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환혼: 빛과 그림자>의 한 장면.

tvN <환혼: 빛과 그림자>의 한 장면. ⓒ tvN

 
무사들이 이끄는 가상의 왕국이 배경인 tvN 판타지 사극 <환혼: 빛과 그림자>는 종교 분위기가 느껴질 듯하다가도 잘 느껴지지 않는 드라마다. 종교 색채가 느껴질 듯하는 것은 <환혼> 속의 무사들이 신비한 술법을 부리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드라마는 종교를 전면에 내세우지는 않는다. 그래서 고대 사회에 존재했던 무사와 종교의 상관관계를 접하기는 힘들다.
 
고대 한국의 무사들이 종교적 배경을 갖고 있었다는 점은 화랑도의 수행 방식에도 반영됐다. 화랑들이 샤머니즘이나 산신 숭배 등을 존중했다는 점이 이들의 수련 과정에서 나타났다.
 
화랑 입문 2년 뒤인 611년에 만 16세의 김유신은 중악산에 올랐다. 본격적 활동에 앞서 산상(山上) 수행에 나선 것이다.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에 묘사된 이때의 수련 방식은 현대인이 볼 때 무사인지 무속인인지 헷갈릴 정도다.
 
산 위에서 그는 "저에게 능력을 주십시오"라며 하늘에 기도했다. 그런 뒤, 신비한 노인이 출현해 술법을 전수해주고 사라졌다. 그는 노인을 2리 정도 따라갔다. 이 시기의 2리는 8킬로미터가 아닌 10킬로미터였다. 그 거리를 따라갔더니 노인은 사라지고 오색 구름만 찬란했다고 김유신 열전은 전한다.
 
그는 이듬해에도 산상 수련에 나섰다. 이번에는 보검을 들고 열박산에 올라 향을 피우며 하늘에 빌었다. 그랬더니 하늘에서 광채가 내려오고, 그것이 보검을 감싸고 돌았다. 칼이 저절로 움직일 듯했다고 열전은 전한다.
 
 tvN <환혼: 빛과 그림자>의 한 장면.

tvN <환혼: 빛과 그림자>의 한 장면. ⓒ tvN

 
대표적인 화랑인 김유신이 이런 수행을 했다는 것은, 이야기의 사실 여하를 떠나, 고대 무사들의 수련에서 종교적 요소가 중요했음을 보여준다. 조선시대 사전인 <훈몽자회>에, 박수무당을 지칭하는 한자 격(覡)이 화랑을 뜻하는 '화랭이'로 풀이된 것은 화랑과 고대 종교의 상관성을 반영한다.
 
'역사는 아와 비아의 투쟁'이라는 명제로 유명한 신채호의 <조선상고사>는 선배라는 단어를 설명하면서 "선배는 이두로 선인(仙人) 혹은 선인(先人)으로 표기했다"라고 한 뒤 선배들은 수두 즉 소도라는 신단을 지키는 무사들이었다고 설명한다. 현대인들은 후배의 반대 개념으로 이 단어를 사용하지만, 이는 원래는 신선교 성직자를 지칭하는 용어였다.
 
<조선상고사>는 "소도는 수두의 음역"이라면서, 고조선 국교인 신선교(신선도)의 신성 구역인 수두 안에서 선배들이 선발됐다고 말한다. 수두 중의 최고인 신수두에서 이 이벤트가 벌어졌다고 한다. "선배는 신수두 제단 앞에서 열린 시합을 통해 선발됐다"라며 "이들은 학문에 힘쓰는 한편, 수박·격검·궁술·기마·택견·깨금질·씨름 등의 각종 기예를 했다"라고 서술한다.
 
독립운동가이자 역사학자인 안확은 일제강점기 때 저술한 <조선 무사 영웅전>에서 무사들의 내면 세계와 관련해 "그 내적 발전의 기초는 상무적인 천성에 있거니와, 한편으로는 천신을 받들어 믿는 종교적 정조(情調)가 외적으로 표현된 것이기도 하였다"라고 평했다.
 
"그런즉 무사는 처음부터 종교(巫)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라고 그는 말한다. '종교' 옆에 무당을 지칭하는 무(巫)를 병기한 것은 신선교를 비롯한 상고시대 종교들이 샤머니즘 혹은 무속적 성격을 띠었기 때문이다.
 
무사와 종교의 연관성은 유럽 역사에서도 당연히 나타난다. <조선 무사 영웅전>은 "서양의 무사도는 기독교를 옹호함에서 발생한, 다시 말하면 기독교의 방편 혹은 감화로 성립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종교와 불가분의 관계' 무사
 
 tvN <환혼: 빛과 그림자>의 한 장면.

tvN <환혼: 빛과 그림자>의 한 장면. ⓒ tvN

 
물론 고대의 모든 무사들이 종교 권력과 연결된 것은 당연히 아니다. 당대의 합법적 공인 없이 무력 혹은 폭력을 행사하는 집단은 어느 시대나 있었다. 하지만 주도권을 잡은 쪽은 공인된 무사들이었다.
 
"종교와 불가분의 관계"인 무사의 존재는 한국사에 등장하는 승군들에게서도 발견된다. <고려사> 최영 열전에 따르면, 최영 장군은 "당태종이 우리나라를 공격했지만, 우리나라가 승군 3만 명을 출동시켜 그들을 격파했다"라고 언급했다. 당태종의 고구려 침공을 막은 원동력 중 하나가 승군들이었다고 지적한 것이다.
 
<조선상고사>는 "승군은 국선(國仙)의 수하였다"라고 말한다. 승군은 종교 무사단을 이끄는 국선의 지휘를 받았다고 한 뒤 "승군의 내력을 모르면 고구려가 당나라 30만 대군을 물리친 원동력 뿐만 아니라, 명림답부가 이끈 혁명군의 중심이나 강감찬이 거란을 격파한 요인을 알 수 없게 된다"면서 "이렇게 되면 고구려·백제·신라로부터 고려까지 천여 년 동안의 군사제도를 이해할 수 없게 되는 것"이라고 주의를 준다.
 
불경뿐 아니라 무예도 연마하는 승군의 모습은 임진왜란 승병장들의 활약을 통해서도 한국 역사에 각인됐다. 서산대사나 사명대사는 일본군의 침략 앞에서, 살생을 금하는 불교 계율을 초월한 일로 인해 역사에 두고두고 기억되고 있다.
 
고대 사회의 무사들이 종교적 배경을 가졌다는 점은 그들의 무력 행사가 사회적 거부감을 덜 초래한 이유에 대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신성한 종교 제단을 지키기 위해 무예를 단련하는 그들의 임무가 살상 행위에 대한 반감을 누그러트리거나 혹은 정당화하는 측면이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에는 정치권력이 주축이 된 국가권력이 무력 행사의 합법성 여하를 결정한다. 군대나 경찰의 물리력 행사가 불법으로 규정되지 않는 것은 정치권력의 승인 때문이다. 이런 공인을 받지 못하면 조폭이나 깡패 혹은 반란단체 등으로 불리게 된다.
 
고대에는 그런 공인을 종교가 해주었다. 종교와 정치가 분리된 시기에는 국가권력도 해주었지만, 이런 공인의 시초는 종교에서 찾을 수 있다.
 
종교권력의 승인을 받는 무력 행사는 정치권력의 승인을 받는 무력 행사에 비해 훨씬 잔혹하게 될 수도 있다. 오늘날 종교의 이름으로 벌어지는 각종 테러가 그것을 웅변한다. 한편, 종교적 배경을 갖는 무력 행사는 여타의 무력 행사에 비해 좀더 신중해지거나 절제되는 측면도 있는 게 사실이다. 신체적 제압을 주 업무로 삼는 무사들이 오랫동안 대중의 배척을 받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를 그런 데서도 찾을 수 있다.
 
<환혼>의 무사들은 종교적 배경이 명확하지 않은 상태에서 술법을 주된 무기로 내세우고 있지만, 실제의 주류적 무사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힘이 종교적 숭배와 관련된 신성한 행위에 쓰인다는 점을 드러내는 데 신경을 썼다.
환혼 무사 무인 화랑 조의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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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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