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2.21 18:16최종 업데이트 23.02.21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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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공론장은 다이내믹합니다. 매체도 많고, 의제도 다양하며 논의가 이뤄지는 속도도 빠릅니다. 하지만 많은 논의가 대안 모색 없이 종결됩니다. 소셜 코리아(https://socialkorea.org)는 이런 상황을 바꿔 '대안 담론'을 주류화하고자 합니다. 구체적으로는 ▲근거에 기반한 문제 지적과 분석 ▲문제를 다루는 현 정책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거쳐 ▲실현 가능한 정의로운 대안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소셜 코리아는 재단법인 공공상생연대기금이 상생과 연대의 담론을 확산하고자 학계, 시민사회, 노동계를 비롯해 각계각층의 시민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열린 플랫폼입니다. 기사에 대한 의견 또는 기고 제안은 social.corea@gmail.com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기자말]

의대 정원 증원, 공공의대 신설 등을 반대하는 전국의사총파업궐기대회가 대한의사협회 주도로 14일 오후 서울 여의도에서 개업의, 전공의, 의대생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2020.8.14 ⓒ 권우성

 
환자들이 아파도 갈 곳이 없다는 보도가 쏟아지고 있다. 보수·진보 언론을 가리지 않는다. 지방 암 환자들이 수도권 대형병원 근처 '환자 방'에 머물며 힘겹게 치료받는다는 소식, 어느 지방 도시의 마지막 남은 산부인과가 폐업했다는 소식은 꽤 '유서 깊은' 보도에 속한다.

작년 여름 병원에서 근무하던 간호사가 뇌출혈 발생 이후 개두술을 받기 위해 다른 병원으로 옮겨졌다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만일 지방 소도시에서 벌어진 일이라면 뉴스조차 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이 사건이 벌어진 곳이 서울, 그것도 국내 최대 규모인 서울아산병원이었고, 환자가 바로 그 병원의 간호사였다는 점이 커다란 충격이었다.


작년 말에는 전국 8개 소아 전문 응급의료센터 중 한 곳인 가천대 길병원이 잠정적으로 소아·청소년 입원 병동 운영을 중단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강남세브란스병원과 이대목동병원도 이보다 앞서 소아응급실 운영을 축소하거나 중단했다. 이미 수년 전부터 지방에서 경고를 울리던 문제들이 이제 '드디어' 서울까지 올라온 셈이다.

이들 문제의 원인과 대책을 두고 다른 관점들이 격돌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의사 숫자를 둘러싼 논쟁이다.

중증 필수 의료 서비스의 공백을 두고 한편에서는 의사 부족 문제를 지적한다. 무슨 대책을 마련해도 결국 의사를 구하지 못해 실현하기 어렵고, 한정된 의사 숫자 안에서 아랫돌 빼어 윗돌 괴는 일이 반복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연봉 4억 원 이상을 제시하거나 국립대 병원 교수 자리를 제안해도 의사를 구하기 힘든 것이 현실이라는 지적이다.

반면 다른 편, 주로 의료계에서는 의사가 부족한 게 아니라 수가가 낮은 것이 진짜 문제라고 이야기한다. 수가가 터무니없이 낮기 때문에 뇌수술을 하면 할수록, 어린이 환자를 보면 볼수록 병원에 적자가 쌓이니 병원은 투자를 기피하고 젊은 의사들은 전문과 선택을 기피하게 된다는 것이다.

의사 노동의 보상 수준이 적정한가에 대해서도 평가가 엇갈린다. 예컨대 임금 근로자 대비 의사의 평균 임금이 '4.8배밖에' 되지 않는다는 진단과 '4.5배나' 된다는 진단이 기묘하게 공존하고 있다.

사실 통계 자체는 무미건조하다. 2019년 기준, 한국의 인구 1천 명당 임상의사는 2.5명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 3.6명에 비해 적고, 비교 대상 44개국 중 35등이다. 의사 숫자의 연평균 증가율은 OECD 평균보다 높다. 2010~2019년 OECD 회원국의 연평균 증가율이 1.4%인데 비해 한국은 2.4%였다. 대체로 의사 숫자가 적은 나라에서 증가율이 높은 편이다.

국민들의 의료 이용량은 많다. 1인당 연간 외래 이용 건수는 17.2건, OECD 회원국 중 압도적 1등이다. OECD 회원국의 평균은 연 6.8건에 불과하다. 보상 수준은 어떨까? 2020년 기준 병의원에 근무하는 의사들의 연평균 임금은 2억 3천만 원이다. 같은 해 임금 근로자의 연평균 소득은 3840만 원으로 집계되었다.  

의사 수 늘리면 해결될까

여러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의사 수 증가율이 높다지만 급속한 인구 고령화에 따르는 의료 수요 증가를 따라잡기에 충분할까? 전공의들의 살인적인 장시간 노동뿐 아니라 의사 전체의 노동 시간을 줄여나가는 것이 마땅할 텐데 이것도 고려하고 있을까? 의사 양성에 최소 10년 이상이 걸리는데 지금 의대 정원을 늘린다 한들 당장의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의대 정원이 늘어나면 10년 후 지방 도시, 중증 필수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전문의 숫자가 실제로 늘어날까?

수가는 얼마가 되어야 '적정'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중증 필수 의료 서비스에 대한 수가를 파격적으로, 이를테면 지금의 10배로 올린다면 의사들이 전공을 바꾸거나 일터를 옮길까? 그러면 의대생들에게 '인기과'가 될까? 그동안 다른 의료서비스의 수가, 의사 이외 보건의료 직종에 대한 보상은 그대로 유지해야 할까? 우리 사회는 의료비를 어느 수준까지 감당할 수 있을까?

여러 변수들에 숫자만 바꿔 넣으면 필요한 의사 숫자, 확보 가능한 의사 숫자가 자동으로 계산되는 알고리즘이 있다면 좋겠지만, 그대로 가져와 이식할 수 있는 해외 모범 사례가 있다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현실에서는 불가능하다.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 주체들은 알고리즘이 계산해준 대로 움직이지 않으며, 각국의 의료 환경과 문화가 너무나 다르기 때문이다.

국가는 어떻게 의료서비스를 보장할 것인가. 이를 위해 의사들을 얼마나, 어떤 방식으로 양성할 것인가. 사회는 의사들에게 얼마나 보상할 것인가. 이들 문제에 대해 '정답'이 있을 수 없다. 우리 공동체가 추구하는 가치 문제이자, 사회가 합의해야 할 규범의 문제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런데도 정부는 이 문제를 의-정(醫-政) 협의체(의료현안협의체)라는 독점 논의구조에 맡겨두고 있다.
 

26일 서울 중구 코리아나호텔에서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 이필수 대한의사협회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의료현안협의체 간담회가 열리고 있다. 2023.1.26 ⓒ 연합뉴스

 
사실 의사에게 가장 바람직한 정책은 보상 수준은 높이고 공급자 숫자는 제한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지방 도시의 어린이 응급 환자에게도 가장 바람직한 정책이 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의사들이 국민의 건강권은 무시하고 돈벌이만 추구한다는 뜻이 아니다. 원래 사회란 각기 다른 이해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공존하는 곳이고, 그렇기에 대화, 토론, 협상이 필요하고 정치가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특정 집단에만 발언권을 준다면 이는 민주주의 원칙에도 어긋난다.

게다가 의사들에게는 자신의 이해관계를 관철할 수 있는 막강한 힘이 있지 않은가. 코로나19가 창궐하는 시기에 파업을 벌여도 화물연대 노동자들에게 하듯 단호한 업무개시명령은 생각조차 할 수 없고, 다른 국가고시와 달리 응시자들이 자발적으로 시험을 거부해도 어떻게든 재응시의 기회를 제공받는 이들이 바로 의사들이다.

지갑에 건강보험료나 두둑하게 챙겨 들고 까치발로 유리창 너머 정부와 의사의 대화를 훔쳐보면서,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의사들의 따뜻한 양보와 인간적 결단을 기대한다? 시민의 자리가 이렇게 밀려나서는 안 된다.

지금 우리 사회가 당면한 의료 문제는 '의사들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이다. 그렇기에 시민들, 다양한 직종의 보건의료 노동자들, 보건의료를 넘어서는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 의사들이 함께 머리를 맞대며 논의를 이뤄나가야 한다.
 

김명희 / 노동건강연대 운영위원장(소셜 코리아 운영위원) ⓒ 김명희

 
필자 소개 : 이 글을 쓴 김명희는 예방의학 전문의로서 노동건강연대 운영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소셜 코리아> 운영위원이기도 합니다. 관심 영역은 건강불평등, 노동자건강권, 보건의료의 공공성입니다. 한국건강형평성학회의 학회장을 역임했으며, <사회역학> <노동자건강의 정치경제학> <예방의학의 전략> <과로자살> 등의 번역서와 <보건의료 사유화: 불편한 진실> <한국의 건강불평등> <몸은 사회를 기록한다> <당신이 숭배하든 혐오하든> 등의 책을 펴낸 바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소셜 코리아>(https://socialkorea.org)에도 게재됐습니다. <소셜 코리아> 연재글과 다양한 소식을 매주 받아보시려면 뉴스레터를 신청해주세요. 구독신청 : https://socialkorea.stibee.com/subscri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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