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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둘레길 3코스는 전북 남원시 인월면 월평마을에서 경남 함양군 마천면 금계마을까지 20.5km를 하천을 따라가며 고개를 넘어서 지리산의 주능선을 바라보며 걷는 옛길이다. 이 둘레길 코스의 곳곳에서 장엄한 지리산 주능선의 하늘 마루금을 조망할 수 있다.

계곡을 따라 올라가며 자리 잡은 다랑논과 마을은 조화로운 생태계를 이루며 인상적인 풍경으로 다가온다. 장항마을과 창원마을 당산에서 지리산 천왕봉을 바라보며 둘레길 인증 스탬프를 찍을 때 감동이 밀려온다.
 
등구재 산수유 꽃망울
 등구재 산수유 꽃망울
ⓒ 이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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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칩 절기를 며칠 지난 3월 중순의 지리산둘레길은 온갖 나무들이 겨울눈을 비비며 잠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이제 막 꽃봉오리 봉긋한 산수유보다 산새들이 지저귀는 활력에서 봄소식을 먼저 듣는다.

지리산둘레길 3코스가 출발하는 운봉고원 인월의 전통시장은 섬진강 화개나루의 화개장터처럼 영호남 백성들이 소통하는 화합의 장터였다. 달오름마을에서 람천(濫川)의 둑길을 시냇물과 함께 한참을 걸으면 중군마을의 성루가 군진(軍陣)의 위용을 드러낸다. 고려 말(1380년) 왜구를 토벌하려는 고려 군대의 중군(中軍)이 주둔했다고 한다. 기와집 수십 채가 마을을 이루고 민화풍의 벽화가 민속 마을 같다.

지리산 주능선을 조망하며 등구재를 넘다

철쭉 축제로 유명한 바래봉으로 이어지는 덕두산의 산자락인 배넘이재를 힘들게 넘으면 장항마을이다. 이 마을의 윗당산인 400년 수령의 거대한 소나무 언덕을 지리산 주능선의 천왕봉이 내려다본다. 소나무 당산에서 천왕봉 위로 아침 태양이 비추는 풍경을 한참 바라보았다.
 
장항마을 윗당산 천왕봉 일출
 장항마을 윗당산 천왕봉 일출
ⓒ 이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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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항교를 건너서 산내우체국을 지나고 임도를 따라 둘레길을 찾아 올라간다. 둘레길은 어느새 송림을 지나며 운치 있는 오솔길로 변하는데 키 큰 소나무 줄기들 사이로 지리산 주능선이 펼쳐 보인다.
 
등구재 지리산 주능선
 등구재 지리산 주능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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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비탈을 따라 몇 번을 오르내리면 임도는 중황마을에 들어선다. 지리산 천왕봉과 주능선이 한 폭의 수채화로 어울렸다. 상황마을에 다랑논이 겹겹이 층계를 이루었는데 이곳의 다랑논으로 천석꾼이 가능했다고 한다.

둘레길이 길머리를 들어 올리며 등구재를 향해 경사도를 높이고, 다랑논이 걸음 따라 풍경을 달리하며 다가온다. 다랑논의 수평을 지탱하는 축대가 낮은 곳은 돌담처럼, 높은 곳은 성벽처럼 견고하게 보인다. 산비탈 아래에 농사를 포기한 다랑논은 묵정밭이 되어 있고 장끼가 푸드덕 힘차게 날아간다.
 
등구재 상황마을 다랑논
 등구재 상황마을 다랑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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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구재 쉼터를 지나서 고갯마루에 올라섰다. 삼봉산(1,187m)에서 백운산(904m)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를 가로지르는 고갯마루는 전북 남원시 산내면과 경남 함양군 마천면의 경계이다. 두세 걸음 걷다가 방향을 바꾸어 몇 번이나 전라도와 경상도를 오가는 여유를 부리면서 판소리 변강쇠가에 나오는 나무가 한 부분을 읊어본다.

오동나무 베자 하니 순(舜)임금의 오현금(五弦琴).
살구나무 베자 하니 공부자(孔夫子)의 강단(講壇).
소나무 좋다마는 진시황(秦始皇)의 오대부(五大夫).
잣나무 좋다마는 한 고조 덮은 그늘.


판소리 변강쇠가의 무대이기도 한 이 등구재는 숲이 무성하다. 변강쇠가 이곳에 나무하러 와서 도끼 빼어 들어 메고 큰 나무를 한두 번씩 찍은 후에 나무의 내력(來歷)을 열거하며 벨 나무가 전혀 없다고 사설을 늘어놓는다. 결국 변강쇠는 나무 장승을 하나 뽑아서 지게에 얹어 짊어지고 간다. 등구재의 무성한 숲에 바람이 세차게 불며 솔바람이 낮은 퉁소 소리를 낸다.
 
등구재 갯버들 개화
 등구재 갯버들 개화
ⓒ 이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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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구재를 넘으니 낙엽송의 낙엽이 제법 쌓여 푹신한 흙길이다. 고갯마루 아래 가까이에 소류지가 있다. 숲속 동물의 오아시스가 될 듯하여 발걸음 소리를 낮추었다. 임도를 길게 걸어 내려와 창원마을 당산에 이르렀다. 키를 넘는 조릿대가 바람에 출렁이는 사이로 천왕봉이 하봉과 제석봉을 좌우로 거느리고 신화처럼 아스라이 보인다.

창원마을에서 둘레길은 마을 안으로 들어서지 않고 산자락을 향해 다시 올라간다. 둘레길은 잠시 힘든 수행의 과정이 된다. 바위 너덜지대를 오르내리는 돌밭길이 발걸음을 더디게 한다. 이 마을에는 조선 시대에 이 지역에서 세금으로 거둔 약초 등을 보관하는 창고가 있었다고 한다.

숲길이 끝나며 시야가 활짝 열린다. 금계마을의 왼쪽 산 귀퉁이에 마천석 채석장이 나타나며 수억 년 침묵하던 화강암의 속살이 드러나 있다. 검은색이 많은 마천석은 당구대를 비롯하여 건축 자재로 유용하다. 경관이 훼손된 채석장의 거대한 수직 단면에 높이 108m, 좌대 30m, 어깨너비 40m에 이르는 대형 불상을 조각하고 있다고 한다.
 
창원마을 지리산 주능선
 창원마을 지리산 주능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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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계마을에 도착하니 인월에서 출발한 람천이 마천으로 이름이 바뀌어 흐르고 있다. 개울에 징검다리가 있었던 이 마을의 옛 이름은 노디목이다. 20.5km의 지리산둘레길 3구간은 8시간 정도 걸리는데 몇 시간은 지리산 주능선을 조망할 수 있어 지리산 주능선 조망길이라고 해도 됨직하다.

등구재, 올라가도 다랑논 내려가도 다랑논

지리산둘레길 3코스는 지리산 주능선 조망과 다랑논 풍경 보기가 주제로 충실하다. 다랑논은 다랭이길로 불렸던 등구재 고갯길의 핵심 소재를 이룬다. 봄마다 보릿고개에 고생했던 가난한 시절에 등구재 자락에 넓게 펼쳐진 다랑논은 생명의 터전이었다.

다랑논은 자연적 지형에 의지해 조성된 논배미로 구불구불 이어지는 논둑길이 주변 경관과 거스름 없이 자연스럽다. 산자락을 따라 좁고 길게 형성된 다랑논은 모내기를 앞두고 물을 가득 담은 봄철과 벼가 익어 황금물결을 이루는 가을철은 더욱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한다.
 
창원마을 당산 천왕봉 조망
 창원마을 당산 천왕봉 조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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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는 수분을 충분히 머금은 숲이 무성하여 계곡에 여울져 흐르는 물소리가 명랑하다. 다랑논에 둘러싸여 마을이 여유롭게 형성되었고 멀리 아래쪽에 람천과 마천이 유유히 흐른다. 다랑논은 숲과 하천의 수계를 연결하며 농토를 마련해 마을을 형성하는 생태계의 중심이 되어 있다.

송나라의 사신으로 고려에 왔던 서긍(徐兢, 1091-1153)은 고려의 다랑논을 사다리나 층계와 같다고 기록했다.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은 <과농소초>(課農小抄)에서 다랑논을 제전(梯田)이라고 했다. 지리산 지역의 다랑논은 18세기 이후 많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금계마을 다랑논 풍경
 금계마을 다랑논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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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랑논은 같은 모양이 거의 없고 인상적인 이름을 간직하고 있다. 잔다랑이, 삿갓다랑이, 죽배미, 구들장논, 공중배미, 삿갓배미, 엉덩이배미, 소시랑배미, 사발배미, 반달배미, 천상배미, 하늘배미, 산다랭이, 장구매비, 올빼미논, 잔다랭이와 넓적배미 등. 논배미에 잘 어울리는 이름들이 고향이야기처럼 그립고 정겹다.

농사를 포기하는 다랑논 면적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자연스레 논두렁을 지탱하던 석축은 무너지고 잡초와 나무가 자라 다랑논이 옛 모습을 잃어가고 습지처럼 변하고 있어 안타깝다. 세상의 변하는 흐름에 따라 다랑논이 택지로 바뀌어 산뜻한 전원주택이 들어서기도 한다.
 
금계마을 칠선계곡 천왕봉
 금계마을 칠선계곡 천왕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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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면 모를 내기 위해 물을 채운 다랑논에 지리산 주능선이 반사되면 하늘의 지리산과 수면의 지리산이 대칭되어 멋진 장면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이 장면을 만날 수도 있는 봄날의 지리산둘레길은 바쁘게 회전하는 생활에서 벗어나 마음을 비치어보는 여유로운 풍경이 가능할 것이다.

자연과 문화가 조화된 향토 유산인 둘레길을 걸으면 마음은 평온하게 멈춘다. 다랑논에서 숲, 수계(水系)와 마을을 아우르는 생태계의 조화로운 구성을 체험한다. 등구재 다랑논의 풍경을 배경으로 바라보는 지리산 주능선의 하늘 마루금은 여유롭고 듬직하다. 지리산 주능선과 천왕봉은 수많은 걸음으로 다가서고 싶은 성찰의 구심점으로 항상 의연하다.

태그:#함양 등구재, #함양 다랑논, #변강쇠 나무가, #함양 마천석, #지리산 주능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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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관광해설사입니다. 향토의 역사 문화 자연에서 사실을 확인하여 새롭게 인식하고 의미와 가치를 찾아서 여행의 풍경에 이야기를 그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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