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1.16 12:15최종 업데이트 23.01.16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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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는 부산보다 작은 면적에 600만 명 정도의 인구가 모여 사는 도시 국가입니다. 좁은 곳에 많은 이들이 어울려 살아야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대부분 아파트에 삽니다. 싱가포르 정부는 일찍이 HDB라 부르는 공공임대주택을 지어 주거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지금은 전체 국민의 80% 정도가 HDB에 삽니다.

제가 싱가포르의 HDB를 주택문제 해결을 위한 대안으로 소개를 하면 싱가포르에서 생활한 경험이 있는 독자들이 싱가포르의 HDB는 수준이 떨어져서 한국인이 살 만한 곳이 아니라는 댓글을 많이 남깁니다. 2000년 이후에 지은 HDB를 보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층수도 높고 고급 자재를 사용해서 고급 민간아파트와 비교해도 뒤처지지 않습니다. 저 역시 5년 전에 지어진 HDB에 살고 있는데 충분히 만족하며 살고 있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동네의 HDB 단지의 모습입니다. ⓒ 이봉렬

 
하지만 오래된 HDB는 많은 이들의 말 대로 좁고 낡고 불편합니다. 싱가포르의 HDB는 1960년대 초부터 짓기 시작했으니까 지은 지 오십 년 넘은 HDB는 여러가지로 불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래된 HDB도 정부가 지속적인 업그레이드 프로그램을 통해 살 만한 곳으로 관리를 해 줍니다.

리프트 업그레이드 프로그램

대표적인 것이 2001년부터 시작된 리프트 업그레이드 프로그램(LUP)입니다. 1990년 이전에 지어진 HDB는 엘리베이터가 있어도 모든 층에 서지는 않았습니다. 홀수층이나 짝수층에만 서거나 3층에 한 번씩만 서도록 된 곳도 있었습니다. 이런 경우 짐을 나를 때나 몸이 불편한 노인은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휠체어를 이용해야 하는 장애인은 아예 접근 자체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2001년부터 모든 층에 엘리베이터가 서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15년간 48억 싱가포르 달러(약 4조 5천억원)가 들어가는 개선 프로그램이 시작되었습니다. 모든 층에 엘리베이터가 서지 않는 HDB단지에서 주민의 75% 이상이 동의를 하면 정부가 전체 비용의 90% 이상을 지원해서 기존의 엘리베이터를 개조하거나 새로운 엘리베이터를 만듭니다.

이 프로젝트로 인해 2001년 5300개 이상의 HDB단지에서 매 층 엘리베이터가 서지 않는 불편을 겪었지만 2021년에는 150단지로 줄었습니다. 그런데 이 150개 단지 안에 있는 가구 중에 거동이 불편한 노인이나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장애인이 있어 엘리베이터가 꼭 필요하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런 경우를 위해서 정부는 엘리베이터가 꼭 필요한 가구를 위해 이사 비용으로 3만 달러 (약 2800만원)을 지원해 줍니다. 정부가 공급하는 HDB에 엘리베이터가 있어야 하는 건 당연한 건데 그걸 해 주지 못했기 때문에 다른 방법으로 지원을 하는 겁니다.
 

지하철에서 내리면 바로 엘리베이터가 있어서 누구나 쉽게 이용할 수 있습니다. ⓒ 이봉렬

 
엘리베이터 설치에 대한 정부의 관심은 주거공간인 HDB 뿐만이 아닙니다. 지하철 역마다 가장 접근이 쉬운 위치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해서 휠체어를 타고 지하철을 이용하는데 아무런 불편이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횡단보도에 턱이나 장애물이 없어 휠체어가 다니는데 불편함이 없지만 횡단보도 대신 육교가 있는 곳에는 육교에도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온 국민의 엘리베이터에 대한 접근을 기본권으로 여기고 그걸 보장해 주기 위해 정부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나라에 오래 살다 보니 한국 언론을 통해 택배 기사들에게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지 못하게 해서 무거운 짐을 들고 계단을 이용하게 했다든가, 엘리베이터가 2층에는 서지 못하게 막아 놔서 휠체어를 탄 거주자가 매일 불편을 겪는다는 뉴스를 접하게 되면 뉴스가 아니라 "세상에 이런 일이" 같은 프로그램을 보는 기분이 듭니다.

'겸손은 힘들다 뉴스공장'의 위험한 농담

지난 금요일에는 그런 이야기를 실시간으로 들었습니다. TBS를 떠나 유튜브에서 새로운 방송을 시작한 방송인 김어준씨의 '겸손은 힘들다 뉴스공장'에 변상욱 대기자가 나왔습니다. 서로 인사를 나누는 중에 변기자가 대뜸 스튜디오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하면 안 된다는 말을 꺼냈습니다. 대화 내용을 그대로 옮겨 보겠습니다.

김) 스튜디오는 마음에 드십니까?

변) 일단 중요한 것은… 엘리베이터 설치가 댓글에 왔다 갔다 하던데… 설치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저도 아파트가 16층인데 걸어 다니는데, 4층 올라오는 거를 엘리베이터를 설치한다 그러면 김 공장장의 몸무게를 줄이는데 상당히 지장이 있고… 


김) 저는 안 타려고요.

변) 아, 스태프들의 건강을 생각해서도… 

김) 게스트 중에 70대 이상 게스트 분들도 있어요.

변) 그럼 박지원 선생 부르지 말라고. 그런 양반들… 뭐, 그 나이 들어서 헉헉대는 사람을 불러 갖고 계단을 오르게…

김) 정세현 장관님 불러야 하는데…

변) 아… 정 장관께서는 조금… 아, 아쉽긴 한데, 아무튼 그래도… 엘리베이터 보다는 뭐, 조명이나 아니면 장비들 보완할 것들도 많을 텐데… 잘 모르겠습니다.

김) 예, 많습니다. 엘리베이터도 근데 설치하려구요. 딱 두 사람만 들어갈 수 있는 미니 엘리베이터를 지금 알아보고 있습니다.

변) 알겠습니다. 그럼 아예 싸게 리프트로 하시죠.

김) 공사현장의 리프트?

 

'겸손은 힘들다 뉴스공장'에 출연한 변상욱 대기자의 모습 ⓒ 유튜브 화면 갈무리

 
"김공장장의 몸무게를 줄이"고 "스태프들의 건강을 생각해서" 4층 건물에는 엘리베이터를 설치하지 말라는 변 기자의 농담을 전 단순한 농담으로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게스트 중에 70대 이상 게스트 분들도 있"다며 에둘러 말하는 김어준씨에게 "나이 들어서 헉헉대는 사람을 불러 갖고 계단을 오르게…"하냐는 말을 할 때는 기함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나이 들어서 헉헉대"며 계단을 올라야 하는 노인도, 휠체어를 타기에 엘리베이터가 아니면 이동할 수 없는 장애인도 변 기자가 앉아 있던 그 게스트 자리에 앉을 자격이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절대 할 수는 없는 말이었습니다.

물론 가까운 사이에 가볍게 농담삼아 한 이야기라는 건 압니다. 하지만 유튜브 채널이라고는 하지만 이미 100만 구독자를 확보하고 있는 주목받는 시사프로그램에서 할 만한 농담은 아니었습니다. 대기자라는 타이틀로 공중파 방송진행을 하는 이의 격에도 맞지가 않습니다.

엘리베이터는 노약자와 장애인의 이동권 확보를 위한 기본 시설입니다. 16층 아파트를 걸어 다니는 건강한 몸의 소유자 변기자에게는 안 그럴 수도 있지만, 그 방송을 보고 있던 누군가에게는 4층으로 이동하는 엘리베이터가 방송을 위한 "조명이나 장비들"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중요할 수도 있습니다. 사회적 약자를 적극적으로 배제하는 그런 이야기를 더 이상 방송에서 듣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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