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TBC 드라마 <신성한, 이혼>의 한 장면.

JTBC 드라마 <신성한, 이혼>의 한 장면. ⓒ JTBC

 
JTBC 드라마 <신성한, 이혼>에서, 엄마 서진(한혜진)이 용서를 빌기 위해 아이에게 무릎 꿇는 장면을 보다 내 무릎이 꺾이는 심정이 되었다. 그가 무릎 꿇은 이유는 자신의 잘못으로 아이에게 큰 불행과 고통을 안겨주었음을 속죄하기 위해서다. 혼란스러웠다. 아무리 생각해도 서진이 무릎 꿇을 잘못을 찾을 수 없었다.
 
서진은 기상 캐스터 출신 라디오 디제이다. 단란한 가족, 풍요로운 가정 경제, 성공한 커리어 우먼으로 표상되는 그의 삶은 부러움을 사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행복하지 않다. 그는 남편에게 학대 당하는 여자다.
 
누군가에게 특히 가족에게 신체적 폭력은 물론이고 끊임없는 정서적 학대를 당하다 보면 자신을 잃게 된다. 늘 감시 당하고,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해야 하고, 끊임없는 비하와 욕설과 조롱을 감내해야 한다. 이런 고통 속에 '나는 사랑받을 자격이 있어, 내 삶은 소중해'를 다짐하기란 불가능하다.
 
피폐해진 서진은 어쩌다 한 남자를 알게 됐고 외도를 했다(서진이 외도한 것이 그르냐 아니냐는 이 글의 논점이 아니기에 논외로 하겠다). 그 남자는 서진 몰래 성관계 동영상을 찍고 이를 유포했다. 서진은 생지옥에 떨어졌다.
 
성 착취물이나 불법 촬영 동영상이 유포되는 디지털 성폭력의 피해는 상상을 초월한다. '생지옥'이란 말은 전혀 과장이 아니다. 아무리 지우고 지워도 어디선가 다시 나타나 떠도는 동영상은 죽어도 죽지 않는 좀비처럼 한 여자의 인생을 파괴한다. 한때 'N번방'으로 전국이 떠들썩했지만 지금은 모두 잊은 듯하다. 범인들이 체포됐고 실형을 받았으니 디지털 성폭력이 사라진 줄 안다. 현실은 전혀 아니다.
 
2022년 여성가족부가 발표한 '2022년 여성폭력통계'가 밝힌 디지털 성폭력 범죄의 비중은 2019년 20.2%, 2020년 25.1%에서 2021년에는 33.0%로 가파르게 증가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양심을 버린 이용자들에 의해 퍼지는 좀비 동영상은 여전히 피해자들의 숨통을 조이고 있다. 서진 또한 자신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불법 성관계 동영상이 유포되었다. 남편에게 온갖 모욕과 학대를 당하고 이혼 요구에 직면한다.
 
서진은 왜 무릎 꿇었나
 
 JTBC 드라마 <신성한, 이혼>의 한 장면.

JTBC 드라마 <신성한, 이혼>의 한 장면. ⓒ JTBC

 
서진은 이혼 전문 변호사를 찾아가 이혼 절차를 의뢰한다. 간통죄는 사문화되었지만 외도는 특히 여성에게 여전히 강력한 귀책사유다. 서진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단지 양육권만을 원하지만, 부정한 엄마에게 아이를 줄 수 없다는 남편의 고집으로 이혼 조정은 실패한다. 마침내 소송에 돌입하고 여느 이혼 소송이 그렇듯 진흙탕 싸움이 된다.
 
서진에게 불리할 것 같던 소송은 돌발 상황이 발생하며 승리한다. 돌발 악재(남편 입장에서)란 다름 아닌 아이 아빠가 아이에게 엄마의 불법 촬영 동영상을 강제로 보게 한 반인륜적인 죄악이 드러나면서다. 입이 안 다물어지는 가공할 사건이지만, 이 일이 없었다면 서진은 이기기 어려운 싸움을 이어가야 했을 것이다.
 
서진의 피해와 고통은 안타깝지만, 이것이 계기가 되지 않았다면, 그는 불행한 결혼을 끝내기 힘들었을 것이다. 아내를 교묘하게 지능적으로 통제하고 주변 사람들로부터 고립시키는 남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일은 학대 당하는 아내에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책 <성스러운 동물성애자>의 저자 하마노 지히로가 10년간 데이트 폭력과 남편 폭력을 가한 남자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쓴 극단적인 방법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하마노는 오랜 세월 데이트 폭력을 당했지만, 아무리 호소해도 사랑싸움 정도로 치부 당했다. 그가 악마 같은 애인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마지막으로 쓴 카드는 뜻밖에도 결혼이었다. 결혼 후 학대나 폭력이 발생하면 가족이 개입해 법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걸 노린 하마노는 최악의 선택으로 최선의 결과를 얻으려 했다. 어리석다고 비난하겠지만 그에겐 그 방법밖에 없었다. 어차피 죽느니만 못한 인생, 목숨을 건 마지막 도박을 결행한 것이다. 그는 결혼했고 폭력의 증거를 모았고 이를 토대로 이혼할 수 있었다. 10년간 갇혀 있던 감옥에서 겨우 벗어났다. 서진 또한 벗어날 수 없었던 학대로부터의 탈출을 깊은 상처를 남기며 얻어낸 셈이다. 어떤 남자도 지긋지긋한 애인이나 아내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이렇게 하지는 않는다.
 
소송에서 승리했지만 상처뿐인 영광이다. 아이에게 불법 성관계 동영상을 폭로 당한 엄마가 어떤 심정일지는 가늠하기도 어렵다. 그는 법정에서 승소를 이끈 변호사에게 감사를 표하며 아이에게 "죽을 때까지 용서를 빌"겠다고 다짐한다. 해방의 기쁨에 몰입되었던 나는 잠시 서진의 이 말에서 머뭇댔다. 서진이 무슨 용서를 왜 빌어야 하는 걸까.
 
엄마의 외도, 아빠의 외도
 
 JTBC 드라마 <신성한, 이혼>의 한 장면.

JTBC 드라마 <신성한, 이혼>의 한 장면. ⓒ JTBC

 
엄마로서 이 일련의 아픈 경험들이 아이에게 미안한 것은 당연하다. 얼마나 돌이키고 싶겠는가. 하지만 돌이킨다 해도 실상 서진이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학대하는 남편을 개과천선 시키겠는가, 비열한 애인이 몰래 저지른 범행을 막을 수 있었겠는가. 하지만 피해자인 서진은 죄 많은 엄마가 되어 어린 아들에게 무릎을 꿇고 속죄하고 있었다.
 
엄마의 외도는 아이에게 상처일 것이다. 어린아이에게 엄마는 큰 세계일 테니, 한동안 세상 한 귀퉁이가 무너진 상태로 살아가야 할 것이다. 하지만 아이는 클 것이고, 세상을 알아갈 것이고, 무너진 귀퉁이도 어느덧 다시 세워질 것이다. 엄마가 얼마나 심대한 피해를 당했는지 그리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 무엇을 버려야 했는지도 어렵게 깨닫게 될 것이다. 그때쯤 고통은 과거가 되어있을 것이고, 마음으로도 몸으로도 엄마를 떠날 시간일 것이다.
 
엄마는 어떨까? 그 고통이 지난 일이 될 수 있을까? 무참히 뿌려진 불법 촬영 동영상은 시시때때로 출몰해 유령처럼 떠돌 것이다. 나쁜 엄마라는 터무니없는 죄책감에 주눅 들고, 커가며 사나워지는 아이의 비수 같은 말에 번번이 베일 것이다. 드라마가 굳이 엄마를 아이 앞에 무릎 꿇리지 않아도, 이미 처절한 자괴감으로 자신을 수도 없이 죽이는 벌을 주지 않았겠는가.
 
엄마의 외도가 처절한 응징을 받는 반면, 아빠의 외도는 어떤가? 영화 <미성년>에 등장하는 외도한 아빠를 보자. 그의 갈팡질팡 불륜은 애인도 아내도 모두 불행하게 만든다. 마침내 외도의 결과로 아이까지 태어나지만, 그 아이의 짧은 생을 책임진 건 다름 아닌 아빠의 딸이었다. 딸에게 이토록 추한 모습을 보였지만 아빠는 무릎 꿇지 않는다. 이 영화뿐 아니라 어떤 콘텐츠에서도 외도로 이렇게 속죄하는 아빠는 등장하지 않는다. 이상하지 않은가? 어째서 엄마의 외도는 이토록 가혹한 죄 닦음을 해야 된다고 믿어지는가. 왜 오직 모성만이 정숙하지 않음으로 단죄되어야 한다고 당연시되는가. 왜 피해자인 엄마가 죄인이 되어 아이 앞에 무릎 꿇는 참혹한 드라마를 아직도 봐야 하는가. 드라마 제작진은 대답할 수 있나?
덧붙이는 글 개인 블로그 게시
<신성한, 이혼> 디지털 성폭력 모성 이혼 가정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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