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을 비롯한 동물들은 사물을 볼 수 있는 시각과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청각, 냄새를 맡을 수 있는 후각, 맛을 느낄 수 있는 미각, 그리고 피부를 통해 압력이나 열, 온도 등을 느낄 수 있는 촉각 등 '오감'을 가지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오감을 인지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를 당연하게 여기는 경우가 많지만 사실 오감을 가졌다는 것은 상당히 큰 축복이다.

특히 앞을 볼 수 있는 시각은 오감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감각으로 인식되고 있다. 시각은 인간의 뇌활동과도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어 눈으로 본 것을 뇌로 생각하고 그것이 다시 행동에 큰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면 시각이 제한될 경우 행동의 제약도 그만큼 커질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흔히 동물들을 포획하거나 제압할 때 눈부터 가리는 것도 시야를 차단해 동물의 행동범위를 좁히기 위한 조치다.

그렇다면 앞이 보이지 않는 전염병이 유행한다면 세상은 얼마나 큰 혼란에 빠질까. 물론 실제로는 사람들이 시각을 잃는 전염병이 유행한 적도 없고 앞으로도 그런 일이 생겨선 안 되겠지만 영화에서는 얼마든지 그런 가정과 상상을 해볼 수 있다. 지난 2008년 칸 영화제 개막작으로 상영됐던 페르난도 메이렐레스 감독의 <눈먼 자들의 도시>는 앞이 보이지 않는 전염병이 유행한 세상을 가정해 만들어진 미스터리 재난 영화다.
 
 2008년 칸 영화제 개막작이었던 <눈먼 자들의 도시>는 정작 흥행에서는 큰 재미를 보지 못했다.

2008년 칸 영화제 개막작이었던 <눈먼 자들의 도시>는 정작 흥행에서는 큰 재미를 보지 못했다. ⓒ 싸이더스

 
모든 연기상 휩쓴 최고의 연기파 여성배우

미군이었던 아버지와 스코틀랜드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줄리앤 무어는 학창시절 연극에 출연한 것을 계기로 배우의 꿈을 키웠고 보스턴 대학교에서 공연예술학을 전공했다. 1980년대 후반부터 영화배우로 활동을 시작한 무어는 1992년 <요람을 흔드는 손>, 1993년 <도망자> 등에서 조연으로 출연하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1995년에는 <나인 먼쓰>에서 휴 그랜트와 호흡을 맞추기도 했다. 

무어가 세계 관객들에게 본격적으로 얼굴을 알린 작품은 1997년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쥬라기 공원 2 - 잃어버린 세계>였다. 무어가 고생물학자 사라 하딩 박사를 연기한 <쥬라기 공원 2>는 세계적으로 6억 1800만 달러의 성적을 기록하며 크게 흥행했다(박스오피스 모조 기준). 무어는 1997년 <부기 나이트>, 1998년 조엘 코엔 감독의 <위대한 레보스키>에 잇따라 출연하며 연기 잘하는 여성배우로 인정 받았다.

무어는 2002년 두 편의 영화를 통해 본격적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디 아워스>를 통해 니콜 키드먼, 메릴 스트립과 함께 베를린 영화제 은곰상-여자연기상을 공동 수상한 무어는 같은 해 토드 헤인즈 감독의 <파 프롬 헤븐>으로 베니스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2008년에 출연한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눈먼 자들의 도시>는 칸 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됐다.

<파 프롬 헤븐> 이후 한동안 굵직한 영화제에서 수상경력이 뜸했던 무어는 2012년 TV영화 <게임 체인저>를 통해 에미상과 골든글로브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건재를 과시했다. 2014년에는 <맵 투 더 스타>를 통해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 트로피를 차지했고 같은 해 <스틸 앨리스>를 통해 미국과 영국 아카데미, 그리고 미배우 조합상 여우주연상까지 휩쓰는 기염을 토했다. 

사실 무어는 세계적인 명성에 비해 <쥬라기 공원 2>와 <나인 먼쓰> <디 아워스> <헝거게임> 시리즈 정도를 제외하면 상업적으로 성공한 작품은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무어는 세계 3대 영화제(칸, 베니스, 베를린)의 여우주연상과 미국, 영국의 아카데미, 골든글로브, 에미상, 미 배우 조합상까지 배우로서 받을 수 있는 모든 연기상을 휩쓸었다. 무어를 '역대급 배우'로 부르기에 전혀 손색이 없는 이유다.

시각을 잃은 사람들의 세상은 어떨까
 
 격리시설에서 유일하게 앞이 보이는 의사의 아내는 수용소 사람들의 리더 역할을 했다.

격리시설에서 유일하게 앞이 보이는 의사의 아내는 수용소 사람들의 리더 역할을 했다. ⓒ 싸이더스

 
영화 <눈먼 자들의 도시>는 포르투갈 출신의 작가 고 주제 사라마구의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수도원의 비망록>과 <히카르두 헤이스가 죽은 해> 등을 쓴 사라마구 작가는 1995년 포르투갈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카몽이스상을, 1998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세계적인 작가다. <눈먼 자들의 도시>는 1995년에 출판된 소설로 대중소설로서의 재미는 물론이고 여러 은유를 통해 현대사회에 대한 비판을 담아낸 수작으로 평가 받은 작품이다.

<눈먼 자들의 도시>는 평범한 오후에 한 남자가 운전을 하다가 눈이 멀고 그를 집에 데려다 준 남자와 처음 눈이 먼 남자의 아내, 남자가 치료를 위해 찾은 병원의 환자들, 그리고 그를 치료한 안과 의사까지 모두 눈이 멀게 된 세상을 그린 작품이다. 의사의 아내(줄리안 무어 분)는 눈이 보이지만 시각을 잃은 남편(마크 러팔로 분)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도 눈이 멀었다고 거짓말을 하고 격리시설로 함께 들어간다.

영화 속에서 표현되는 격리시설은 그야말로 '생지옥'이다. 단 한 사람을 제외하면 모두 앞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기본적인 위생이나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권리 등은 전혀 보장되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자 격리시설을 지키던 병력마저 시설을 방치한 채 떠나게 되고 총을 가진 불량배들이 시설을 점령한다. 결국 유일하게 앞이 보이는 의사의 아내가 불량배의 리더(가엘 가르시아 베르날 분)를 살해하고 수용소에서 탈출한다.

<눈먼 자들의 도시>는 2500만 달러의 제작비로 만들어 세계적으로 1900만 달러의 성적을 기록하며 흥행에 성공하지 못했고 국내에서도 전국 64만 관객에 그쳤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특히 가장 먼저 눈이 보이지 않았던 사람이 갑자기 눈을 뜨는 결말이 황당하다는 의견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이는 원작소설과 같은 결말로 <눈먼 자들의 도시>는 SF 장르가 아니기 때문에 과학적 근거는 이 작품에서 크게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다.

<눈먼 자들의 도시>를 연출한 페르난도 메이렐레스 감독은 브라질 출신으로 2002년 <시티 오브 갓>으로 아카데미 감독상 후보에 오르며 주목 받기 시작했다. 2005년 <콘스탄트 가드너>로 골든글로브 작품상과 감독상 후보에 오른 메이렐레스 감독은 <눈먼 자들의 도시>가 성공을 거두지 못하면서 슬럼프에 빠지는 듯했다. 하지만 메이렐레스 감독은 2019년 <두 교황>으로 골든글로브와 영국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에 오르며 건재를 과시했다.

아내 앞에서 다른 여성과 외도한 남편
 
 마크 러팔로가 연기한 의사는 1병동의 대표가 됐지만 그의 논리와 말솜씨는 폭력 앞에서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마크 러팔로가 연기한 의사는 1병동의 대표가 됐지만 그의 논리와 말솜씨는 폭력 앞에서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 싸이더스

 
<눈먼 자들의 도시>에는 <어벤저스>에서 가장 강한 힘을 자랑하는 헐크를 연기했던 마크 러팔로가 줄리앤 무어의 남편으로 출연했다. 하지만 눈이 먼 안과의사를 연기한 러팔로는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어벤저스> 때처럼 크게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나마 하나부터 열까지 자신을 케어해 주는 아내가 있어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수월하게 행동했지만 명색이 의사임에도 앞이 보이지 않아 간단한 응급처치조차 하지 못한다.

영화 중반 불량배들에게 많은 금품을 상납하고도 다른 곳보다 식량을 적게 받은 의사는 죄책감에 음식을 먹지 못하고 자신을 위로하러 온 매춘부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는다. 그리고 이 장면을 아내가 목격하는데 아내는 괴로워하는 남편을 앞에 두고 오히려 죄책감에 빠진 매춘부를 안아준다. 수용소 안의 비정상적이고 비극적인 상황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었다.

총을 앞세워 수용소의 식량을 점거한 불량배들은 다른 격리자들에게 금품과 성상납을 요구하며 온갖 더러운 행동을 서슴지 않는다. 영화 속 최고 빌런으로 나오는 불량배의 리더를 연기한 배우는 멕시코 출신의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로 지난 2001년 <이 투 마마>로 베니스 영화제 신인상을 수상하며 연기력을 인정 받았다. 가르시아 베르날은 지난 2014년 TV시리즈 <모짜르트 인 더 정글>을 통해 골든글로브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영화 눈먼 자들의 도시 페르난도 메이렐레스 감독 줄리앤 무어 마크 러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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