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1.16 14:14최종 업데이트 23.01.16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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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4일(현지시간)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미국 워싱턴DC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강제징용(강제동원) 전범기업에 대해 배상은 물론이고 사과도 요구하지 않는다는 윤석열 정부의 방침이 공표되자, 그동안 '한국이 해법을 가져오라'고 딱딱하게 대하던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15일 미국 방문 중 워싱턴DC 기자회견에서 응원 메시지를 보냈다.

15일 자 <니혼게이자이신문> '기시다 수상의 기자회견 요지' 기사에 따르면, 그는 한국 정부가 일본 기업의 책임을 떠안기로 한 것이 작년 11월 한일 정상회담에 따른 결과임을 두 번이나 강조하면서 "이 노력을 아무쪼록 계속해줬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일본제철과 더불어 강제징용 문제의 핵심 당사자인 미쓰비시그룹도 반응을 보였다. 12일 자 <지지통신> '일본 기업, 양국 교섭을 주시' 기사는 "한국에서 배상명령을 받은 미쓰비시중공업이나 일본제철은 일한 정부 간의 교섭을 계속해서 주시할 태세다"라는 말로 반응을 전했다.

미쓰비시중공업 사장은 지난달 23일 보도된 <산케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피해자들의 배상 요구에 응할 뜻이 없음을 명확히 밝혔다. <산케이신문>의 뉴스 사이트인 이 매체에 실린 '미쓰비시중공업 사장 이즈미사와 세이지(65), 방위비 대폭 증가, 사업의 연속성 높인다'라는 인터뷰 기사는 "우리는 일관되게 바뀌지 않았고, 이미 일한청구권협정 속에서 해결됐다는 생각이다"라는 그의 말을 전했다.

이즈미사와 사장은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에 의해 징용 문제가 해결됐다면서 "종래의 스탠스는 변경하지 않는다"라고 못을 박았다. 그런 뒤 "계속해서 정부 간의 교섭을 지켜보고 싶다"라고 덧붙였다.

한일기본조약의 부속 협정인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은 일제강점기에 발생한 일반 민사채권관계를 국가 차원에서 더 이상 논의하지 않기로 하는 협정이었을 뿐, 강제징용·위안부·강제징병 같은 불법행위 배상 청구를 포기하기로 하는 협정은 아니었다. 이런 사실을 잘 알면서도 미쓰비시 사장이 청구권협정을 운운하며 '종래의 스탠스'를 유지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미쓰비시는 양국 정부의 교섭을 계속 지켜보겠다고 공언했다. 자신들과 입장이 똑같은 기시다 내각을 주시할 필요는 없으므로, 미쓰비시가 주시하는 대상은 당연히 윤석열 정부다. 윤 정부가 이 문제를 어떻게 마무리할지 지켜보겠다는 것이 12월 23일과 1월 12일에 나온 미쓰비시의 입장이다.

미쓰비시의 만행
 

1973년 5월 16일 자 <조선일보> 기사 "일 변호사 조사단이 밝힌 북해도 한국인 강제 노동 진상 - 감방 같은 수용소서 학대 생활" ⓒ 조선일보


미쓰비시그룹은 한국인 강제징용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우리 외교부의 방해로 훈장 서훈이 취소된 양금덕 할머니가 강제노역한 곳도 미쓰비시중공업이다. 가혹한 노동과 혹독한 처우로 유명한 군함도,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가 추진되는 사도광산 역시 미쓰비시광업(현 미쓰비시머티리얼) 소속이었다.

미쓰비시 강제노역의 잔혹성은 군함도나 사도광산은 물론이고, 홋카이도의 미쓰비시 비바이광산 같은 데서도 증명됐다. 일본 변호사들이 주축이 된 '홋카이도 한국인 강제연행 진상조사반'의 보고서에서도 그 점이 드러났다. 이 보고서를 소개한 1973년 5월 16일 자 <조선일보> 기사는 그곳 한국인 숙소가 '타코헤야'로 불린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광산의 한국인 합숙소는 다꼬헤야라고 불리어졌다. 다꼬(문어)헤야(방)란 굶주림 속에 인간 최하의 생존마저 위협받는 노무자 수용소에 붙여진 이름. 즉 먹을 것이 없으면 6개월간 자기 집에 들어가 자기 발을 뜯어 먹고 살아가는 문어의 생태에서 따온 말이다."
 
그런 명칭이 붙은 것은 미쓰비시그룹이 '죽지 않을 정도'로 식사를 적게 줬기 때문이 아니다. 굶어 죽어도 좋다는 식으로 극소량을 제공했기 때문이었다. 위 기사는 일본 변호사들의 보고를 근거로 "많은 노무자들이 굶주려 죽었다"고 말한다. 광산 노동이 힘들어서가 아니라 배가 고파 죽게 된 어느 한국인은 "내 영혼은 왜놈 감독자 자자손손을 저주하겠다"는 유언을 남기고 타코헤야 안에서 눈을 감았다고 한다.

미쓰비시의 만행은 그 정도에 그치지 않았다. 긴급 상황이 발생해 한국인들이 귀찮아지자 한국인들의 대량 몰살을 방치하기도 했다. 일본 변호사들이 보고한 내용을 위 기사는 이렇게 소개한다.
 
"현재 에베쓰시에 거주하는 일본인 나구모 씨는 '43년 가을의 대홍수 때 미쓰비시 비바이 광산의 다꼬헤야에 갇혀 있던 한국인 노무자 1백 명이 몰살했는데, 이는 산사태가 나자 일본인 감시원들이 다꼬헤야의 자물쇠를 채워놓은 채 산으로 도망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미쓰비시의 전쟁범죄는 강제징용 분야에 국한되지 않았다. 이것은 위안부 강제연행에서도 나타났다. 미쓰비시만 그렇게 한 것은 아니지만, 이 기업은 군대 위안소와 비슷한 시설을 유치해 한국 여성들을 착취하는 일에도 가담했다.

면죄부 준 윤석열 정부
 

12일 오전 서울 여의도 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열린 강제징용 해법 논의를 위한 공개토론회에서 피해 유가족과 참석자들이 일본 정부의 사과를 촉구하는 피켓을 들어보이고 있다. ⓒ 유성호


1992년 8월 6일 자 <동아일보> '일제 탄광에도 위안부 보내' 기사는 "홋카이도신문은 당시 미쓰비시 오유바리광업소에서 강제로 일했던 조선인 탄광 위안부의 사진을 처음으로 입수"해 보도했다고 소개했다. 미쓰비시 광산에서 징용 피해뿐 아니라 위안부 피해도 함께 발생했던 것이다.

<동아일보>는 <홋카이도신문>을 근거로 위안부 배치가 현지 광산업 관계자들의 요청으로 이루어졌다고 보도했다. "이 신문은 인근 오타루에 본사를 둔 오타루신문의 1939년 10월 13일자 보도를 인용, 도(홋카이도) 석탄광업회가 도청 보안과에 대해 16개 탄광에 26개 소의 조선요리집(식당을 겸한 위안소)을 개설할 수 있도록 허가해달라고 요청했다고 보도했다"라는 사실을 전했다.

기사에는 일본 방적공장에 취업시켜 준다는 말을 듣고 따라나섰다가 탄광 위안부가 된 한국 여성이 등장한다. 그는 정기 검사를 받으러 홋카이도 현지 병원에 갔다가 거기서 만난 한국인 통역에게 자신의 사연을 소개했다.

이런 여성들이 얼마나 참혹한 생활을 했는지는 홋카이도 광산에 관한 위의 진상조사반 보고서에도 묘사돼 있다. 미쓰비시로 끌려갔든 여타 기업으로 끌려갔든 다를 바 없었다. 이들 중 일부는 더 이상 생명을 유지하기 힘든 상태로 내몰렸다. 위 <조선일보> 기사는 보고서 내용을 이렇게 인용했다.
 
"간호부로 채용한다는 꾐에 속아 이곳에 온 한국 여성들이 위안부 노릇을 강요당하고 저마다 바다에 투신, 집단자살을 했다. 나는 지금도 그 바닷가의 파도 소리가 '엄마', '엄마' 하고 부르는 소리로 착각할 때가 많다."
 
위 문장은 진상조사를 벌인 일본인들의 보고서를 번역한 것이다. 엄마를 부르는 위안부 피해자들의 환청이 들릴 정도였던 진상조사반 변호사들의 심리적 아픔을 알 수 있다.

미쓰비시그룹이 저지른 죄과는 이처럼 한둘이 아니다. 강제징용은 물론이고 위안부 연행으로도 한국인들을 괴롭혔다. 그런데도 윤석열 정부는 미쓰비시에 면죄부를 주겠다고 지난 12일 공표했다. 그 책임을 대한민국 국민을 대표하는 대한민국 정부가 떠맡도록 하겠다고 천명했다. 미쓰비시는 이런 윤석열 정부를 끝까지 주시하겠다는 입장을 뻔뻔하게 밝혔다.

그동안 윤석열 정부는 전범기업들이 성의 표시만큼은 하도록 하겠다고 공언해왔다. 하지만 전범기업과 일본 정부는 자신들의 성의 표시가 아닌 윤 정부의 성의 표시에 관심을 갖고 있다. 기시다 총리는 '아무쪼록 계속 노력하기 바란다'며 분발을 촉구하고 있고, 미쓰비시는 의심이 다 가시지 않은 듯 '계속 주시하겠다'고 말하고 있다. 잘못된 길로 들어선 한국의 처지를 반영하는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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