로 수만 명이 죽었다.

이처럼 전투기 폭격은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 학살과 더불어 압도적인 소음과 폭음, 파괴력과 살상력으로 상대편에게 공포를 심어주어 전의를 상실하게 했다. <덩게르크>의 주인공 토미(핀 화이트헤드)가 철수 작전이 진행되는 잔교에 다다랐을 때, 모여있는 영국군을 향해 독일군 폭격기가 날아들자 공습 경보 사이렌이 울리고 병사들이 혼비백산 우왕좌왕하며 흩어지고 땅바닥에 납작 엎드리는 장면은 폭격이 주는 공포감을 잘 보여준다.
 

<덩게르크> 스틸컷. 철수 작전에서 독일군, 영국군 모두에게 전투기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 덩게르크

   
우리는 전쟁에 대해 생각할 때 흔히 전투만을 떠올리지만 어쩌면 전투는 전쟁의 표피일 뿐이다. 전투 바깥에서 전쟁을 준비하고 기획하고 진두 지휘하는 이들 또한 전쟁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조지 부시 행정부에서 부통령을 지낸 딕 체니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바이스>는 전투 바깥의 전쟁 모습을 빼어나게 묘사한다. <1917>과 <덩게르크>가 특정한 전쟁의 한 단면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영화라면 <바이스>는 딕 체니(크리스천 베일)라는 인물의 전기 영화다. 하지만 딕 체니의 독특한 이력이 이 영화를 전쟁 영화로 불러도 손색없게 만든다.

딕 체니는 걸프전 당시 미국의 국방부 장관이었고 그 이후에는 석유회사인 핼리버튼의 경영자로 자리를 옮겼다가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당선하며 부통령이 되었다. 부시 행정부 내에서 전쟁의 필요성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매파였다. 이라크 전쟁은 딕 체니와 그가 경영자로 재직했던 핼리버튼에 막대한 이윤을 안긴다. 핼리버튼은 이라크 전쟁 직후 110억 달러 규모의 재건 사업을 미국 정부로부터 따낸다. 그리고 핼리버튼은 퇴임 이후 딕 체니에게 해마다 15만 달러를 지급한다.

<바이스>는 전쟁의 양상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전투 바깥에서 보여준다. <1917>과 <덩게르크>의 전쟁은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지 영토 확장 쟁탈전이었다. 이후 이어진 한국 전쟁과 베트남 전쟁은 이념 전쟁의 성격이 강했다. 그리고 21세기 벽두에 일어난 이라크 전쟁은 앞으로 일어날 전쟁이 돈벌이를 위한 수단임을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전쟁이었다. 영화 <바이스>는 그 죽음의 돈잔치에서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한 인물, 딕 체니를 통해 21세기 전쟁의 모습을 파해친다.
   

영화 <바이스> 스틸 컷 ⓒ 콘텐츠판다

 
전쟁터에서 전쟁에 저항하는 이들: <사마에게>

위의 영화들이 충실하게 전쟁을 재현하는 것으로 관객들에게 전쟁에 대한 비판적인 독해를 제공한다면 다큐멘터리 영화 <사마에게>는 날것의 전쟁을 보여주면서 더 노골적으로 전쟁을 비판하는 영화다.

정의감과 행동력으로 똘똘 뭉친 대학생 와드가 아사드 독재정권에 맞선 싸움을 기록해 나간다. 민주화 운동 이후 기나긴 내전에 돌입한 시리아, 날마다 폭격과 교전으로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제2 도시 알레포에서 와드는 함자와 함께 병원을 세우고 사람들을 치료하며 전쟁터에서의 일상을 기록해 나간다.

정부군이 알레포를 포위하고 압박해 올 때 와드와 함자는 고향을 떠나지 않고 버티며 전쟁에 맞선다. 그러던 와중에 와드와 함자는 사랑에 빠지고 사람들이 죽어가는 전쟁터에서도 새로운 생명은 태어난다. 영화의 제목에 등장하는 이름 '사마'는 와드와 함자의 딸이다.

이 다큐 영화는 감독인 와드가 딸 사마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다. 이 영화는 단순히 전쟁을 기록하려는 작품이 아니다. 알레포에서 일어난 일을 세계에 알리고, 전쟁을 멈추게 하기 위해 함께 싸워달라는 호소를 건네는 정치적인 제안이기도 하다. 전쟁터에서 직접 촬영한 영상이 가지는 힘에 더해 전쟁터 한복판에서도 끝내 포기하지 않고 전쟁에 저항한 이들의 시선과 목소리가 직접 담겨 있어서 묵직한 감동까지 준다.
 

영화 <사마에게> 스틸컷. 영화의 주인공인 함자와 와드, 그리고 또 다른 주인공인 사마. ⓒ 사마에게

  
<사마에게>는 제작자의 정치적인 의도가 명확하게 드러나지만 이 글에서 소개한 나머지 영화들은 딱히 전쟁 반대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만든 영화는 아니다. 하지만 전쟁의 다양한 현실을 잘 묘사한 이 영화들을 보고 나면 누구나 전쟁의 참혹함에 대해, 전쟁의 의미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된다.

이는 현실을 충실하게 재현한 영화의 힘이기도 하지만 전쟁 자체가 가지는 폭력성 때문이기도 하다. 잘 만든 전쟁영화는 모두 반전(反戰) 영화가 되는 역설의 의미를 한 번쯤 생각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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