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20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계기로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연구와 선양이 활발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역사의 그림자로 남은 채, 우리의 기억 속에서 잊힌 인물들이 많습니다.

무강(武剛) 문일민(文一民:1894~1968)이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평남도청 투탄 의거·이승만 탄핵 주도·프랑스 영사 암살 시도·중앙청 할복 의거 등 독립운동의 최전선에서 치열하게 싸웠던 문일민의 삶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독립운동가들이 여전히 많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문일민이라는 또 한 명의 독립운동가를 기억하기 위해 <무강 문일민 평전>을 연재합니다. [기자말]
1932년 4월의 윤봉길 의거로 일제의 탄압은 극심해졌다. 프랑스 조계 당국이 일제에 협력해 상하이 조계 내 한국 독립운동가들의 체포에 나서면서 기댈 언덕이 사라진 독립운동가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런데 모두가 한인들을 외면한 이때 오히려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는 이들이 있었다. 바로 중국인들이었다.

일제는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으로 만주와 내몽골 일부를 점령하고 1932년 3월 괴뢰국가 만주국을 세웠다. 또 그해 1월에는 '상하이사변'을 일으켜 상하이를 점령하는 일도 있었다. 따라서 중국인들의 반일감정은 극에 달한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어난 윤봉길 의거는 중국인들에게 크나큰 감동과 기쁨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이에 따라 한국 독립운동 진영에 중국 측으로부터의 금전적 후원이 줄을 잇기 시작했다. 독립운동 진영 역시 저마다 중국 측에 접근하여 후원을 요청했다.

한국독립당 내 조소앙·김철 일파는 상하이시상회(上海市商會)에, 이유필 일파는 둥베이수재난민구호위원회(東北水災難民救護委員會)에, 김구 일파는 둥베이의용군후원회(東北義勇軍後援會)·19로군(十九路軍) 등에 각각 접근하여 후원금을 수령했다.

후원금을 놓고 불거진 횡령설

그런데 후원금을 둘러싸고 불미스러운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즉 중국 측에서 임시정부에 지급한 5000불을 김구가 착복했다는 소문과 반대로 상하이시상회 측에서 일제에 의해 붙잡힌 윤봉길·안창호 가족들에게 지급한 위로금 7000불을 조소앙·김철 등이 횡령했다고 하는 소문이었다.

당시 상하이에서 피신해 온 임시정부 요인들은 항저우(杭州)에 임시정부 판공처를 설치하고 1932년 5월 15일~16일 이틀간 국무회의를 개최한 바 있다. 그런데 국무회의 석상에서 '횡령설'을 두고 언쟁이 벌어졌다. 결국 김구는 새로 임명된 군무장 자리에서 사퇴하겠다고 선언하며 이동녕과 함께 자싱(嘉興)으로 떠나버렸다.

조소앙과 김철 역시 횡령설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당시 이들은 각각 윤봉길 가족과 안창호 가족에게 교부한다는 조건으로 상하이시상회로부터 총 7000불의 후원금을 수령했다. 그런데 두 사람은 해당 자금을 유족들에게 지급하지 않고 항저우에 가서 호화로운 생활을 했다는 것이다.
 
조소앙(왼쪽)과 김철(오른쪽)
 조소앙(왼쪽)과 김철(오른쪽)
ⓒ 독립기념관

관련사진보기

 
이처럼 후원금 횡령 의혹으로 김구 일파와 조소앙·김철 일파가 반목하는 가운데, 갈등의 도화선에 불을 붙이는 사건이 일어났다.

국무회의 종료 후 5일 뒤인 1932년 5월 21일 중국 신문 <시사신보>(時事新報)에 안창호를 비난하는 기사가 게재됐다. '안창호는 이미 비혁명적 경지에 전락한 자로 미국에서 돌아온 후 그가 통솔하는 단체에는 친일 주구들이 섞여있다'는 내용이었다.

이 기사에 격분한 이들이 탐문한 결과, 해당 기사는 중한민족항일대동맹(中韓民族抗日大同盟) 위원의 한 사람인 지주칭(稽翥靑)의 기고로 밝혀졌다. 이들은 지주칭을 찾아 추궁했다.

"이런 기사를 쓴 이유가 무엇이오?"
"안창호 선생의 죄가 경감될까 하는 희망에 쓴 것이오."
"거짓말 하지 마시오. 중국인인 그대가 한국인들의 사정을 어찌 그리 소상히 알고 있으며, 또 무슨 이유로 그것을 확신한단 말이오?"


마침내 지주칭이 실토했다.

"사실 조소앙·김철·김석 등에게서 들어 아는 것이니 내게 무슨 책임이 있겠소?"

격분한 청년들, 항저우 판공처를 습격하다

금전 문제로 조소앙·김철 일파에 적개심을 품고 있던 김구는 안창호에 대한 비난 기사의 출처가 이들이라는 사실을 포착하자 이유필 일파와 대책을 협의했다. 그리고 5월 28일 박창세·김동우·문일민·안경근 등을 항저우 임시정부 판공처로 보내 조소앙·김철을 면담케 했다.

판공처를 습격한 문일민 등은 조소앙과 김철을 만나 횡령 혐의를 추궁했다.

"중국 측이 제공한 돈을 횡령했다는 것이 사실인가?"
"그 자금은 우리들 개인에게 쓰라고 준 것이오."

조소앙 등의 답을 듣고 분개한 일행은 두 명을 폭행하고 소지금(조소앙으로부터 900불·김철로부터 100불)을 탈취한 뒤 상하이로 귀환했다(다만 실제 폭행이 이뤄졌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일제 기록에 의하면 구타가 이뤄졌다고 하나, 문일민 등은 훗날 '우리의 기관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모욕하거나 구타하지 않고 정중하게 힐문했다'고 해명한 바 있다).

당시 조소앙·김철은 일체의 공직에서 사퇴할 것과 문제의 <시사신보> 기사에 대해 책임질 것을 약속했다. 실제로 사건 이튿날, 외무장 조소앙의 사표 제출을 시작으로 6월 2일 나머지 4명의 국무위원(이동녕·조완구·김구·김철)이 전원 사표를 제출함에 따라 임시정부는 일시적으로 무정부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한편 항저우 판공처 습격 사건을 주도한 문일민 일행은 6월 3일 연명으로 성명서를 발표해 자신들이 판공처를 습격하게 된 경위를 밝혔다.

"우리는 소앙(조소앙)이 외교의 책임자로서 혁명영수 및 전체 교민이 불법한 체포와 유린을 당하는 것을 보고 또 철(김철)이가 여러 기관의 재정책임자로서 동지의 생사에 상관없이 앞장서 도주한 뒤 두 사람이 짝지어 호산풍경(湖山風景)을 즐기며 좋은 술과 좋은 요리에 즐거운 세월을 보낼지라도 오히려 책임을 묻지 않았다. (…중략…) 그러나 외국인과 외국 신문을 이용하여 적의 포로가 된 혁명영수(안창호)를 음해하며 동지를 능욕하고 당을 훼멸하며 민족을 말살시키는 그 매국적 행위만은 일각이라도 속히 방지하지 않으면 우리 앞길에 막대한 해독이 있을 것이다." - 박창세·김동우·문일민·안경근, <趙素昻, 金澈 等의 無恥한 行動을 懲戒하고서>, 1932.6.3.
 
1932년 6월 3일 항저우 판공처 습격 사건의 전말을 밝힌 박창세·김동우·문일민·안경근 등의 성명서 <趙素昻, 金澈 等의 無恥한 行動을 懲戒하고서> (2021년 7월 14일 독립기념관 촬영)
 1932년 6월 3일 항저우 판공처 습격 사건의 전말을 밝힌 박창세·김동우·문일민·안경근 등의 성명서 <趙素昻, 金澈 等의 無恥한 行動을 懲戒하고서> (2021년 7월 14일 독립기념관 촬영)
ⓒ 김경준

관련사진보기


즉 문일민 일행은 조소앙·김철의 횡령 문제보다도 외국 신문에 안창호에 대한 폄훼성 기사를 싣도록 사주한 행위야말로 용납할 수 없는 '매국적 행위'라 보고 이들을 징계하는 차원에서 부득이하게 행동으로 옮겼노라 해명했다.

정리하자면 이 사건은 조소앙·김철의 횡령 의혹으로 그들에 대한 의심이 불거진 상황에서 안창호에 대한 비방 기사 사주가 도화선이 되어 벌어진 것이었다. 

이 전대미문의 판공처 습격 사건에 대해 일제는 "금전을 둘러싼 조선인 간의 암투 내홍은 더욱 분규를 거듭하여 독립운동의 노력은 드디어 쇠미해질 것으로 관측된다"고 기록했다. 앞서 언급했듯 실제로 이 사건의 여파로 임시정부는 일시적 무정부 상태에 빠졌다. 한국독립당 역시 상하이파(이유필), 항저우파(조소앙·김철), 자싱파(김구) 등으로 분열됐다.

요컨대 항저우 판공처 습격 사건은 후원금을 둘러싸고 벌어진 내홍이 빚어낸 우리 독립운동사의 비극이었다.

- 13부에서 계속 -

[주요 참고문헌]
김정명 편, <朝鮮獨立運動> 2, 原書房, 1967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4, 1972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28, 국사편찬위원회, 2008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2·3, 국사편찬위원회, 1971·1973
박창세·김동우·문일민·안경근, <趙素昻, 金澈 等의 無恥한 行動을 懲戒하고서>, 1932.6.3. (독립기념관 소장)

태그:#문일민, #무강문일민평전, #독립운동가, #조소앙, #김철
댓글3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한양대 사학과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습니다. (한국근대사 전공) / 취미로 전통활쏘기를 수련하고 있습니다. / <어느 대학생의 일본 내 독립운동사적지 탐방기>, <다시 걷는 임정로드>, <무강 문일민 평전>, <활 배웁니다> 등 연재 / 기사 제보는 heigun@naver.com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