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3.18 19:10최종 업데이트 23.03.18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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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가 격변의 시기를 지나고 있다. 사람들이 몰려오면서 인구 구성이 다양해지고 문화예술의 향기가 풍성해졌는가 하면, 땅과 바다가 환경파괴로 신음한다는 경고음도 들린다. 4·3의 상처가 조금씩 아물어가고 있는 한편으로는 새 공항 건설을 두고 갈등이 고조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서도 천혜의 땅 제주도를 살기 좋은 평화의 섬으로 만들기 위해 각자의 분야에서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제주 사름(람)을 찾아가 그들의 목소리를 전한다.[편집자말]

무극재 서재에서 권 작가는 장자 제물편 '유무극지야'(끝없는 자유의 경지에서 노닌다)에서 따온 '무극재'를 당호이자 자신의 호로 삼고 있다. ⓒ 황의봉

 
"여든 넘어 쓴 두 번째 학사모… '또 다른 20년 살 것'".

지난 2월 제주의 한 일간지 기사 제목이 눈길을 끌었다. 배우지 못한 한을 풀기 위해 노년에 이르러 대학 공부를 했다는 사연은 가끔 접하지만, 80살이 넘어 두 번째 학사모라니. 연락처를 알아내고 마침내 마주 앉았다. 권무일, 81세, 서울대 철학과와 행정대학원 졸업, 대기업 임원과 중소기업 사장, 제주 생활 20년 차에 한라대학교 관광일본어과 졸업.

그는 뜻밖에도 소설가였다. 66세에 수필로 등단했고, 지금까지 6권의 저작물을 냈다. 수상록을 제외하면 5권이 역사 인물을 다룬 것들이다. <의녀 김만덕> <소설 남이> <헌마공신 김만일과 말 이야기> <평설 이방익 표류기> <제주 표류인 이방익의 길을 따라가다>로, 그의 나이 67세에서 78세 사이에(2009년∼2020년) 6권을 써냈다. 2년마다 한 권꼴로 책을 출간했으니 대단한 열정이다. 일본어를 공부하기 위해 다시 대학을 다닌 이유도 일본어로 쓰인 자료를 보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권무일 작가가 펴낸 6권의 책 권 작가가 제주로 이주한 후 그의 나이 67세에서 78세 사이에 펴낸 책들이다. ⓒ 황의봉


글을 쓰게 된 연유를 물었더니 '외로워서'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20년 전 제주로 와서 8년간 가족과 떨어져 살 무렵, 외로우니까 글을 쓰게 됐고, 쓰다 보니 자신에게 글솜씨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소설을 쓰면 외롭지 않아요. 소설은 혼자서도 즐길 수 있습니다. 상상 속에서 많은 사람과 대화하고 사랑하고 미워할 수 있으니까."


제주에 온 지 4년이 지난 2008년 계간지 <문학과 의식>을 통해 수필가로 등단하게 되자, 친구가 이왕이면 소설을 써보라고 권했다. 그는 이왕이면 제주 혹은 제주 사람을 소재로 한 소설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소설을 쓰기로 하고 제주에 관해 공부해 보니, 육지에서 보던 잣대로 제주를 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제주 고대사부터 공부한 배경이다. 이런 그에게 제주 역사에 등장하는 '의녀 김만덕', '헌마공신 김만일', '표류인 이방익'이 눈에 들어왔다. 이런 훌륭한 사람들이 주목받지 못하는 게 안타까웠다. 널리 알려야겠다는 심정으로 각종 자료를 섭렵하고 글로 엮어나가는 작업에 깊이 빠져들어 갔다.

소설로 되살아난 김만일과 이방익

권무일 작가의 역사 소설 중에서도 기자의 관심을 끈 작품은 김만일과 이방익을 주제로 한 소설이다. 김만덕은 제주에 흉년이 들자 사업으로 벌어들인 막대한 재산을 털어 빈민을 구휼한 여성으로, 드라마로도 방영돼 제주는 물론 육지 사람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남이 장군 역시 유명한 인물인 데다가 제주와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 이에 반해 김만일과 이방익은 어렴풋이 이름 정도를 알고 있던 터여서 흥미를 끌었다.

헌마공신 김만일(1550∼1632)은 누구인가. 작가는 말한다.

"김만일은 제주의 산야에서 무려 1만여 마리의 말을 키운 사람입니다. 전투에 나갈 수 있는, 몽골 초원을 누볐던 크고 튼튼한 말에 못지않은 우수한 혈통의 전마(戰馬)를 키웠어요. 이 말들을 임진왜란 때 500마리, 광해군 때 500마리, 정묘호란 때 240마리, 병자호란 때 500마리 국가에 바친 기록이 나옵니다. 김만일이 키운 말을 산에서 키웠다고 해서 산마(山馬)라고도 하는데, 수천 마리의 산마를 나라에 헌납해 헌마공신이라고 한 겁니다."

김만일이 키우는 말들은 한때 제주의 국영 목장 전체에서 키우는 말의 숫자에 버금가거나 능가할 정도로 많았다. 권 작가는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등 사료는 물론 제주도 문헌과 말 관련 자료를 샅샅이 뒤지고, 문학적 상상력을 입혀 헌마공신을 비로소 세상에 드러낼 수 있었다.

김만일 사후 효종 임금은 김만일의 후손을 종6품의 산마감독관에 임명해 세습하도록 했다. 고종 때까지 240년간 총 83명의 후손이 산마감독관을 세습하면서 제주도의 말 사육을 주도한 것이다. 김만일이라는 제주의 영웅이 육지에서 온 소설가의 힘으로 화려하게 되살아난 셈이다.
  

권무일 작가와 대만의 촌로들 이방익 표류 현장답사 차 대만에 간 권 작가(맨 오른쪽)가 현지 노인들과 이방익의 발자취를 찾고 있다. ⓒ 권무일

 
표류인 이방익도 권무일 작가의 소설을 통해 생명력을 얻어 부활했다. 제주의 향토학자 김석익(1885∼1956)의 <탐라기년>이라는 책에 나오는 아래와 같은 4줄짜리 짤막한 기록을 보면서 작가의 인물 탐구가 시작됐다.
 
제주사람 이방익이 표류하여 팽호도에 표착하고 대만, 하문, 절강, 양자강 등지를 지나 북경에 이르고 거기서 고국으로 돌아왔다. 연암 박지원이 정조의 명에 의해 이를 기록해 두었다.
 
이방익도 김만일과 마찬가지로 치밀한 자료 수집으로 전모를 그려냈다.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일성록> 등 조선시대 사료에서부터 <중국고금지명대사전>, <중국역사지도집> 등 중국 자료 그리고 전문 연구자의 논문에 이르기까지 샅샅이 훑어나갔다. 이 과정에서 최남선이 주도한 잡지 <청춘> 창간호에 이방익이 쓴 국·한문 기행 가사인 <표해가>가 실려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발굴하기도 했다.

이방익 표류기를 요약하면 이런 내용이다. 제주 사람 이방익(1757~1801)은 왕궁의 수비를 맡은 부대에 속한 무관이었다. 휴가를 얻어 고향 제주로 와서 어머니 산소를 이장하고, 육지로 돌아가기 전에 바다에 배를 띄워 여흥을 즐겼다. 그러던 중 갑자기 '일진광풍'을 만나 표류하기 시작한다. 배에 있던 8명의 일행은 빗물을 받아 마시고, 배 안으로 뛰어든 물고기를 먹는 등 기적적으로 생존한 끝에 대만 인근 팽호도라는 섬에 표착한다.

이곳에서 구조된 이방익 일행은 대만을 거쳐 중국 본토로 이송된다. 중국 관리들은 이방익이 무관으로 인물 됨됨이가 훌륭하고 주자학에도 지식이 있음을 높이 평가해 극진히 대접하고 북경의 황제에게도 보고한다.

이방익 등은 중국 당국의 배려로 복건성, 절강성, 강소성 등 중국의 부유한 강남 지방을 두루 여행하고, 동정호를 찾아 중국 3대 누각의 하나로 꼽히는 악양루에도 오른다. 당시까지만 해도 조선의 지식인은 서책을 통해 중국 강남을 알고 있었을 뿐 실제로 가본 사람은 없었으니 진기한 경험이었다.
  

산해관을 찾은 권무일 작가 부부 권 작가는 이방익이 표류 여정을 끝내고 귀국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통과한 만리장성 동쪽 끝 관문인 산해관까지 답사했다. ⓒ 권무일


청나라 수도 연경(지금의 북경)에서 가경제(嘉慶帝)를 만나기도 한 이방익은 마침내 압록강을 건너 고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8개월 24일 만의 귀환이었다. 정조는 이방익으로부터 자초지종을 보고받고 연암 박지원으로 하여금 이를 글로 정리해 올리라는 명을 내린다. 연암의 서이방익사(書李邦翼事)가 나온 배경이다. 이방익도 훗날 자신의 경험을 국·한문 가사체 <표해가>와 한글 <표해록>에 남겼다.

권무일 작가는 이방익의 <표해가>를 읽으면서 여기 나온 생사의 갈림길에서 겪은 고난과 기적 같은 일들이 심금을 울렸다고 말한다. 또 대만해협의 팽호도에 표착하여 대만으로 호송되고 다시 중국 각지를 돌며 많은 풍물과 문화를 체험하고 여러 유적지를 편답(遍踏)하면서 그 감회를 적은 점이라든가, 중국인들과 접하면서 당당하게 조선인의 자존감을 뽐내고 극진한 대접을 이끌어낸 사실에서 커다란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이방익을 다룬 권무일 작가의 책 제목은 <평설 이방익 표류기>다. 엄밀히 말하면 소설이 아니다. 원문을 읽기 쉽게 번역하고, 자세한 해설을 덧붙였다. 해박한 한자 지식과 치밀한 자료 분석으로 완성한 저술인 셈이다.

이방익과 권무일 사이에는 질긴 인연의 끈이 있었던 것일까. 권 작가가 <평설 이방익 표류기>를 펴내고 출판 기념 토론회를 한 자리에 마침 펑춘타이 중국 제주 총영사가 있었다. 펑춘타이 총영사가 권무일 부부와 토론회 좌장을 맡았던 심규호 교수(제주국제대) 부부를 관저로 초청하기에 이른다. 이 자리에서 권 작가가 이방익의 길을 따라가는 답사 구상을 밝히자 총영사가 적극 지원하겠다고 나섰다.
  

중국 전문가들과의 토론 절강성 항주에서 권무일 작가 등 답사단이 중국측 인사들과 이방익의 표류 여정에 대해 토론하고 있다. ⓒ 권무일

 
드디어 2018년 4월 권 작가를 비롯한 탐방단이 꾸려졌다. 이방익이 표착한 팽호도를 시작으로 중국의 강남 지역을 답사하는 꿈같은 일이 벌어졌다. 1차 답사지인 대만은 자비로, 2차 복건성과 3차 절강성·강소성은 총영사관 지원으로, 4차 북경∼산해관은 자비로 이방익의 경로를 추적했다. 말 그대로 노구를 이끌고 탐사 여행을 다녀온 것이다. 이렇게 해서 나온 책이 중국답사기 <제주 표류인 이방익의 길을 따라가다>로 그의 6번째 저작이다.

권무일 작가는 중국 현지답사를 구상한 배경을 이렇게 말한다.

"내가 우연히 접하게 된 순한글 <표해록>은 당시 조선의 현실과 다른 놀라운 경험 세계를 보여주고 있어 나에게 강한 의구심을 안겨주기도 했다. 누군가 필사한 그 <표해록>이 과연 이방익 자신이 쓴 것인지 알 수가 없고, <표해록>에 적힌 곳이 실제 있는 곳인지, 그가 경험한 것들이 실상인지를 그 책의 내용만 가지고는 알 수가 없었다. 결국 나는 이방익의 작품 세계를 뛰어넘어 나 스스로 체험의 세계로 달려가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엉뚱한 생각을 했다."

진정으로 제주 사랑하는 제주인

권 작가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그가 대단한 지적 호기심의 소유자임을 알 수 있다. 어느 면에서는 전문연구자의 수준을 뛰어넘는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래서일까, 그는 자신의 관심사가 호기심으로 인해 자꾸만 곁가지로 뻗어나간다고 토로한다. 가령, 중국 답사 여행 중 만난 중국학자와 대화하다가 일본이 과거 중국 침략을 하기 전에 학자, 노동자, 스파이 등을 중국에 보내 비밀리에 중국 22개 성의 구석구석을 조사하고 연구하여 책으로 펴냈다는 사실을 듣게 된다.

여기에서 그는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화하기 위해 사전에 어떤 작업을 했는지를 탐구하기로 마음먹었다는 것이다. 특히 일본이 강화도 조약 체결 후 1883년 조일통상장정을 맺게 되는데, 그 내용 중에 우리 바다에 일본 어민이 왕래해 고기를 잡아도 좋다는 내용에 주목하고 있다고 밝혔다. 한라대학교에 입학해 일본어를 공부한 이유가 이것 때문이라고 한다. 한국에는 관련 자료가 안 보이고, 일본에는 있을 것이므로.

권 작가는 요즘 일제 침략기를 집중적으로 들여다보고 있지만, 원래는 탐라국 역사를 탐구해 역사 소설을 써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중국학자의 이야기에 호기심이 발동해 그의 말대로 '곁길'로 빠져든 것이다.
  

생태해설사 동료들과 한때 권 작가는 생태해설사, 오름해설사 과정을 수료하는 등 제주를 깊이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 권무일

 
제주로 이주한 지 20년, 권무일 작가는 진정으로 제주를 사랑하는 제주인이 된 것 같다. 그는 김만일을 다룬 책의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제주가 낳은, 제주에 뿌리내린 인물들이 제주에 다녀간 사람들에 비해 주목받지 못하고 있는 인색한 정서에 의아심을 가졌다. 누군가 나서서 제주를 빛낸 많은 인물을 발굴해주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권무일 작가는 적지 않은 나이에도 정력적으로 제주 구석구석을 누비고 있다. 제주 사람들이 살아왔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유적지를 찾아다니고, 자연이 살아 숨 쉬는 산과 들과 바다를 쏘다녔다. 오름 해설사와 생태 해설사 자격을 취득하고 동호회를 만들어 회장을 역임한 것도 모두 그의 제주 사랑을 말해준다. 권 작가를 만나고 나오면서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건강은 장담하기 어렵고 인명은 재천이고, 그래서 언제까지 건강하게 살지 모르지만, 나이를 생각하지 않고 건강과 정신력이 미치는 한 연구라기보다는 호기심을 갖고 탐구하고 싶습니다. 친구들을 보면 늙어가면서 세상사에 관한 관심이나 호기심은 줄고 대개는 건강에만 관심이 쏠려 있는 것 같아요. 늙어도 젊음을 유지하는 방법은 호기심의 창문을 열어놓는 거라고 합니다. 세상과 자연에 대해 호기심의 창문을 열어놓고, 아직 밟지 않은 땅, 보지 못한 미래를 향해 나가고 싶어요."
  

두번째 학사모를 쓴 권무일 작가 지난 2월 81세의 나이로 제주한라대 관광일본어과를 졸업한 권 작가가 동료 학생들과 졸업기념 사진을 찍고 있다. ⓒ 권무일

 
자신의 손녀딸보다도 어린 동기생들과 일본어를 배우느라 고생스러웠지만, 졸업식에서 총장상을 탔다는 '할아버지 학생'은, 요즘 황반변성으로 시력이 나빠져 책을 20분 이상 계속해서 보지 못한다고 한다. 아무쪼록 그의 타고난 호기심이 더욱 풍성한 열매를 수확할 수 있기를 기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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