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여의도 한 밥집에서 사제의 만남
 여의도 한 밥집에서 사제의 만남
ⓒ 박도

관련사진보기

 
나는 1971년 7월 10일, 교직에 몸담아 20004년 2월 29일에 퇴직한 바, 정확히 32년 8개월 19일 간 근속했다. 그 기간 중 네 학교를 거쳤다. 교사 초년 시절, 서울 용산구 보광동 소재 오산중학교는 3년 6개월을 근무했다. 그 오산학교는 그 유명한 평북 정주의 다섯메 오산학교를 재건한 학교다. 그런 탓인지 학교 안팎에 북녁 출신 인사들이 많았다.

종교인 함석헌, 한경직, 언론인 홍종인, 그밖에도 여러 분들이 고향 학교를 찾아주셨다. 그때 찾아주신 인사 가운데 당시 철학자로 명성이 자자했던 숭실대 안병욱 교수님의 카랑카랑하신 교직원 연수 강연 말씀은 50년이 지난 지금도 쟁쟁히 들려오는 듯하다.

"사람으로서 가장 보람된 일은 산에 나무를 심는 일과 사람을 교육하는 일입니다."

산에 나무를 심으면 산림녹화로 수해와 가뭄을 예방하고 목재와 연료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요, 훌륭한 인재를 기르면 장차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기 때문이라고 힘주어 말씀하셨다.

사람을 가르치는 일, 가장 보람된 일

교단에서 물러난 지 20년이 된 이즈음, 지난 생애를 되새길 때마다 할 수 있다면 성능 좋은 지우개로 몽땅 지우고 싶지만 그래도 33년 교사생활로 제자들을 가르친 일만은 자랑스럽다. 그들은 내 삶의 보람이다.

어제(15일) 아침, 식사 후 차를 마시는데, 한 제자로부터 초대 전화가 왔다. 뵙고 싶다면서 언제 서울 오시느냐고 묻기에 자네는 바쁘고 나는 시간에 구애 받지 않으니 편한 날 연락주면 내가 서울로 가겠다고 답했다. 그러자 마침 어제 저녁은 약속이 없다면서 초대하기에 그날 오후 차비를 차리고 나섰다.

이 친구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아들 김홍걸씨로, 나는 그가 고등학생이던 1980년, 1981년 두 해를 가르친 바, 그가 가장 힘든 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 그는 자신의 암담한 심정을 시로 읊은 것을 나에게 보여 주기에 그 작품을 그해 교내문예현상 시 부문 장원으로 천거한 적이 있었다(관련 기사: 한때 '사형수 아들'의 전화, 그에게 힘을 보태기로 했다 https://omn.kr/1ssmw ).
    
김대중 대통령의 생전 부탁 "선생이 사람 좀 만들어주시오"
 
김대중 전 대통령과 만남 당시 찍힌 사진.
 김대중 전 대통령과 만남 당시 찍힌 사진.
ⓒ 박도

관련사진보기


그가 졸업 후 언론의 집중 포화를 받았을 때 나는 그를 나무란 적이 있었고, 몇 해 전에도 또 집중포화를 맞고 있기에 후다닥 상경하여 형제 우애를 돈독히 하라고 싫은 소리를 했다. 그는 내 말을 묵묵히 듣고는 그 얼마 후 형수와 작은 형, 등 3형제가 손을 다정히 잡은 사진을 보내왔다.

재학시절 늘 고개를 숙이며 다니는 그를 대할 때마다, 경북 구미 본토박이로 구미초등학교를 졸업한 나로서는 왠지 미안한 감이 앞섰다. 언젠가 만난 그의 아버지 김대중 대통령은 내 손을 잡고 부탁했었다.

"내가 정치에 몰두하느라 자식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습니다. 선생님이 사람 좀 만들어 주시오."
 

그의 어머니 이희호 여사는 해마다 연말이면 친필 크리스마스카드를 써서 내게 보내주셨고, 돌아가시던 전해까지 20여 년을 강원 산골로 보내주셨다. 나의 아버님은 늘 정치인 김대중의 평화통일론에 박수를 보냈고, 경북 구미사람이면서도 밀짚모자를 쓰시고는 뙤약볕에 선거운동을 하시곤 했다.

남북 통일 꿈꾸던 아버지... 그에 대한 불효 씻고자

그 이유는 아마, 아버지는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라면 으레 통일 문제를 제1의의로 삼아야 할 덕목이라고 봤기에 지지하셨던 것 같다. 그런 아버지를 잘 이해하지 못한 내가 아버지 사후에 불효를 씻고자 그에게 객쩍은 잔소리를 했나 보다. 나는 그를 만날 때마다 수첩에 그가 챙겨야 할 항목들을 하나하나 적은 뒤 낱낱이 일러주곤 한다.

이번에도 몇 가지 주제로 얘기했다. 특히 내가 힘주어 얘기한 것은, 그의 아버지가 세운 6.15 금자탑을 잘 계승해 나가라고 거듭거듭 당부하는 것이었다. 내 이야기를 들은 그도 화답을 했다. 

"남북관계가 개선되어 북에 갈 수 있다면 평양이나 백두산으로 선생님 모시겠습니다. 그때까지 부디 건강하십시오."
"고맙네. 그날을 기다리겠네."
 

늦은 밤 귀가하면서 문자를 보내자 곧 답이 돌아왔다.
 
"저녁 잘 먹었네. 고속버스로 내려가는 중이네."
"예, 조심해서 가십시오."

태그:#어떤 사제, #남북회담
댓글2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