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5.15 11:53최종 업데이트 23.05.15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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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집의 굴뚝을 만들고 있다, 남편이 연통 주변을 벽돌로 감싸고 있다 ⓒ 노일영

 

서까래 위에 판재를 올리는 작업은 약 16일 정도가 걸렸다. 흙집은 자세히 안 뜯어보고 멀리서 대충 보면 이제 그럭저럭 집의 모양새를 갖춰 가고 있었다. 하지만 남편의 말에 따르면, 아직도 할 일이 천지였다.


판재 작업을 마친 뒤 남편이 바로 시작한 건 굴뚝을 만드는 일이었다. 남편이 돌들을 쌓아 기초를 만들 때 아궁이 구멍과 굴뚝 구멍을 내놓았는데, 이 굴뚝 구멍에 돌들을 차곡차곡 놓아 공간을 만들고, 굴뚝을 지붕 위로 빼는 작업을 시작했다.

남편은 먼저 처마 쪽 판재 위에 기계톱으로 구멍을 낸 뒤 굵직하고 길쭉한 스테인리스 연통을 꽂아 넣었다. 그리곤 산에서 주워온 돌들을 쌓아 연통의 아래쪽을 감싸고 황토와 황토 모르타르로 마감했다. 작은 돌들로 장식적 효과를 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사실 굴뚝 작업의 여기까지 과정에서 남편이 한 일이라곤 판재에 구멍을 내서 연통을 꽂은 것뿐이다. 그 외의 일들은 모두 내 몫이었고, 남편은 내 뒤에 서서 감독만 했다. 그런데 이 감독관이자 현장 소장을 자처하는 인물은 아주 까다롭고 입이 거칠었다.

나를 마치 인력 사무소에서 불러 놓고 최저 시급만 주면서 골수를 빨아먹으려는 듯 대했다. 얼마나 잔소리를 들이퍼붓는지 속에서 화가 치밀어 대판 싸우고 싶었지만, 분노를 삭이고 또 삭였다. 남편의 패턴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낮술 땡긴다고 왜 말을 못 하냐고!

남편은 일하기가 싫거나 낮술이 땡기면 괜히 내게 시비를 걸어서 싸움을 유도한다. 내가 그 작전에 말려들어 대판 싸움이 나면, 그걸 핑계로 작업을 중단하고 낮술을 마신다. 어이구, 왜 쉬고 싶다고, 낮술이 땡긴다고 말을 못 하느냐고!

내 추정으론 그게 다 남편의 현실적 자아와 이상적 자아상 간의 괴리 때문인 듯하다. 시아버지는 굉장히 성실한 분이었다. 자식들의 대부분이 그렇듯 남편은 아버지를 경쟁 대상이자 자아의 이상형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남편은 시아버지와 달리 좀 게으른 편인데, 이걸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남편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만약 아버지였다면, 낮에 일을 쉬고 싶다거나 낮술이 땡기지는 않을 것이다. 차라리 아내와 싸우면 이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까?' 나는 남편이 걸어오는 싸움을 이런 식으로 해석하는데, 이게 맞는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내가 작업을 끝내고 나자, 연통 주변을 벽돌로 쌓는 작업은 남편이 했다. 남편은 조심스레 조적을 하고 황토 모르타르로 벽돌을 고정시켰는데, 문외한인 내가 보기에는 나름 깔끔해 보였다.

"나 몰래 언제 조적 잡부로 일한 적 있어? 벽돌이 쌓인 어설픈 모양새가 한 이틀 정도 벽돌만 나르며 어깨너머로 훔쳐본 솜씨구만. 그런데 받은 일당은 다 어디로 빼돌렸냐고."

남들이 보기에는 말을 뭐 저렇게 하냐고 할 수 있지만, 우리는 이런 식으로 서로를 칭찬해 주는 데 익숙하다. 하지만 이런 말투는 원래 내 방식이 아니다. 이건 다 남편에게서 배운 것이고, 남편에게만 하는 말본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절대로 이런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남편이 피식대며 입을 열었다.

"조적 잡부로 일한 일당으로 얼마 전에 드라이버 괭이 하나와 웨지 호미 2개 사 준 거 기억 안 나?"

굴뚝 작업이 끝나고 방의 천장이 될 부분의 지붕에다 광목을 깔고 황토를 올렸다. 그리고 황토를 열심히 밟아 주고, 흙이 바짝 마를 수 있게 사흘 동안 지붕 위에 내버려 뒀다. 이 사흘 동안 남편은 농사일은 쥐꼬리만큼 거들고 술만 퍼마셨는데, 사흘간 남편의 이 허랑방탕한 생활은 나중에 엄청난 결과를 초래했다.

나비효과
 

판재 작업과 굴뚝 작업이 끝난 뒤, 지붕에 광목을 깔고 황토를 덮고 있다 ⓒ 노일영

 
카오스 이론을 대표하는 문장이 "브라질의 나비 날갯짓이 텍사스에 토네이도를 불러올 수 있다"라고 알고 있다. 사흘 동안 남편이 술만 마시며 논 건 결과적으로 나비의 날갯짓이 되고 말았다.

내가 분명 지붕에 올릴 피죽을 사 와서 적당한 크기로 잘라 놓으라고 했지만, 남편은 그저 놀 생각뿐이었다. 흙집 짓기를 시작한 지 벌써 2달이 다 돼 가고 있는데도, 남편은 서둘러서 일을 마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아니, 평생 이 흙집만 짓고 있을 거냐고? 빨리빨리 좀 해서 끝내야지. 이제 벼도 낫으로 베야 하고 나락도 털어야 하는데, 언제까지 흙집 짓는 데만 매달려 있으려고 그래!"

"이게 다 먹고 마시고 놀고 살려고 하는 짓인데, 그까이 꺼 뭐시 중헌디···. 벼는 틈틈이 베면 되고, 나락도 겨울 되기 전에만 털면 되는 거지. 그렇게 빡빡하게 살 거면 도시에서 살아야지. 그리고 우리 자기도 나랑 술 마시는 거 좋아하잖아."


자기 합리화의 최고치를 경신한 멘트였지만, 얇은 귀를 가진 나는 순간 남편의 말이 또 그런 것 같기도 하다는 생각에 귀가 팔랑거렸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때 남편을 닦달해서 피죽을 사서 적당한 크기로 자르게 만들었어야 했다.
 

남편이 지붕 위에다 방수포를 깔고 있다 ⓒ 노일영

 
지붕 위의 황토를 3일간 말린 뒤, 그 위에다 방수포를 덮는 작업을 시작했다. 지붕의 중심에서 시작해 처마 쪽을 향해 방수포를 깔아 나갔는데, 일반적으로 방수포를 사용하는 방식과는 달랐다. 원래 방수포는 끈적이는 부분을 아래로 오게 해서 지붕과 방수포를 달라붙게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이 흙집 공사에서는 남편이 방수포의 끈적이는 면을 위로 오게 반대로 까는 것이다. 그래서 물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방수포를 거꾸로 깔면 어떡해!"

남편은 무슨 흙집 인간문화재 혹은 지붕 장인처럼 마치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이 여유롭게 씨익 웃었다.

"그런 질문을 안 하면, 내가 야단을 좀 치려고 준비하고 있었는데, 아주 훌륭한 학생이군."

'어휴, 저 시건방은···.' 남편은 거만한 표정으로 뜸을 들인 뒤 다시 입을 열었다.

"피죽으로 지붕을 마감할 때, 방수포 이걸 거꾸로 뒤집어서 이렇게 깔아 놔야, 피죽이 방수포의 끈적한 부분에 들러붙는다고. 그래야 태풍이 쳐도 피죽이 날아다니지 않는 거지, 그럼, 그럼!"

남편은 방수포를 서로 10cm 정도 겹치게 깔고 토치로 이음새 부위를 군데군데 불로 지졌다. 그래서 지붕을 덮은 8장의 방수포는 모두 하나로 연결됐다. 토치 작업이 끝난 뒤 남편은 흐뭇한 표정이었다.
 

지붕에 방수포를 다 깔았다, 원래는 뒤집어서 시공해야 하는데, 지붕에 올릴 피죽 때문에 끈적이는 부분이 위로 오게 만들었다 ⓒ 노일영

 
그리고 다음 날 남편은 제재소에서 6자(180cm)짜리 피죽을 사와 3등분으로 자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워낙에 양이 많다 보니, 피죽을 자르는 데도 하루가 꼬박 걸렸다. 남편은 의기양양하게 내게 말했다.

"오늘 작업은 여기까지만 하고, 지붕에다 피죽을 올리는 건 내일 하자고. 오늘 우리 옆지기가 고생이 많았으니, 과인이 술 한잔 하사하겠네."

다음 날 아침 흙집 공사 현장으로 갔는데, 방수포가 모두 뜯겨져 바닥에서 나뒹굴고 있었다. 피죽을 자르는 작업을 마친 그날 밤, 바람이 좀 거세게 친다 싶었는데, 방수포가 견디지 못한 것이다. 방수포가 자유롭게 바닥에서 뒹굴뒹굴 노는 모습에 남편은 눈물까지 글썽였다.

방수포 한 롤의 무게가 엄청나게 무거워서 혼자서 방수포를 까느라 개고생한 걸 알고 있어서, 남편의 심정을 이해할 만했다. 내가 흙바닥에 떨어진 방수포를 수습하는 동안 남편은 갑자기 트럭을 타고 사라져 버렸다.
덧붙이는 글 <함양타임즈>에 함께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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