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2.08 10:59최종 업데이트 23.02.08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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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킹홀리데이로 호주 멜버른을 선택한 건 잘못 끼워진 첫 단추였다. 나는 밀도 높은 자극으로 꽉 찬 한국 도심에서 멀어지고 싶었다. 아무도 나를 알지 못하는 곳에 유배되었으면! 하는 생각이었다. 한참 뒤에 알게 된 사실인데, 멜버른은 호주에서 가장 인구밀도가 높은 곳이었다. 나는 북반구의 과밀 도시를 벗어나, 남반구의 과밀 도시로 가는 실수를 저질렀다.
 

멜버른은 호주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이며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트램 노선을 구축하고 있다. 그만큼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도시다. ⓒ 선채경

 
코로나19 봉쇄가 끝나자 전 세계에서 호주로 몰려드는 노동자들로 집구하기 어렵다는 말은 익히 듣고 왔다. 하지만 '남들도 하는 거니까, 나도 어떻게든 구할 수 있겠지' 싶었다. 해가 쨍쨍 내리쬐던 2022년 12월 29일, 멜버른에 도착했다. 안일한 마음가짐으로 왔다는 걸 알아차리는 데엔 하루도 걸리지 않았다.

'플랫메이트'(호주의 주택 임대 사이트)에 방을 내놓은 집주인 열댓 명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집을 보고 싶으니 언제든 연락을 달라고. 상냥함을 최대한 담은 새해 인사도 덧붙였다. 생각보다 금방 첫 벨 소리가 울렸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마음속으로 영어 인사를 한번 외웠다. 그러나 준비한 말을 꺼내기도 전에 화들짝 놀라버렸다.


"뉴 이어 홀리데이(새해 연휴)에 문자 보내지 마! 내 휴가가 방해된다고, 알아들었어?"

뭐라 성난 목소리가 더 이어졌던 것 같은데, 알아듣고 싶지 않아서 다급히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다시 분노의 전화가 걸려올까 무서웠다. 휴대폰을 가방 깊숙이 집어넣고 한동안 꺼내지 못했다. 비좁은 호스텔 방 침대에 누워 내가 뭘 잘못한 건지 곱씹었다.

호스텔은 한 방에서 여섯 명이 지냈다. 2층 침대의 2층 자리, 앉으면 천장에 머리가 닿아 허리를 곧게 펼 수 없었다. 그 후 3일간 어떤 답장이나 전화도 없었다. 한국은 할 일이 너무 많아 압도되는 곳이었다면, 이곳에선 할 일 없음에 압도되는 기분이었다. 이력서를 보낸 가게에서 연락이 오길, 친절한 집주인이 전화해주길 기다리는 일뿐. 언제까지 기다릴 수 있을까? 당장 다음 주엔 어디에서 지내야 하지? 이 돈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나?

그러나 초조하게 휴대폰만 만지작거릴 순 없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서, 구글 맵을 켜고 도서관을 검색했다.

"모든 방법이 실패하면 포기하고 도서관에 갈 것." (스티븐 킹, < 11/22/63 >)

그래서 나는 도서관에 갔다.
 

멜버른에서 가장 번화한 곳인 중심상업지구에 위치한 빅토리아 주립 도서관(State Victoria Library). ⓒ 선채경

 
"모든 방법이 실패하면 도서관에 갈 것"

스티븐 킹의 시간여행 소설 < 11/22/63 >은 주인공 제이크 에핑이 존 F. 케네디 미국 전 대통령 암살 사건을 막기 위해 과거로 돌아가는 이야기다. 인터넷도 없는 시대에 똑 떨어진 제이크는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그때, 한 교수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린다. "모든 방법이 실패하면 포기하고 도서관에 갈 것."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는 대신, 도서관이 있었다. 공휴일이 끝난 1월 2일, 아침이 밝자마자 빅토리아 주립 도서관을 찾았다. 빅토리아 주립 도서관은 1854년에 지어진 호주 최초의 도서관으로, 멜버른 시내 중심지를 차지하고 있다. 시청 건물보다도 13년 먼저 세워졌으니, 도서관을 중심으로 멜버른 도심이 형성되었다 해도 과장이 아니다.
 

빅토리아 주립 도서관, ‘더 돔’ 꼭대기에서 내려다 본 열람실 ⓒ 선채경

 
34.75 미터, 6층 높이까지 솟은 천장을 가진 도서관에서 나는 비로소 기지개 켤 자유를 얻었다. 매일 아침 10시에 들어가서, 가능한 한 늦게 나왔다. 멜버른의 날씨는 어제 19도, 오늘 32도, 내일 17도, 무더위와 추위를 널뛰었지만, 도서관 온도는 한결같았다. 나는 맑은 날엔 도클랜드 도서관 창문 앞자리에서 햇살을 만끽했다. 흐린 날에는 주립 도서관에 들어가 탁 트인 천장을 하늘 삼았다. 내 자리가 지구 어디에도 없는 것 같은 기분은 사라졌다. 자리에 앉아 이력서 쓰기에 몰두했고, 틈틈이 마땅한 방이 있는지 검색했다. 매서운 집주인의 전화를 곱씹는 일은 그만뒀다. 지금 이 글도 도서관에서 쓰고 있다.
 

도클랜드 도서관 열람실 모습. 길고 넓은 통창에 하늘이 가득 담긴다. ⓒ 선채경

 
집중력이 흐트러지면 마음껏 도서관을 탐색했다. 이곳 도서관에는 없는 것이 없었다. 어린이 자료실에는 아이 먹일 우유를 데울 전자레인지가 있다. 널찍한 수유 공간은 당연하다. 도서관은 특정인을 배제하지 않는, 모두에게 열린 공간인 걸 실감했다.

도클랜드 도서관에는 샤워실도 있었는데, "온수 샤워가 필요한 누구든 이용할 수 있다"고 사서는 설명했다. 멜버른시에서 운영하는 도서관에는 대부분 마련되어 있다고 한다. 노숙인들은 무료 공공시설인 도서관을 자주 찾는데, 냄새 때문에 다른 이용자의 항의가 들어오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 사서는 노숙인에게 샤워를 권한다고 한다. 샤워실 맞은편에는 '도움이 필요하신가요?'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도서관에 상주하는 사회복지사가 주거 지원을 상담해준다는 내용이었다.

'내가 냄새나고 더러워도 쫓겨나진 않겠구나.' 언제나 날 환영해줄 공간이 가까이 있단 사실만으로 안심이 됐다. 영국 작가 버지니아 울프는 여성이 글을 쓰기 위해선 '자기만의 방'과 500파운드가 필요하다고 썼다. 도서관은 '자기만의 방'이 없는 사람들에게 단 1파운드도 받지 않고 방을 내어준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모두에게 평등한 장소다.

사서는 내가 어디서 왔는지, 왜 온 건지, 영어는 얼마나 못하는지 묻지 않았다. 대신 "하우 아 유?" 그리고 "하우 캔 아이 헬프 유"(내가 널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까?)라고 다정하게 물어주었다. 피하고 싶은 대화는 하지 않아 고마웠다. 예를 들면 '너 이제 어쩌려고 그러니?' 같은.
 

도클랜드 도서관에 부착된 안내문. 주거나 의료 지원이 필요할 때 도서관에 상주하는 사회복지사와 상담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 선채경

 
도서관이 편안한 이유는 나 혼자 있을 자리가 있으면서, 동시에 함께인 곳이라서다. 서로 안부를 묻고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어서.

다시 나를 서럽게 한 건 낯선 타지 생활이 아니라 고향 소식이었다. 지난해 말, 경기도의회는 2023년 사립공공도서관 운영지원금을 삭감하기로 했다. 동일한 비교를 아니지만 걱정이 앞선다. 집도 절도 없는 외국에서 도서관 덕분에 사는데, 정작 고향으로 돌아갔을 때 도서관이 없으면 어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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