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1.10 05:09최종 업데이트 23.01.10 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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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런던 영국 박물관에 전시된 파르테논 신전 외벽의 조각들로 '엘긴 마블스'이라고 불린다. ⓒ 연합뉴스


기대해도 될까, 세상을 놀라게 할 영국 박물관의 결단을. 1월 3일 영국 일간지 <텔레그래프>는 영국 박물관 대표 이사 조지 오스본이 "문화 교류"의 일환으로 그리스 문화재 반환 합의문을 작성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지난해부터 계속 말을 아끼던 영국 박물관은 최초로 "건설적 대화"를 인정했다. 그리스 정부는 "합의된 바가 없다"고 했지만 지난 12월 초 "의미심장한 진전"이 있다고 보도한 측은 그리스였다.  

양쪽이 막판 힘겨루기 혹은 조율 단계 중인 논란의 문화재는 영국 박물관의 '엘긴 마블스(Elgin marbles)'다. 기원전 5세기에 지어진 파르테논 신전의 대리석 조각물이다. 현재 6개국에 흩어져 있는데 영국 박물관이 압도적으로 소유 중이다. 본토 그리스에 남아 있는 양과 엇비슷하다. 무거운 대리석이 바다를 건넌 데에는 엘긴 백작이 있다.  


15세기부터 그리스는 오토만 제국의 지배하에 있었다. 1799년 오토만 제국으로 파견된 엘긴 백작은 1801년부터 제국의 허락을 받고 조각을 신전에서 떼어내 영국으로 들여온다. 하지만 몇 년 후 경제난에 봉착, 영국 정부에 팔겠다는 의사를 전했다. 위원회를 조직해 반입 과정을 검토한 하원은 합법적이었다고 최종 결정내리고 엘긴이 제시한 금액의 절반도 안 되는 가격에 1816년 구입했다. 이후 영국 박물관에 전시되었다.   

이 이야기는 지난번 글의 베닌 브론즈와 사뭇 다르다. 베닌 브론즈는 박물관들이 미술 시장에서 샀지만 시작이 약탈이었다는 명백한 결함이 있었다. 찜찜하게 버티는 대신 독일은 나이지리아의 문화 민족주의 주장을 수용하고 문화재를 반환했다. 대신 국제 사회에서의 이미지 개선과 에너지 개발 등 경제적 실리를 취했다. ("잘못 시정하러 왔다" 놀라운 독일 행보, 그 속의 큰 그림 http://omn.kr/224g4)

반면 엘긴 마블스의 경우, 구입 경로가 합법적이었다는 19세기 영국 하원 판단을 뒤집지 못하면 그리스의 문화 민족주의 주장은 설득력을 얻기 힘들다. 문화 국제주의를 내세우는 영국과 평행선을 달린 이유다. 이런 상황에서 물꼬를 튼 건 그리스다. 글로벌 박물관을 꿈꾸는 영국 박물관이 거부하기 어려운 제안, 즉 그리스 땅을 단 한 번도 떠난 적 없는 문화재를 대여해 줄 테니 대리석 소유권을 반환하라고 한 것이다.
   
문화 민족주의에서 문화 국제주의로
 

영국 런던 영국 박물관에 전시된 '엘긴 마블스' ⓒ 연합뉴스

 
그리스가 문화 국제주의 전략에 도달하기까지는 수 십 년이 걸렸다. 시작은 문화 민족주의였다. 그리스  문화부 장관 멜리나 메르쿠리(Melina Mercouri)는 1983년 영국이 엘긴 마블스를 훔쳐갔다며 "우리의 역사이고 우리의 영혼이니" 반환하라고 요구했다. 거부할 경우 이 문제를 법원으로 가져갈 것이라 했지만 영국은 1984년 공개적으로 거부 의사를 표했다.   

국제 사회에서도 통하지 않았다. 1985년 이 문제를 법률적으로 따진 미국 스탠퍼드 법대 존 헨리 매리맨(John Henry Marryman) 교수는 법원에서 그리스가 영국 박물관을 이길 수 없다는 요지로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도둑맞았다'는 그리스 주장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세 단계가 검토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첫째, 오토만 제국이 유물 소유권을 엘긴 백작에게 줄 권한을 가지고 있었는가 여부다. 답은 있었다다. 13세기에 외부 지배에 들어간 그리스는 1460년 이후로는 오토만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그리스 독립은 1832년이다. 신전이 그리스의 '영혼'이 된 것은 독립 후의 일로, 자국의 역사적 문화적 기원으로 고대 아테네를 놓고 그에 따라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생겼다.
  
둘째, 오토만 제국이 엘긴 백작에게 조각을 파내서 영국으로 가지고 가도록 허가했는가다. 답은 그렇다다. 엘긴 백작은 신전의 유물을 그림으로 그리고, 본을 뜨기 위해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고, 떼어내어 영국으로 가져갈 수 있다는 문서를 발급받았다.

셋째, 엘긴 백작이 한 행동이 오토만 제국이 허가한 권한 범위 내에서 이루어졌는가다. 답은 그렇다다. 떼어내는 과정에서 '야만적이었다'는 발언도 있었지만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는 판단이 일반적이다.

매리맨 교수는 법적으로는 그리스가 영국을 이길 수 없고 민족주의에 기반한 주장은 감정적이기 때문에 그리스가 보다 강력한 주장을 만들어야  반환이 가능할 것이라 판단했다. 이후 논쟁은 사그러들었다.

2015년 그리스는 문화재 반환을 다시 추진하며 "외교적 정치적" 접근을 발표했다. 소송 가능성 대해 당시 문화부 장관 니코스 시다키스(Nikos Xydakis)는 "국제 재판소의 결과를 확신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 해 12월 영국 박물관은 소유권에 문제가 없음을 확인하려는 듯 러시아 예르미타시 박물관에 대리석 몇 점을 대여해 그리스를 자극했다.

 2019년 8월 말 그리스 총리 키리아코스 미초타키스는 놀라운 발상의 전환을 보였다. "아크로폴리스가 굳이 그리스에 귀속될 필요는 없다"고 한 것. 이는 엘긴 마블스 논의를 '도둑맞은' 자국 문화가 아닌 보편적 문화 수준으로 확장하겠다는 뜻이다. 그는 그리스에 있는 나머지 조각들과 "통합"될 때 엘긴 마블스가 인류 전체의 문화유산으로서 온전한 가치를 발휘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첫 움직임으로 일정 기간 조각품을 보내라. 그러면 그리스를 한 번도 떠난 적 없는 아주 귀한 작품을 영국에서 전시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제안했다. 영국 박물관이 자랑하는 엘긴 마블스가 빠져 나가도 박물관 명성에 금이 가지 않도록 비슷한 급의 문화재로 박물관을 채워 주겠다는 제안이다. 물론 장기 대여다. 구체적인 리스트를 말하지는 않았지만 아가멤논 황금 마스크가 올 수도 있다는 소문도 있었다.

선악의 잣대를 뺀 그리스 정부 측 언어에 영국 박물관도 누그러졌다. 영국 박물관도 법적 문제와 별개로 곱지 않은 시선을 알고 있다. 애초부터 있었다. 대표적으로 19세기 영국 시인 바이런은 신전에서 조각을 강제로 떼어 낸 엘긴의 행동과 그것을 구입하는 의회에 "야만적"이라고 분노한 바 있다. 1984년 그리스를 방문한 노동당 대표 닐 키넉은 귀국 후 신전이 "이빨 없이 웃는 것 같다"며 도덕적 측면에서 반환해야 한다고 일찌감치 주장했다.  

최근에 이 여론은 더 커지고 있다. 1월 초 <유고브> 여론 조사에 따르면 53%가 반환 찬성(20%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21% 반대)이다. 게다가 바티칸이 소유한 파르테논 유물 세 점을 기부 형식으로 돌려보낸다는 지난 12월 프란치스코 교황 발표는 영국 박물관에 대한 압력을 최고조로 올렸다.   

보편적 인류를 위한 글로벌 박물관
 

영국 박물관 이사회 대표 조지 오스본 ⓒ 연합뉴스


이 문제를 해결할 영국 측 대표는 영국 박물관 이사회 대표 조지 오스본이다. 2010년대 초반 보수당 카메론 내각의 2인자 재무장관이었다. 브렉시트 당시 EU 잔류를 표방했다가 물러나고 2021년 영국 박물관 이사회 대표가 되었다. 옥스퍼드 대학 역사 전공자로, 고고학이나 미술사보다는 부족하겠지만 문화 영역에 대한 역량은 나름 있다.

오스본은 의외로 빠른 행보를 보였다. 7월 대표로 취임하고 11월 런던 그리스 대사관저에서 그리스 총리와 만나 기본 입장을 교환했다. 2022년 7월 영국 박물관 이름으로 "역동적이고 긍정적인 대화를 할 공간이 있다"고 믿는다며 파르테논 파트너십을 제안했다. 문화 교환의 일환으로 엘긴 마블스를 반환할 수 있으나 소유권은 포기할 수 없다는 입장으로 협상 출발점에 섰다.

오스본은 영국에 불리한 상황임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다. 11월 오스본은 문화재 반환 요청 목소리가 높아지는 것에 대해 "세계화가 기울고 자국 우선주의와 민족주의가 다시 부상하는 시대 흐름을 타고 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흐름과 반대로 가겠다며 영국 박물관의 미래를 "갈라지는 세계 속에서 사람들을 묶어내는 장소"라고 전망했다.

오스본의 표현을 빌리면 "보편적 인류를 위한 글로벌 박물관"이다. 영국 박물관은 10억 파운드(약 1조 6천 억 원) 예산이 소요될 박물관 개선 계획을 조만간 발표할 것으로 알려졌다. 소장한 문화재로 문명 간의 상호 연관성을 시각적으로 설명해 내겠다는 계획이다. 이집트관에서 느껴지는 제국주의 흔적과 한국관에서 느껴지는 서구 문명 중심의 냄새를 지워야 가능한 야심찬 목표다. 까다롭지만 21세기에 반드시 필요한 시도다. 또 전 세계에서 이 작업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몇 개 안 되는 박물관이다.

이 계획이 문화재 반환을 피하려는 핑계라는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서는 인류 보편적 유산인 엘긴 마블스가 그리스로 돌아갈 때 제 가치를 발휘할 것이라는 그리스 주장에 답해야 한다. "보편적 인류를 위한 박물관"이 될 수 있도록 돕겠다는 그리스 제안은 결코 나쁘지 않다.

그리스는 현재 영구 소유권을 원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국 박물관이 소유권을 포기할 수 있을까. 양쪽의 마지막 최종 협상이 어떻게 끝날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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