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2.24 11:53최종 업데이트 23.02.24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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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9월 11일 독일 베를린의 국제프레스센터에서 귄터 샤보브스키 사회주의통일당 정치국 위원 겸 중앙위원회 서기가 사회주의통일당 중앙위원회 제10차 전원회의 둘째날 심의 과정과 결과에 대해 발표한 후 국내외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 독일연방기록보관소

 
"사회주의통일당은 동독의 모든 주민이... 동독 국경을 넘어... 여행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결정했습니다." 
"언제부터 가능합니까?"  
"음... 제 생각에는 지금 당장부터라는 겁니다. 지체하지 않고요."

동독 여행 자유화를 발표하는 동독 사회주의통일당 대변인 귄터 샤보브스키의 목소리는 상기되어 있었다. 시기를 묻는 이탈리아 기자의 질문에 잠시 머뭇거린 그가 한 답은 '지금 당장'이었다. 그 순간 전 세계 뉴스에는 베를린 장벽이 열렸다는 속보가 쏟아졌고 수천 명의 동독 사람들이 베를린 장벽으로 달려가 문을 열라고 소리쳤다. 

어떠한 명령도 받지 못했지만 장벽 수비대는 그 열기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을 금방 깨달았다. 사람들은 장벽을 넘었고 망치와 정을 가져와 단단했던 벽을 때리기 시작했다. 1989년 11월 9일 밤, 베를린을 나눴던 콘크리트 장벽은 무너졌고 28년 동안 잠겨있던 브란덴부르크 문은 활짝 열렸다. 동베를린에서 100만 명의 시위가 있은 뒤, 4일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베를린 시내에 전시된 베를린 장벽 ⓒ 윤한샘


북적거리는 거리와 울리는 경적 소리, 화려한 클럽이 즐비하고 다양한 인종을 볼 수 있는 독일 수도 베를린은 유럽에서 가장 힙한 문화를 즐길 수 있는 메트로폴리탄이다. 불과 30여 년 전까지 분단 도시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다. 

베를린이 유럽 역사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시기는 13세기로 다른 독일 도시와 비교하면 젊은 축에 속한다. 신성로마제국의 북동쪽, 폴란드와 국경을 가까이 한 덕분에 슬라브족과 상업 교역이 활발했고 한자동맹 도시의 경유지로 사람과 물자가 모이는 곳이었다. 베를린이라는 이름도 늪지대 안의 건조한 지역을 의미하는 슬라브어 '브릴로'(brlo)에서 연유했다. 


베를린이 주목받게 된 시기는 호엔촐레른 가문이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의 지위를 이어받고 이 도시를 수도로 정한 1415년이었다. 17세기 호엔촐레른 가문은 브란덴부르크와 프로이센 공국을 합쳐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공국을 세운다. 이 작은 공국이 왕국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기틀을 쌓은 인물은 1657년 공작이 된 대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이었다. 그가 키운 군대는 프로이센이 왕국으로 가는 발판이 되었다.  

1701년 1월 18일 프리드리히 빌헬름의 아들 프리드리히 3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에게 군대를 협조하는 조건으로 프로이센 왕국의 허가를 요청했다. 스페인 왕위 계승 싸움을 벌이고 있던 황제는 군사력이 절실했다. 당시 브란덴부르크는 제국 내에 있었지만 프로이센 공국은 신성로마제국 영토 밖에 있었기 때문에 황제는 프로이센 왕국을 승낙했다. 

대관식이 열린 곳은 브란덴부르크의 베를린이 아닌 폴란드 영토에 있는 쾨니히스베르크였다. 황제의 손길이 닿지 않는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프리드리히 3세는 스스로 왕관을 쓰며 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 1세가 되었다. 그가 대관식을 연 곳은 쾨니히스베르크였지만 왕국의 수도로 삼은 곳은 여전히 베를린이었다. 

깊은 상처 치유한 베를린의 힘
 

브란덴부르크 문. 이 뒤로 베를린 장벽이 있었다. ⓒ 윤한샘


1685년 절대왕정을 구축한 루이 14세는 낭트칙령을 폐지하고 가톨릭을 국교로 인정했다. 종교적 자유를 잃은 10만 명 넘는 개신교도 위그노들은 프랑스 탈출을 감행했다. 고향을 떠나 고통의 길을 선택한 이들을 받아준 곳이 프로이센 공국이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공작은 같은 해 11월 포츠담 칙령을 통해 약 2만 명의 위그노와 유대인을 기꺼이 수용하고 각종 혜택을 베풀었다. 

위그노를 받아들인 건, 종교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그들이 가지고 있던 상공업 기술 때문이기도 했다. 17세기 프로이센 공국, 특히 베를린은 이들과 함께 경제적으로 크게 성장했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문화를 포용하는 정신을 갖게 된다. 

프로이센의 힘이 가장 비축된 시기는 1740년 왕이 된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부터였다. 그는 강력한 군사력에 계몽주의를 접목한 군주였다. 뛰어난 군사적 재능과 합리적인 정책 그리고 올바른 인재 등용은 프로이센 왕국을 유럽의 열강으로 발전시켰다. 특히 언론 검열과 고문 폐지, 종교 차별 금지 같은 계몽정책과 베를린 아카데미 설립 같은 교육문화 정책은 베를린을 위대한 도시로 만들었다.  

프로이센은 한때 나폴레옹과 전쟁에서 패배하며 치욕을 겪었지만 1815년 워털루 전투에서 승리하며 유럽 열강의 일원이 된다. 오스트리아 빈체제 이후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는 독일 연방을 구성했지만 프랑스에서 유입된 자유주의와 민족의식은 새로운 형태의 정치를 거세게 요구했다.

1848년 선거로 구성된 프랑크푸르트 의회는 이런 흐름의 결과였다. 프로이센은 자유주의에 격렬히 반대하며 의회를 탄압했고 결국 자유주의 혁명은 2년 만에 막을 내리게 된다. 이후 독일 통일에 새로운 길을 제시한 인물이 바로 비스마르크다. 그는 철과 피로 독일 통일을 이룩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교묘한 외교 전략을 펼쳤고 전쟁도 불사했다. 

결국 비스마르크는 1866년 오스트리아 전쟁에서 승리하며 북독일 연방을 구성한다. 1871년 프랑스 나폴레옹 3세와 전쟁에서 연이어 승리한 프로이센은 남독일 연방과 함께 베르사유에서 독일 제국을 선포했다. 베를린은 프로이센의 수도에서 독일 제국의 수도가 되며 게르만 민족을 대표하는 도시로 우뚝 서게 된다. 

19세기 말 독일은 영국, 프랑스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열강이 됐지만 두 번째 황제 빌헬름 2세는 잘못된 길을 선택했다. 제국주의 욕망에 빠진 독일은 나치를 낳고 세계대전의 주범이 됐다. 베를린은 나치의 본산으로 전락했고 패전과 함께 황폐해졌다. 게다가 이 도시는 종전 후 냉전 시대 열강에 의해 반으로 쪼개졌다. 1961년 동독이 세운 베를린 장벽은 90년 만에 다시 독일 분열의 상징이 됐다. 

1989년 겨울, 동베를린에 켜진 100만 개의 촛불은 마침내 장벽을 무너뜨렸다. 다시 하나가 된 베를린은 잘못을 깊이 반성하고 사과했다. 홀로코스트 추모비는 이 도시가 읊조리는 공개 반성문이다. 이 추모비를 바라보는 연방 의회는 다시는 오류를 범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서려 있다. 유리로 된 연방 의회 지붕에서 내려다보는 의회는 국민이 권력의 주인임을 상기시키는데 부족함이 없다.

지금의 베를린은 자유와 다양성이 빛나는 도시가 됐다. 깊은 상처를 치유한 베를린의 힘은 다름 아닌 공감과 관용이었다. 
 

독일 연방 의회. 지붕이 유리로 되어 의회를 볼 수 있다. ⓒ 윤한샘


북독일의 샴페인, 베를리너 바이세

"이 맥주는 북독일의 샴페인이다." - 나폴레옹

베를리너 바이세는 베를린의 밀맥주다. 현재 베를린은 그 명성에 비해 맥주에 관해서는 존재감이 부족하다. 이 맥주는 베를린에서도 쉽게 마시기 힘들다. 그러나 19세기만 해도 베를리너 바이세 양조장은 700개가 넘었다. 한때 베를린을 대표했던 이 맥주가 간신히 명맥만 남은 이유는 무엇일까? 

밀맥주를 의미하는 '바이세'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맥주에는 밀과 보리 몰트 50%가 들어간다. 그러나 바이에른 바이스비어와 전혀 다른 모습을 갖고 있다. 가장 차이점은 젖산균이 만드는 신맛을 품고 있다는 것이다. 벨기에 왈로니아 지역 맥주 세종, 프랑스 북부 지역 맥주 비에르드 가르드와 비슷한 결을 가지고 있으며 벨기에 플랜더스 레드 에일의 흔적도 있다. 

그 이유는 베를리너 바이세가 17세기 프로이센 공국으로 피난 온 위그노들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신맛이 나고 향신료를 넣는 베를리너 바이세는 수백 킬로 떨어진 프랑스 북부와 플랜더스 지방의 것과 유사하다. 베를리너 바이세는 관용과 포용 속에서 태어난 맥주다.

베를리너 바이세의 신맛은 의도적이라기보다 자연스럽게 밴 흔적으로 보인다. 상대적으로 낮은 온도에서 양조된 베를리너 바이세는 젖산균에 영향을 받았다. 나무통에서 진행된 발효와 숙성 과정도 자연스럽게 신맛이 깃드는 데 한몫했다. 사람들은 신맛이 나는 이 맥주에 시럽과 향신료를 넣어 음용성을 높였다. 

지금의 베를리너 바이세는 과거와 같이 양조되지 않는다. 젖산균을 직접 관여시키는 대신 별도로 젖산 발효된 맥주를 섞는 방법으로 균형감을 유지한다. 알코올 도수도 2~3%로 낮다. 넓은 입구를 가진 잔과 빨대가 함께 제공되기도 하며 여름에는 얼음을 넣어 음료수처럼 마시기도 한다. 

20세기 들어 베를린을 주름잡던 베를리너 바이세는 급격하게 추락한다. 19세기 후반부터 성장한 페일 라거와 세계 대전, 분단과 같은 역사의 격변이 베를리너 바이세를 나락으로 이끌었다. 현재 전통의 흔적을 가진 베를리너 바이세를 만드는 양조장은 베를리너 킨들 바이세 한 곳뿐이다.  

하지만 이게 과연 다였을까? 한때 관용을 잃은 베를린이야말로 베를리너 바이세를 몰락시킨 장본인 아니었을까? 타 문화와의 연대 속에서 태어난 베를리너 바이세는 광기에 휩싸인 베를린에서 생명을 유지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맥주는 도시와 사람의 문화를 자양분으로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전통 속 진화하는 베를리너 바이세
 

베를린에서 마신 베를리너 킨들 바이세 ⓒ 윤한샘


베를린 시내 오래된 펍, 메뉴에는 베를리너 킨들 브루어리의 베를리너 바이세가 보였다. 유일하게 남아있는 전통적인 베를리너 바이세를 만드는 베를리너 킨들은 1873년 탄생했다. 1930년대까지 꾸준히 성장했지만 세계대전 당시 모든 것을 잃고 만다.

아마 대부분의 베를리너 바이세 또한 이때 사라졌을 것이다. 1947년 재건된 베를리너 킨들은 다른 스타일의 맥주도 만들었지만 다행히 베를리너 바이세의 끈을 놓지 않았다. 

베를리너 킨들의 베를리너 바이세는 두 종류였다. 라즈베리 시럽을 탄 것은 빨간색을, 우드러프 시럽을 넣은 것은 초록색을 띠고 있었다. 넓은 입구를 가진 잔에는 앙증맞은 빨대가 꽂혀있었다. 옅은 신맛이 스물거렸지만 시럽에서 나오는 뭉근한 단맛이 더 압도했다.

빨간색 베를리너 바이세는 전형적인 라즈베리 향을 느낄 수 있었던 반면 초록색 베를리너 바이세는 비누 같은 인공적인 향이 물씬 올라왔다. 여러 잔 마시기는 다소 힘들지만 가볍게 즐기기에는 이만큼 좋은 맥주도 찾기 드물다. 

21세기 베를린은 다양한 문화를 포용하는 도시로 거듭났다. 그리고 베를리너 바이세도 전통의 껍질을 깨고 다채로운 모습으로 태어나고 있다. 베를린 크래프트 씬은 전통을 재해석하며 베를리너 바이세를 부활시키는 노력을 하고 있다. 그 속에는 틀을 깨는 자유로움과 전통에 대한 자부심이 들어있다. 언제나 그렇듯 맥주는 문화를 따라간다. 베를린을 닮은 베를리너 바이세, 다행히 그 미래는 어둡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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