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3.03 05:04최종 업데이트 23.03.03 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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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가을, 장군 공관에 공관병을 배치하던 제도가 폐지되었다. 그전까지 공관병들은 장군 공관에서 청소, 빨래, 식사 준비, 정원 관리, 때에 따라 텃밭 가꾸기와 과실나무 수확에 이르기까지 온갖 집안일을 도맡아 했다. 장군이 누구냐에 따라 일과시간에만 일을 시키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공관에 숙식하며 아침부터 밤까지 장군과 그 가족의 뒤치다꺼리를 했다.

그러던 공관병은 '박찬주 대장 공관병 갑질 사건'을 계기로 사라졌다. 당시 육군 제2작전사령관으로 재임 중이었던 박찬주 대장 부부가 공관병들에게 가혹행위를 했다는 의혹이 제기된 후의 여파다. 국방의 의무를 이행하러 간 청년들이 장군 공관에서 노비처럼 지내고 있다는 보도에 많은 국민이 분노했다. 결국 국방부는 공관병 제도를 폐지했다.


그런데 박 대장 본인은 기회가 될 때마다 문재인 정부 적폐 청산의 희생양이었다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자신은 공관병에게 갑질을 한 적이 없다고 항변했다. 그러면서 국회의원 총선거와 지방선거에 계속 도전장을 내고 있다.

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2022년엔 부인이 공관병을 감금한 혐의로 대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확정받았다. 본인과 부인이 불기소된 혐의들 역시 대부분 피해자들의 합의에 따라 불기소된 것일 뿐 모함을 당한 게 아니다. 하지만 박 대장은 계속 본인은 무고한 피해자인 양 주장한다(관련기사: 박찬주 대장의 갑질은 정말 무죄인가... 기막힌 반전 https://omn.kr/1zm0n).

박 대장은 2019년 11월 4일 기자회견까지 열었다. 자유한국당의 21대 총선 영입 인사 명단에 박 대장의 이름이 오르내리다 보류되었을 때의 일이다. 이때 박 대장은 "감 따는 것은 사령관의 업무가 아니다. 공관에 있는 감을 따야 한다면 공관병이 따야지 누가 따겠나"라는 말을 남겼다. 여론은 더 안 좋아졌고, 영입은 무산되었다.
 

자유한국당의 인재 영입 대상에서 보류된 박찬주 전 육군 대장이 4일 오전 서울 여의도 63스퀘어 별관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자신을 둘러싼 공관병 갑질 논란에 대해 해명하고 있다. 2019.11.4 ⓒ 유성호

 
국방부 기다렸다는 듯

하지만 '공관의 감은 누가 따나?'라는 아연할 일갈을 박 대장 개인의 일탈적 발화로만 치부할 수는 없다. 일선 지휘관 중에는 공관병 폐지에 불만을 가진 이들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격오지에 근무하는 여러 군인이 그렇듯, 장군들도 가족과 떨어져 지내는 경우가 꽤 있다. 자녀 교육 등의 이유 때문이다. 그러던 차에 공관병을 없애니 장군이 스스로 살림을 꾸려야 해 생활에 애로사항이 있다는 불만이 터져 나왔다.

이러한 불만은 정부가 바뀌고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지난 2022년 7월 6일, 윤석열 대통령은 전군 주요 지휘관 회의를 주재한 뒤 군 조직의 사기 진작과 야전 지휘관 지휘권 차원에서 관사 운영 여건 보장을 지시했다. 대통령은 "관사에서 홀로 생활하는 야전부대 장성급 지휘관들이 부대 지휘에 전념할 수 있도록 관사 운영과 지휘 여건 보장을 위한 조처를 하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국방부는 기다렸다는 듯 계획을 마련했다. 국방부는 '장성급 지휘관의 지휘여건 보장을 위한 관사운영 지원계획'을 수립하고 필요한 규정 개정을 추진했다. 장군 관사 관리 보직을 부활하되, 병사가 아닌 부사관에게 맡기는 것이 계획의 핵심이었다.

각 군 병영생활 관련 규정에는 2023년 2월부로 관련한 조항들도 추가되었다. 관사 관리 보직의 기본 임무는 '관사 내·외부의 관리 및 유지', '관사 관련 안전·보안 등 각종 상황의 유지 및 관리', '기타 지휘관의 공적 임무 수행을 보장하기 위한 활동 중 관사 관리와 관련된 임무'다.

뿐만 아니라 대통령이 언급했던 '홀로 생활하는 야전부대 장성급 지휘관'뿐 아니라 모든 장성급 지휘관에게 모두 관사 관리 부사관을 배정하기로 했다. 병사가 아닐 뿐이지 사실상 공관병 제도가 부활한 셈이다.

직업군인인 부사관에게 공관 관리를 맡긴다는 데 갸우뚱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여기에도 이유가 있다. 요즘 병사들에게 공관 관리를 맡기면 또 예전처럼 갑질 논란에 휘말려 패가망신할 수 있으니 어쩔 수 없이 부사관에게 맡기기로 했다는 것이 여러 군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공관에 장군 수발 들 사람은 필요하고, 병사들은 불안하니 직업인으로 군에 발이 매인 부사관들을 데려다 쓰겠다는 심산이다.

아무리 정권이 바뀌었다지만 폐지한 제도를 이렇게 주먹구구식으로 되살리는 것이 정상적인 상황인지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정말 장군들이 살림 문제로 부대 지휘에 지장을 받는지 면밀하게 살폈는지도 의심스럽다.

설사 지장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직업군인에게 집안일을 맡기자는 결론으로 이어진 것도 이해하기가 어렵다. 세계 어디에도 직업군인에게 장군 집안일을 맡기는 군대는 없다. 조리, 청소 인력을 배치하더라도 민간인을 채용하거나 업체에 외주를 맡긴다.

군대라는 이유로 이토록 아무렇게나 인력 운용을 하게 해서야 되겠는가.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건 우리 군의 상층부가 권한과 특권을 구분하지 못하고 살아온 세월이 길기 때문이다. 권한에 따라 주어지는 건 책임이지 특권이 아니다.

우리는 다시 물어야 한다. '공관의 감은 누가 따야 하는가?' 따질 것 없이 당연히 부하들이 따야 한다는 낡은 생각부터 해체해야 한다. 어느 조직이나 임무는 필요가 합의될 때 주어지는 것이지 '누군가' 필요로 한다고 만들어져선 안 된다. 그곳이 군대라고 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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