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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여성에게 직업은 단순히 시집을 가기 전 잠깐 하는 일 혹은 좋은 혼처와 연결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을 때가 있었다. 그런 시대에 여성이 기술을 배워 스스로의 삶을 꾸려간다는 것은, 그것이 자의든 타의든 분명 남들과는 다른 길을 걷기로 한 결단이 없는 한 쉽지 않았을 일이다. 특히 미용에 대한 인식이 그리 너르지 않던 시절에는 말이다. 

하루 평균 10~14시간을 서있어야 했던 고된 일, 무척 적은 급여, 또한 여성이었기에 말 못할 시련과 고민도 많았을 터.

그런 일 중 하나인 미용사의 길을 개척하며 자신의 삶을 만들어온 이들을 만났다. 충북 옥천 상권의 중심, 옥천읍 금구리에서 미용실을 운영하는 9명의 여성 ▲염순옥(염미용실) ▲양혜영(양혜영헤어라인) ▲이영서(신영미용실) ▲이정연(이정연헤어나라) ▲최희선(토마토미용실) ▲김영석(도도헤어클리닉) ▲이미선(헤어빈) ▲강윤희(윤헤어&메이크업) ▲서희수(수헤어샵)씨다.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개개인의 이야기에는 어떤 시대의 흔적이 묻어있을까. 

이번 기사에서는 염미용실 염순옥(68) 원장의 사연을 소개한다. 나머지 8명의 서사는 <월간 옥이네> 3월호에서 확인할 수 있다.

미용 가위 쥐고 있는 한 언제까지나 인생의 성수기이지요 
 
염미용실 염순옥(68) 원장
 염미용실 염순옥(68) 원장
ⓒ 월간 옥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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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의 미용사(史)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곳이 있다. 옥천읍 금구리 가장 번화한 상권에 위치한 '염미용실'이다.

지금은 '염헤어'라는 간판을 내걸고 있지만 옥천 사람들에게, 또 옥천에서 미용 가위 좀 잡아봤다는 이들에게 염미용실은 여전히 전설이다. 옥천에서도 예식장이 성황이던 시절 웬만한 신부들은 모두 염미용실에서 화장을 하고 머리를 했다는 이야기, 전국 미용인들과 기술을 겨뤄 상을 휩쓸던 전적, 새로 생긴 미용실 중 어디어디가 염미용실에서 배워 나와 가게를 차렸다는 입소문...

염미용실이 막 개업했을 때만 해도 십여 개에 지나지 않던 옥천읍 미용실은 이제 100여 개에 달한다. 그 오랜 시간 옥천 미용사의 흥망성쇠를 함께하며, IMF와 코로나19 등 더 없이 시렸을 시기를 지나며 꿋꿋이 그 이름을 지키고 있다.

'옥천읍 김밥천국 사거리', 옥천을 모르는 이에겐 특정 상호를 이르는 것으로 들리지만 실은 읍내 가장 번화한 상권을 상징하는 일종의 대명사. 바로 이곳에 옥천 미용실의 터줏대감, 염미용실이 있다. 김밥천국 건 물 옆 2층에 자리한 염미용실은 130여 ㎡(약 40평) 면적에 한 번에 앉아 시술을 받을 수 있는 미용 의자만 8개로 옥천에서도 규모가 큰 곳이다. 

"한창 때는 직원만 10명에 영업 시간동안 밥 해주는 이모님이 따로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때는 직원 숙소도 별도로 있었어요." 

1990년대 초부터 이 자리에서 미용실을 운영해온 염 원장이 '염미용실이 가장 잘나가던 때'를 회상한다. "새벽같이 출근해 밤늦게 퇴근할 때까지 잠시도 자리에 앉아 쉬어보지 못했던" 때에 비하면 많이 여유로워진 미용실 풍경이지만 그는 "우리 미용실의 성수기는 바로 지금"이라고 말한다. 자신의 인생을 걸고 평생을 매진해온 일이 더 없이 즐겁고 행복하기에, 열정이 식지 않는 한 성수기는 계속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지금은 저까지 모두 3명이 함께 일하고 있지요. 예전에 비하면 직원 수도 줄고 손님 수도 줄어들었을지 몰라요. 그래도 여전히 이 일이 재밌고, 저를 찾아주시는 분들이 계시니 염미용실은 언제나 성업 중이죠." 

자립을 위해 만난 미용이 평생의 업으로 
 
지금은 '염헤어'라는 간판을 내걸고 있지만 옥천 사람들에게, 또 옥천에서 미용 가위 좀 잡아봤다는 이들에게 염미용실은 여전히 전설이다.
 지금은 '염헤어'라는 간판을 내걸고 있지만 옥천 사람들에게, 또 옥천에서 미용 가위 좀 잡아봤다는 이들에게 염미용실은 여전히 전설이다.
ⓒ 월간 옥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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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를 갓 졸업하고 미용 가위를 잡아 벌써 50년 가까운 세월이다. 그런데도 그는 여전히 사각거리는 미용 가위 소리가 좋고 손님의 머리를 매만지는 게 즐겁다. 어려웠던 시절, 자립을 꿈꾸며 미용 일에 뛰어들었으니 어쩌면 생계를 위한 수단에 불과했을 지 모를 일인데 "운이 좋게도" 그는 천생의 업을 만난 셈이다. 

"요즘은 학교에서도 미용을 가르치지만 그때만 해도 어디 그랬나요. 미용을 배운다고 하면 오히려 안 좋게 보던 때이기도 했어요. 아무래도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이나 하는 거라고 치부할 때니까요. 그래도 내가 앞으로 살아가려면 기술이 있어야겠다 싶더라고요. 그때는 결혼 생각도 없었고, 여자 혼자 잘 살려면 뭐든 기술을 배워놔야 했던 거예요."

충북 보은에서 태어난 그는 여러 사정으로 청주와 보은,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를 오가며 성장했다. 학교를 오래 다닐 수도 없던 가정 형편에 일찌감치 학업이나 결혼보다는 '스스로 꾸려갈 수 있는 삶'을 꿈꿨던 그가 '기술'을 선택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여성의 사회진출에 지금보다 많은 벽이 존재하던 시절, 돈도 없고 빽도 없는 이들에게 기술은 사실상 유일한 돌파구였다.

"원래는 패션(양장)을 배우려고 했어요. 그런데 양장 학원은 너무 비싼 거야. 어쩌지 싶어 고민하다 미용학원에 문의했더니 내가 가진 돈으로도 등록이 가능하대요. 마침 그때 만난 원장님이 정말 큰 도움을 주셨지요."

그렇게 1975년 청주에 있는 신라미용학원에서 그의 미용 인생이 시작됐다. 스스로도 '악바리' 근성이 있다고 말하는데 그 때문이었을까. 그런 그를 예쁘게 본 미용학원 원장은 그를 3개월 간 전담하며 '빡세게' 가르쳤다. 당시만 해도 연습용 가발이 없던 시절이라 수강생들끼리 서로의 머리카락으로 연습해야 했는데, 미용학원장 역시 자신의 머리를 내주며 염순옥 원장을 지원했던 것.

"수강생끼리 하면 서로 연습 모델이 되어줘야 하니, 내가 남 모델을 해야 할 때는 그만큼 연습 시간이 없는 거예요. 그런데 저는 원장님이 모델을 대신 해주셨으니 연습시간을 더 확보할 수 있었죠. 그 원장님 도움이 정말 컸어요. 처음 학원 등록할 때 3개월 안에 미용사 자격증 따게 해주겠다고 하셨는데, 정말 3개월 만에 합격을 했고요."

뜨거운 숯불로 고데기를 달궈 머리카락을 말아 올리던 시절, 3개월의 연습 시간 동안 원장의 머리를 숱하게 태워먹은 여담은 이제는 즐거운 추억이 됐다. 

하루빨리 '시다' 떼고 싶었던 스무 살 미용사
 
염미용실 염순옥(68) 원장이 일하는 모습
 염미용실 염순옥(68) 원장이 일하는 모습
ⓒ 월간 옥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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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적 빨리 미용사 자격증을 취득했지만 본격적인 미용사의 길로 접어들기까지는 험난한 과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요즘이야 거의 사라졌다지만 '시다(보조)'를 거쳐야만 가위를, 고데기를, 파마 약을 만져볼 수 있던 때. 염순옥 원장에게도 바로 이 애달픈 '시다' 시절이 있었던 것이다. 

"처음 일했던 미용실이 청주 북문로에 있었어요. 미용사 4~5명 정도 채용해서 운영하던 미용실이 꽤 있을 때거든. 지금이야 스태프(staff)라고 하지만, 나는 이제 막 들어갔으니 그냥 시다지(웃음). 손님들도 '시다 아가씨' 이렇게 불렀고요. 그 위로 중상, 미용사, 또 그 위에 일급 미용사 이렇게 구분했거든요. 아휴, 이제는 오래돼서 명칭도 다 기억이 안나네... 어쨌든 그 '시다' 소리를 빨리 벗어나고 싶어서 무진 애를 썼어요."

미용사 자격증을 가졌다 한들 시다는 월급도 없고, 손님 머리칼 근처에 손도 못 댔다. 미용실 청소와 수건·가운 세탁, 미용용품 세척이 시다 업무의 전부였던 데다 온수기도 없고 세탁기도 없어 더욱 고달팠다. 선배 미용사들이 퇴근하고 한참 뒤까지 세탁과 청소를 해야 했지만, 염순옥 원장은 바로 이 시간, 컴컴한 미용실에 혼자 남는 때를 가장 좋아했다. 그가 가위를 만지고 머리를 말며 연습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언니들(미용사) 다 퇴근하고 나면 나 혼자 연습할 수 있거든. 혼자 뚝딱거려가며 낮에 본 거 따라하는 거예요. 그리고 아침에는 제일 먼저 출근해. 미리 영업 준비도 해놔야 했지만, 가끔 보물 같은 기회가 올 때가 있었어요."

영업 중 쓸 물을 들통에 데우는 것으로 미용실의 하루를 시작하는데, 이를 위해 그는 늘 새벽같이 출근해야 했다. 그때만 해도 정해진 영업시간이랄 게 없어 눈 뜨면 미용실에 나갔는데, '시다'였던 염순옥 원장이 미용실 불을 밝히고 있으면 이른 아침부터 문을 두드리는 이들이 있던 것이다. 그가 매일 밤 홀로 연습했던 드라이, 고데기 실력을 마음껏 뽐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어디 급하게 가야 하는 손님들이 아침 일찍 와요. 근데 미용사 언니들이 출근하기 전이잖아요, 머리 맡길 사람이 나밖에 없는 거야. 이때는 시다고 뭐고 없어, 그냥 해야 해요(웃음). 떨리기도 하고 부담도 되지만 오히려 좋았어. '기회는 이때다, 연습 때보다 더 잘할 수 있어' 그런 마음으로 붙들고 정성껏 했어요. 그게 한 번, 두 번 쌓이다 보니 나중에 저를 찾는 손님들이 생기는 거예요. 나한테는 제일 고마운 손님들이었지요."

그 덕이었을까. 미용실에 입사한 지 6개월여 만에 그는 소원하던 '시다' 딱지를 뗄 수 있었다. 

[다음기사]
일흔 앞둔 '전설'의 미용사 "몸은 늙어도 기술은 안 늙습니다" https://omn.kr/237mr

월간 옥이네 통권 69호 (2023년 3월호)
글·사진 박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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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월간 옥이네, #옥천, #미용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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