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인가, 지인들과 만난 자리에서 새해의 목표를 적어 나눈 일이 있었다. 지난해에도 꼭 같은 일을 했던 우리는 유리병을 열어 그 안에 든 각자 두 장씩의 종이를 꺼내 그것을 이루었는지를 소개했다. 목표는 절반쯤은 이뤄지고 절반쯤은 근처에도 가지 못한 것이어서 우리는 올해만큼은 반드시 목표를 이루고야 말자고 서로를 독려하였던 것이다.
 
지난해 그러했듯 우리는 적은 종이 두 장 중 한 장을 골라 돌아가며 발표하기로 했다. 다른 한 장은 한 해가 지난 뒤에야 서로에게 공개될 것이었다. 개중 자리를 채운 여성 두 명의 목표가 지금 이 순간 머릿속에 맴돈다. 한 명은 새해엔 화를 내자고 적었고, 다른 한 명은 비속어를 섞어 부당한 일을 만나면 'X까'라고 할 거야 하고 적었던가. 자칭 평소 싫은 소리 하는 법을 몰라 온몸으로 감정을 삭이고 받아냈다는 이들은 새해엔 직장에서나 사적인 만남에서나 할 말은 하고야 말겠다고 다짐했던 것이다.
 
문득 이들의 이야기가 떠오른 건 연말을 맞아 본 공연에서였다. 2022년 마지막 날까지 대학로 플랫폼74에서 공연되는 창작극 <에어플레인 모드(이주빈 극본, 연출)>로 항공사 승무원 부부의 이야기를 다룬 80분짜리 연극이다.
 
 <에어플레인 모드> 포스터

<에어플레인 모드> 포스터 ⓒ 극단 도화


회사 그만둔 승무원의 가짜 출근기

이야기는 어느 여성 승무원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흘러간다. 말이 승무원이지 비행을 못한 지가 반년은 족히 된 주리(황은서 분)다. 매일 유니폼을 입고 캐리어를 끌며 승무원인 척 공항으로 출근하는 그녀의 모습은 그 옛날 양복 입고 산으로, 오락실로, 공원으로 향하던 슬픈 우리 가장들을 떠올리게 한다.

그 시절 가장이나 주리나 이유는 빤하다. 함께 사는 이를 속이기 위함이다. 주리는 동거 중인 그녀의 애인 정우(백지훈 분)가 알지 못하도록 벌써 반년째 출근을 빙자한 외출을 거듭하고 있는 것이다.

이야기는 또 다른 차원을 오간다. 그곳은 비행하는 이들을 관장하는 세계, 이른바 '비행기모드'다. 그곳에는 비행의 신(유명조 분)이 있고, 그 조수 격인 시리(도수민 분)가 있으며, 또 다른 직원 격인 블루(박용재 분)가 있다. 여느 날처럼 평화로운 비행을 관장하는 이들 앞에 승무원 사칭자 주리가 나타나니, 이야기는 좌충우돌 천방지축 정신없이 흘러간다.
 
 <에어플레인 모드> 출연진

<에어플레인 모드> 출연진 ⓒ 극단 도화

 
감정 받아내는 감정노동자를 떠올리며
 
이 독특한 극 마지막에서 일류 항공사의 잘 나가는 승무원 정우가 저를 돌아보는 장면이 있다. 별로 죄송하지 않은 일에도 늘 죄송하다고 사과를 달고 살던 그가 제 안에 쌓인 감정의 상흔들을 돌아보는 대목이다. 단 한 번도 컴플레인을 받아본 적 없던 일류 승무원 정우는 제가 온몸으로 그 모든 감정을 받아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제게도 쉼이, 변화가 필요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세상에는 감정을 받아내기만 하는 많은 이들이 있다. 나는 얼마 전 고장 난 노트북을 고치기 위해 어느 전자기기 서비스센터를 찾았다가 이색적인 경험을 했다. 수리기사가 얼마나 친절한지 그 친절이 부분적으로는 불편하게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나 그들의 사정을 잘 아는 어느 친구는 내게 그렇게 행동하지 않으면 그들이 얼마나 많은 비난이며 폭력에 놓이는지를 이야기했다. 그 구체적인 예시를 몇 가지쯤 듣는 것만으로도 그들이 감당하고 있을 감정적 버거움이 짚이는 듯하였다.
 
많은 이들이 선망하는 항공사 승무원의 삶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수년 전 포스코 계열사의 어느 임원은 라면이 설익었다고 승무원을 괴롭히고, 급기야 라면을 주문했는데도 내오지 않는다며 책 모서리로 승무원을 때렸다가 논란이 됐다.
 
 <에어플레인 모드> 공연장

<에어플레인 모드> 공연장 ⓒ 김성호

 
일상을 새로 보게 하는 예술의 미덕

이 사건에 대하여 '승무원이 겪었을 당혹감과 수치심이 얼마나 컸을지 안타깝다'며 '항공기의 안전이나 운항을 저해하는 행위가 발생해도 규정과 절차에 따라 일관된 서비스를 제공한다면 우리의 노력은 정당하게 인정받을 것'이란 입장을 사내게시판에 게시했던 대한항공 조현아 부사장은 한국 비행사에 길이 남을 '땅콩 회항' 사건을 일으켜 승무원 사회를 넘어 한국사회 전반을 뒤흔들기에 이른다.
 
그러고 보면 이 세상엔 온갖 갑질로부터 저를 지켜내지 못하는 많은 이들이 있다. '서비스직은 그래야지' 하며 자존심이며 자존감을 짓밟는 일을 서슴없이 만난다. 고객 앞에 무릎 꿇는 백화점 직원이며 온갖 희롱을 참아내는 전화 응대 직원들이 이 순간에도 얼마나 많을 것인가. 그들이 세상의 많은 진상들을 향하여 지지 않고 화를 내는 상상을 아주 가끔은 해보게도 된다.
 
12월의 마지막을 보내며 본 연극 <에어플레인 모드>는 객석에 앉은 나를 화내지 못하는 이들의 삶으로 이끌어갔다. 어쩌면 연극이며 예술이 가진 가장 큰 미덕은 가만히 살다 보면 결코 다다르지 못하는 생각이며 감상으로 수용자를 데리고 가는 것은 아닐까. 내게 이 작품이 그러했듯.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에어플레인 모드 연극 대학로 극단 도화 김성호의 무대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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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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