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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우리는 미래를 말할 수 있을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어떤 이는 복합 위기의 시대라 하고, 어떤 이는 불가역적 위기의 시대라 한다. 이같은 위기론이 결코 과장인 것은 아니다. 전 지구적 팬데믹이 3년째 이어지고 있고,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서는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이 고통을 호소하고 있으며, 기후 위기로 우리의 생존 기반은 더욱 불투명해지고 있다.

혼란과 불확실성이 많은 이들의 영혼을 잠식하는 틈을 타 세계 곳곳에서 극우 세력이 집권하고 있으며, 한국 역시 신자유주의적 보수화의 사례로 빈번히 거론된다. 우리의 삶터 역시 해결하기 어려운 난제(難題)로 가득하다. 재난, 참사, 죽음이 쌓여가고 있으며, 동시에 오래된 문제인 빈곤, 불평등, 그리고 차별과 혐오의 문제도 여전하다. 우리는 과연 이 난제를 극복할 수 있을까?

통계청에서 발표한 <2022년 가계금융복지조사> 결과에 따르면, 순자산 10분위 별 통계를 기준으로 상위 10%에 자리 잡은 사람들이 대한민국 총자산의 43%를 차지하고 있다. 반면 하위 10%가 가진 순자산은 -0.2%다. 자산을 보유하기는커녕 그들에게 남은 것은 빚밖에 없다는 뜻이다. 이같은 빈부격차를 두고도 정부는 가구당 순자산이 전년 대비 '평균' 10% 증가했다고 강조한다. 그런데 '평균치'만 증가하면 괜찮은 것일까?

지어 정부는 2027년까지 국민소득 4만 달러 시대를 열겠다는 장밋빛 프로파간다(propaganda)를 우리 앞에 펼쳐 보였다. 우리의 근미래는 그만큼 밝고 아름다울까? '평균' 소득만 높아지면 우리의 삶의 질이 향상되는 것일까? 이 평균값을 올리는 사람은 누구이며, 이 평균치 근처에도 도달하지 못하는 이들은 누구인가. 정부가 연달아 발표 중인 부자 감세 및 복지예산 축소 방안을 조금만 들여다보아도 답은 자명하다. 이 국가는 모든 이들의 삶을 동등하게 보호할 마음도 의지도 없다. 당신은 그들의 우선순위 바깥에 놓여있다는 얘기다.

누군가는 더 중요하고, 누군가는 덜 중요하다는 관념을 바탕으로 한 우선순위 정책으로는 우리의 미래를 구할 수 없다. 한국 사회가 처한, 아니 세계가 처한 총체적이고 근본적인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바로 이 '유구하고 폭력적인' 우선순위의 역사를 되돌려야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한국 사회를 책임져야 할 정부는 오히려 폭주하는 열차에 올라타 마구 속도를 높이고 있다. 마치 이 위기의 세계에서 그들만 탈출하는 것이 가능한 것처럼. 그들은 세상을 구할 수 있는 든든한 어깨를 내어주기보다는 낡고 지저분한 공포 정치의 칼을 빼 들었다.

윤석열 정권은 '법과 원칙'에 따른 공권력 및 처벌의 강화, '실용과 공정'에 기반한 자유주의적 시장 논리의 강화를 통해 위기를 바로잡겠다고 주장한다. 이같은 폭정 앞에서 전문가 집단은 양심을 버렸으며, 언론의 자유는 탄압받고 있고, 노동자들은 각자도생의 길바닥에 내몰린다. 모두가 전심으로 노력해도 극복하기 어려운 위기의 시대에 우리는 정반대의 길로 가고 있다. 그야말로 파국(catastrophe)의 목전에 있다.

공포 정치 시대, 높아지는 돌봄의 요구

'법과 원칙'에 따른 처벌이 가장 선한 해결책으로 제시되는 응보적 정의의 시대가 다시 돌아왔다. 물론 여기서 법과 원칙은 권력의 자의성에 기반한다. 앞서 언급한 '우선순위'에 따라 법의 제정도, 개정도, 그리고 집행도 제멋대로이기 때문이다. 하물며 그 법과 원칙이 옳다고 하더라도 규제와 처벌로 해소되지 않는 종류의 사회 문제와 위기가 산적해 있다. 억압, 처벌, 그리고 훈육으로는 이 시대에 필요한 근본적인 전환을 해낼 수 없다. 권력자의 심기와 이해관계에 기반한 공포 정치가 무섭게 뿌리내리는 지금, 사회 각 분야에서 돌봄에 대한 요구가 더욱 거세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지난 한 해 동안 한국 사회에서 돌봄에 관한 담론이 매우 풍요로워진 것은 주목할 만하다. 돌봄은 개인적이고, 사적인 영역에 국한되며, 심지어 사소하거나 여성적인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발본(拔本)적으로 뒤바꾸는 글들이 많이 출판되었다. 돌봄은 우리 삶에 가끔 필요한 부수적 가치가 아니라,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을 조직하고 운용하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원리라는 것이다. 그저 법과 원칙, 또는 공정과 정의만으로는 우리의 공동체를 완벽하게 설명하거나 운영할 수 없다. 우리가 맺고 있는 관계, 그리고 우리의 삶의 양식을 규정하는 또 하나의 필수적 가치가 바로 돌봄이다.

어떤 이들은 돌봄을 중심으로 우리의 일상과 공동체를 재조직하자는 관계적 존재론이 그저 고전 철학의 인간론을 되풀이할 뿐이라고 평가절하한다. 이런 냉소는 우리를 더욱 분열시킬 뿐이다. 고전 철학에서의 관계는 개인, 정확히 말하자면 성인-비장애-남성의 자기충족성(self-sufficiency)을 바탕으로 사회를 설명한다. 자기충족적 개인이 먼저 존재하므로 그들이 연결되어 사회가 구성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인 남성이 아닌 이들, 즉 어린이, 여성, 퀴어, 장애인, 그리고 노예는 아예 인간의 범주에 포함되지도 못했다. 그러나 현대 돌봄 이론은 취약성(vulnerability)을 바탕으로 사회를 설명한다. 당연히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도 취약하다.

즉, 우리는 모두 취약하고 상호의존적이며 언제든 다른 누군가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이들이 말하는 '보편'은 근대적 인간의 이데아(idea)로서 보편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이미 취약'하기 때문에 돌봄은 모두를 향해야 한다는 의미로서의 보편이다. 돌봄의 정의와 범주 자체를 확장하는 것이다. 우리가 마주한 거대한 위기 앞에 인간은 더더욱 취약하다. 따라서 개인적 친밀성이나 이해관계, 또는 법률상 친족 관계와 상관없이 "아무나 난잡하게 돌보자"(promiscuous care)1는 주장은 인간-비인간 모두의 생태계를 살릴 수 있는 삶의 태도와 역량을 확보하기 위한 호소이자 실천이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우리가 키울 수 있는 돌봄 역량을 무자비하게 잘라내는 사회다. 다른 사람을 돌볼 수 있는 역량은 물론 나 자신을 추스르며 보살필 시간조차 확보하기 힘들다. 특히 타인에게 돌봄을 제공하는 일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은 현 정권에서 더욱 어려운 상황에 놓여있다. 정부는 서울시 사회서비스원 소속 돌봄 노동자들이 월평균 223만 원을 받는 '돌봄 업계의 삼성'이라며 최저 임금인 월 92만 원(동일 노동에 대해 민간시급제로 환산했을 시의 금액-편집자 말)에 맞출 수 있지 않겠냐고 비난한다. 이것이 바로 돌봄을 대하는 한국 사회의 현주소다. 이같은 인식과 처우로는 그 누구도 돌봄의 가치와 효과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누군가를 돌볼 수도, 돌보는 방법을 익힐 수도, 그리고 돌봄이 필요할 때 손잡을 사람을 찾을 수도 없는 삭막한 시장 논리에 잠식당하고 있다.
 
우리는 모두 취약하고 상호의존적이며 언제든 다른 누군가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취약하고 상호의존적이며 언제든 다른 누군가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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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적 각자도생의 열차를 멈추자

우리의 돌봄 역량이 바닥나기 전에, 신자유주의적 각자도생의 열차를 멈춰 세워야 한다. 압도적인 최장 노동시간에 시달리며 우리의 몸과 마음을 갈아 넣고, 타인과 협력하기보다는 무한경쟁에 뛰어들고, 결국 그렇게 노력한 만큼 보상받지 못해 끝없이 '공정'을 갈구하는 악순환을 끝내야 한다.

지구 곳곳에서 새로운 종류의 위기가 다가오는데 우리는 마치 눈을 가린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달릴 것을 요구받는다. 이제 더는 그렇게 뛸 수 없다고 외쳐야 한다. 모두가 온전히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사회, '우선순위'에 따라 생사가 나뉘지 않는 급진적 평등의 사회, 그리고 인간과 자연을 포함한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빚지고 있음을 인정하고 함께 돌보는 사회를 구체적으로 그려나가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 자신뿐 아니라 정부와 기득권층도 바뀌어야 한다. 물론 그들은 자발적으로 바뀌지 않는다. 결국 방법은 아래로부터의 전방위적 압력밖에는 없다. 이 말이 어렵게 들리더라도, 우리는 우리에게 내재한 힘을 믿어야 한다. 냉소는 기껏해야 현상 유지에 기여할 뿐이지 않은가. 그것이 우리 사회를 퇴화시키지 않는다면 말이다. 누군가는 우리에게 닥친 위기가 불가역적이라고 한다. 맞다. 어떤 위기는 그렇다. 그러나 바로 그 재난과 상처의 경험으로 인해 새로운 전략과 행위자성(agency)2이 탄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모르고 있다. 우리는 함께 힘을 합쳐 되돌릴 수 있다. 바로 당신이 동참한다면 말이다.

1. 전통적인 돌봄의 우선순위와 규범을 넘어 모든 존재를 돌봄의 범주에 포함시키는 새로운 윤리이자 실천. 여기에는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이 해당된다.
2. 사회 구조를 변혁 또는 재생산할 수 있는 사회 구성원들의 행위 양태 또는 역량

덧붙이는 글 | 글 김정희원 애리조나주립대 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이 글은 참여연대 소식지 <월간참여사회> 2023년 1-2월호에 실립니다. 참여연대 회원가입 02-723-4251


태그:#참여사회, #참여연대, #돌봄, #공포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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