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1.19 11:08최종 업데이트 23.01.19 1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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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7월 16일 일본에 입국한 윤덕민 주일본 한국대사가 도쿄 하네다공항에서 한일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 연합뉴스


일본 외무성 간부가 "막판에 있는 게 틀림없다"고 발언했듯이 강제징용(강제동원) 문제를 봉합하기 위한 한일 양국의 공조가 마무리 국면에 돌입했다. 이 상황에서 윤덕민 주일한국대사가 목소리를 내고 있다. 18일 국내 언론은 <마이니치신문> 인터뷰를 근거로 "윤덕민 주일 대사 '일(日) 기업 사죄·기부 기대'", "주일대사, '강제징용 피고 일본 기업 사죄와 기부 기대'" 등의 기사를 내보냈다.

이런 보도들을 보면, 전범기업 대신 한국 정부 재단이 책임을 떠안기로 한 윤석열 정부가 일본 측에 최소한의 성의표시를 요구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윤 정부의 요청을 대변해 주일대사가 현지에서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판단을 갖게 되기 쉽다.


윤덕민 대사는 윤석열 정부 출범 보름 뒤인 작년 5월 26일 도쿄에서 열린 '아시아의 미래' 국제 콘퍼런스에서 한국 정부가 일본 기업을 대신해 피해자들에게 대위변제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최근 외교부가 공개토론회에서 공표한 것과 다를 바 없는 방식을 일찍부터 제안했던 것이다.

한국 외교부의 공표에 관해 18일 NHK는 "일본 정부 내에서는 '징용을 둘러싼 문제는 1965년 일한 청구권협정으로 다 해결됐다'는 일본의 입장과 모순되지 않으며 이를 기초로 해결책이 정리되면 수용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라고 보도했다.

한국 외교부가 공표한 내용이 자국의 입장과 모순되지 않는다는 이 보도는 외교부 방안과 다를 바 없는 윤덕민 대사의 제안 역시 일본의 입장에서 벗어나지 않음을 보여준다.

윤덕민 대사는 징용 문제뿐 아니라 안보 문제에서도 일본에 기울어 있다. 2001년 국립외교원 외교안보연구소의 <정책연구 시리즈>에 수록된 '21세기 일본의 대외정책 평가-새로운 대일정책 모색'이라는 논문에서 일본의 군사대국화에 촉각을 곤두세울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 바 있다.

윤 대사는 논문에서 한국의 비상 상황과 관련해 "유사시 일본 기지를 활용하는 문제는 우리의 사활적 이익"이라고 한 뒤 "일본의 군사적 역할 확대"에 대해 긍정적 입장을 피력했다. 한국 유사시에 자위대의 역할을 확대하는 방안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이다.

윤 대사가 이처럼 일본과 인식을 같이한다는 점과 더불어, 지난 12일을 전후한 시점부터 일본 정부가 흘리는 메시지들을 살펴보면, 그에 관한 18일 자 국내 언론보도는 초점을 비껴간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사죄와 자발적 기부를 기대한다는 그의 발언이 다중적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 주장에 동조하는 주일한국대사
 

서민정 외교부 아태국장이 12일 오전 서울 여의도 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열린 강제징용 해법 논의를 위한 공개토론회에 참석해 그간 국내 의견 수렴 및 대일 협의 경과를 설명하고 있다. ⓒ 유성호


12일 공개토론회를 계기로 일본 정부는 새로운 쟁점에 좀 더 집중하고 있다. 일본 기업의 책임을 떠안겠다고 공표한 한국 정부가 향후 일본 기업에 구상권을 행사할 여지를 봉쇄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불법행위를 저지르지 않은 제3자가 대신 책임을 진 뒤 불법행위자에게 변상을 요구하는 게 가능하므로 구상권 문제에 못을 박아두려 하는 것이다.

12일 자 <니시닛폰신문> '전 징용공의 배상 인수안, 구상권 포기하면 받아들인다 - 일본 정부' 기사에도 나타나듯이, 일본 정부는 한국 정부의 자발적 구상권 포기를 유도하고자 일종의 유인책을 구사하고 있다. 한국이 구상권을 포기한다고 명확히 선언하면 향후 일본 기업들이 한국 정부 산하의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에 자발적으로 기부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17일 자 <마이니치신문> 인터뷰 기사 '징용공 문제 일본 기업과 피해자의 화해를 기대, 윤 주일대사'에서 윤덕민 대사는 "한국이 정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입장"이라는 자신의 의견을 소개했다. 징용 문제는 일본이 아닌 한국이 해결해야 할 문제라는 일본 주장에 동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피해자들이 앞으로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으니, 피해자들과의 화해가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향후 있을지 모르는 추가 요구에 대비해 화해를 해둘 필요성을 언급한 것이다.

그가 말한 화해책은 "재단에 대한 자발적 기부"다. 강제징용피해자지원재단이 피해자들에게 금전을 지급하고 문제를 마무리한 뒤 일본 기업들이 자발적 기부를 해서 향후의 소송 가능성에 대비해야 한다는 인식을 피력한 것이다. 그런데 '자발적 기부' 방안은 그의 인터뷰 이전부터 일본 정부가 언론을 통해 흘린 내용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발적 기부를 촉구하는 그의 발언이 일본 정부를 겨냥한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일본 정부는 피해자와 한국민들이 자발적 기부를 받아들이고 구상권을 포기하기를 희망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자발적 기부를 촉구하는 것은 피해자와 한국민들을 겨냥한 것이라고 해석될 수밖에 없다.

그의 자발적 기부 발언은 일본의 성의표시를 촉구하는 것으로도 들릴 수 있지만 실제로는 한국민들이 '구상권 포기 및 자발적 기부'를 받아들이도록 촉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다중적인 발언을 통해 구상권 포기에 대한 한국 내 거부감을 약화시키는 것이 윤덕민 인터뷰의 실제 취지라고 볼 수 있다. 그가 일본의 자발적 기부를 촉구했다는 18일 자 국내 보도들은 발언의 본질을 벗어나 보인다.

피해자와 한국민 겨냥한 발언
 

17일 자 <마이니치신문> 기사 '징용공 문제 일본 기업과 피해자의 화해를 기대, 윤 주일대사' ⓒ 야후 재팬

 
일본 정부는 구상권만 포기된다면 자발적 기부는 물론이고 사과 문제에 관한 한국 정부의 주문도 받아들일 수 있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12일 공개토론회에서 한국 외교부는 일본의 사과를 받아내기 힘들다면서 "일본이 이미 표명한 통절한 사죄와 반성을 성실히 유지·계승하는 것이 중요하다"라는 입장을 공표했다. 일본이 기존에 표명한 '통절한 사과'로 강제징용 사과를 대체하자는 제안이다.

이와 관련해 12일 자 <산케이신문> '징용공 소송, 일본 기업에 대한 구상권 포기가 최저 조건' 기사는 "과거 담화의 범위 내라면 문제가 없다"는 일본 정부 관계자의 발언을 소개했다. 새롭게 '통절히 사과한다'고 표명하는 게 아니고 '통절한 사과'를 담은 과거 담화를 거론하는 방법이라면 한국의 방안을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통절한 사과나 반성을 언급한 무라야마 담화,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 고이즈미 담화, 간 나오토 담화, 아베 담화 중에서 일본이 가장 선호하는 것은 김대중-오부치 선언이다. 이런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이 작년 9월 15일 <지지통신>에 실린 '일한 의원들이 관계개선 모색, 98년 공동선언에 회귀를'이라는 기사다.

이 기사는 "한국 남부 제주에서 15일 일한·한일의원연맹 소속 의원들이 양국 관계를 테마로 의견을 나누었다"라며 "반성과 사죄, 미래 지향을 명기한 1998년 당시 오부치 게이조 수상, 김대중 대통령이 발표한 일한공동선언의 정신을 회복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쌍방에서 잇따라 나왔다"고 보도했다.

윤덕민 대사는 <마이니치신문> 인터뷰에서 피해자들이 향후 문제를 제기할 가능성을 고려해 일본이 사과를 해야 한다고 말한 뒤 김대중-오부치 선언을 업그레이드해 발표할 것을 제안했다.

지금 일본 측은 직접적 사과는 거부하면서도 '통절한 사과'가 언급된 김대중-오부치 선언에 대해서는 호감을 표시하고 있다. 이는 일본 정부가 이 공동선언의 정신을 높이 평가하는 방법으로 사과 문제를 마무리하려 할 가능성을 시사한다.

일본 측이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에 호감을 표하고 있으므로, 이 선언을 적극 추천하는 윤덕민 대사의 발언 역시 일본을 겨냥한 것이라고 보기 힘들다. 이 역시 일본을 상대로 촉구하는 발언 같지만 실제는 피해자와 한국민들을 겨냥한 다중적 발언이라고 볼 수 있다. 일본이 1998년 선언의 정신을 높이 평가하는 방법으로 사과 문제를 마무리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을 약화시키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주일한국대사가 일본의 입장을 대변하면 안 된다. 그 일은 주한일본대사의 소임이다. 윤석열 대통령과 박진 외교부 장관에 더해, 일본에 나가 있는 윤덕민 대사까지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를 편드는 것은 국민들을 허탈하게 만드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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