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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와 사람을 그리는 어반스케치를 하면서 서울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생각합니다. [기자말]
로댕의 조각 <칼레의 시민>중 일부분이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 있다. 로댕 방식으로 로댕 작품을 그려봤다. ⓒ 오창환

칼레는 프랑스 북부의 도시로 바다 건너 영국과 가장 가까운 곳이다. 중세 이후 교통과 교역의 중심지였으며 당연히 전략적 요충지였다. 프랑스와 영국 간의 100년 전쟁 당시 프랑스 왕은 칼레를 포기했고 칼레 시민은 1년간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성을 에워싼 영국군을 더 이상 막을 수는 없었다.

이때가 1347년이었는데, 영국 왕 에드워드 3세는 칼레시민의 항복을 받아들이는 조건을 제시했다. 그것은 칼레에서 가장 존경받는 6명이 모자를 벗고, 맨발로 목에 밧줄을 걸고 와서 칼레시의 열쇠를 넘겨준 다음 처형당하는 것이었다. 외스타슈 드 생 피에르 등 6명의 명사들이 자원하여 영국군의 진영으로 걸어갔다. 그러나 당시 임신 중이었던 영국 왕비가 간청하여 그들을 처형하지 않고 돌려보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잘 나타내는 일화로 유명하여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다. 그러나 당시 실제 처형이 계획된 것은 아니었고 일종의 퍼포먼스였다는 설도 있다.

그 후 칼레는 200년이 넘는 1558년까지 영국의 지배를 받았다. 지금 칼레는 영국으로 가는 해저 터널이 지나가는 교통의 중심지로, 유명한 항구이자 수산물 시장이며, 매년 천만 명 이상이 방문하는 관광도시다.
 
왼쪽 그림은 칼레가 어디있는지 보여준다. 칼레 건너편 영국은 도버시다. 칼레 바로 오른쪽으로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연출한 걸작 <덩케르크>의 무대가 되는 도시가 있다, 이런 지도도 복사물에 대고 그리는 것보다는 눈짐작으로 그리는 게 재미있다. ⓒ 오창환
 
19세기 후반에 칼레시는 레이스와 망사를 주로 생산하는 공업도시로 성장하고 있었는데, 산업의 변화와 인구 증가로 도시의 정체성이 느슨해질 것을 우려한 시의원들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백년전쟁의 유명한 일화로 기념물을 만들고자 했다. 그들이 생각한 것은 여섯 명의 시민 가운데 가장 유명했던 외스타슈 드 생 피에르 동상을 만들어 높은 받침대 위에 세우는 것이었고, 그것은 당연히 전통적이고 아카데믹한 것이어야 했다.

로댕의 반전

1884년 칼레시는 이미 정부의 의뢰를 받아 '지옥문'을 제작을 하고 있던 40대 중반의 로댕을 찾아간다. 칼레에 전해지는 드라마틱한 스토리는 로댕을 매혹시켰고 그는 곧 조각에 착수했다.

그런데 로댕은 한 명의 인물상으로 되어 있던 원래 계획을 바꾸어서 여섯 명의 군상을 만들기로 한다. 이런 착상은 한 사람의 영웅만을 찬양하는 불가침의 전통에 도전하는 것이었고, 집단이 소재가 되고 집단적 희생의 개념이 강조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작업을 거의 반쯤 했을 때 공개된 초안을 두고 격렬한 논쟁이 일어났다. 자신을 희생해서 시민을 살리는 초인적인 영웅의 모습을 상상하고 있었던 칼레시의회의 바람과 달리, 로댕의 초안에서 보이는 군상들은 초라하고 공포에 울부짖는, 우리 같은 평범한 인간들이었다.

여기저기서 비판이 들끓었고 조각을 계속 진행하기 위한 기부금 모금이 중단됐다. 게다가 기부금 위탁 은행이 갑작스럽게 파산하였고, 결국 모금 위원회가 해산되었다. 

그러나 로댕은 작업을 계속 이어갔는데, 각 인물들의 자세를 확정짓기 위해서 진흙으로 실물 절반 크기의 나체상을 만들고, 이어서 실물 크기의 나체상을 만든 후에 의상을 갖춰 입은 조각을 완성해 갔다. 1889년 석고 모형이 완성되어서 전시회에 모습을 드러냈다. 1892년 칼레시의 분위기가 바뀌면서 기부금 모금이 다시 시작되어 청동주조가 시작되었고 장장 6개월에 걸친 작업 끝에 첫 번째 에디션이 완성되었다.

로댕은 이 작품이 칼레시 광장 바닥에 관람객의 눈높이에 맞춰 설치되길 원했다. 6명의 칼레의 시민들이 항복할 당시 마을을 떠나 영국 왕의 막사로 향하는 순간처럼 보이도록 하기 위해서다. 시의회는 높은 받침대를 원했는데, 동상 제막식 때는 우스운 절충이 이루어져 높지도 낮지도 않은 받침대 위에 동상을 세우고 주변에 고딕풍의 철책을 치고 말았다. 

2차 대전이 끝나고 나서야 마침내 이 조각은 중세풍의 옛 시청 앞에 지면과 같은 높이로 설치된다. 로댕은 이 조각의 복제품을 몇 개 제작하였는데 그중 하나는 백년전쟁의 당사국인 영국의 국회의사당 앞에 세워졌다. 프랑스에서는 법적으로 한 가지 주형으로 12개의 에디션을 만들 수 있게 되어 있는데 '칼레의 시민' 12번째 에디션이 우리나라에 있다. 그런데 아쉽게도 현재 전시되고 있지는 않다(로댕에 관해서는 로댕 박물관장을 역임한 모니크 로랑이 지은 <으젠느 오귀스뜨 로댕>(열화당)을 바탕으로 썼다).

로댕의 작품이 평창동에도?

그런데 평창동에 있는 가나 아트센터 야외 전시장에도 '칼레의 시민' 중 한 명의 조각이 있어서 그것을 그리려고 평창동으로 향했다. 가나 아트센터에는 문신 작가의 '개미' 등 좋은 작품이 많이 있는데, 그중에 장 드 피엔느(Jean de Fiennes)의 조각이 있다. 이 조각은 로댕이 인물들에게 옷을 입히기 전에 나신상을 제작했을 때의 작품이고 작품 뒤의 서명을 보니 1986년에 주형을 뜬 것을 가나 아트센터에서 구입한 것이다.

로댕의 작품은 감정의 떨림이 있다. 허공을 보는 퀭한 눈과 힘없이 벌린 입에 팔을 벌리고 있는 동상을 보다 보면 그가 이렇게 외치는 듯하다. '왜 제가 희생되어야 하나요!' 그런데 이 조각상을 그리려고 보니까 배경이 너무 단조로워서 세밀한 그림은 안 어울릴 듯하다.

로댕은 역사상 최고의 조각가이지만 드로잉 작품도 많이 남겼다. 그의 드로잉 작품은 젊은 시절 습작 시기가 아니고 완숙한 경지에 이르런 노년에 그린 것이 많다. 나는 그의 단순하고 직관적인 드로잉 작품도 너무나 좋아하는데, 장 드 피엔느를 로댕식으로 그려보기로 했다.

배경은 생략하고 굵은 붓으로 단 몇 분 만에 형태를 그렸다. 그리고 연필로 손가락 발가락 그리고 얼굴 표정만 보완하고 사인을 했다. 이 그림은 단순하게 빨리 그렸지만 현장 느낌이 잘 드러나서 좋다.

예전에 파리에 있는 로댕 박물관에 갔던 적이 있는데, 이번에 로댕 작품을 그리면서 그의 연대기와 작품을 찾다 보니, 아름다운 로댕 박물관에 다시 가서 그의 작품을 보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다. 물론 파리로 가는 길에 칼레에 들리면 더 좋겠다.
 
로댕의 작품. 가나아트센터 야외 전시실에 있는 장 드 피엔느의 조각이다. 자세 연구를 위한 나체상 작품이고 실제 <칼레의 시민>에서는 옷을 걸치고 있다. 이 작품은 로뎅이 1885년에서 1886년 사이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데, 100년 후인 1986년에 청동으로 주조했다. 프랑스에서는 법에 따라 작가 사후에도 12개 에디션까지는 원본으로 본다. ⓒ 오창환
태그:#칼레의시민, #로댕, #가나아트센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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