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흐르다>의 포스터.

영화 <흐르다>의 포스터. ⓒ 엠엔엠인터내셔널㈜

 

주목받던 단편영화 감독의 장편 개봉 데뷔작 
 
장편영화는 단순하게 단편영화 분량을 잡아서 늘린다고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이미 역사가 한참 오래된 선배 문화예술 장르들에서 두루 검증된 사실이다. 쉽게 예시를 들자면 단편소설과 장편소설 떠올리면 이해가 금방 올 테다. 대부분 영화감독들은 단편영화로 출발하지만 장편으로 도약하기를 꿈꾼다(물론 100% 다 그런 건 아니다). 호평을 받은 단편 연출작은 감독이 장편으로 가는 길에 좋은 포트폴리오가 되어준다. 대개 단편영화로 가능성을 인정받아 제작지원과 투자가 이뤄지면 드디어 장편연출로 데뷔하는 경로를 취하게 마련이다.
 
단편에서 장편으로 자신이 세상에 보여주고픈 이야기를 확장할 기회를 얻는 게 모든 감독에게 주어지는 기회는 아니다. 오히려 현실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듯 좁은 문에 가까운 상황이다. 하지만 자신의 노력과 실적을 인정받아 장편연출에 진입한다 해도 그걸로 끝나지 않는다. 어렵사리 장편 데뷔한 감독들 중 상당수가 두 번째 기회를 얻지 못하는 경우는 허다하다. 단편을 만들 때와는 사뭇 다른 환경과 조건에 주눅 들어 자신의 장기를 발휘하지 못할 수도 있고, 단편에선 빛을 발했던 감독의 연출 스타일이 장편에선 그만큼의 시너지를 잘 내지 못하기도 한다.
 
단편영화에선 인상적인 장면 이미지나 주인공 개인의 극적인 상황전환 하나만으로도 이야기를 완성할 수 있다. 이는 단편소설이 탄탄한 반전 하나만으로도 오래 회자될 수 있는 것과 흡사한 경우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장편은 그렇게 툭툭 채워질 수 없다. 이야기는 보다 더 탄탄한 설정에다 개연성을 갖춰야할 테고, 구현해야 할 영화 속 세계는 훨씬 넓고 광대하기 마련이다. 그동안 자신의 영화에서 익숙했던 집과 동네를 벗어나 미지의 영역에 진입해야만 한다. 그렇게 안개 자욱한 가운데 낯선 길을 잃지 않고 균형감각을 유지해야 하기에 자연히 감독의 중압감은 어마어마해진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감독은 작가의 독립성이 강조되던 단편 시절보다 다소 관습적인 상업적 장편영화 법칙을 따라가며 기존의 자기 방식과 절충하려 한다. 자신 앞에 당면한 상황을 인정하고 감내하며 여백에 자신의 인장을 스며들게 하려는 대처법이다. 반면에 또 다른 감독들은 자신만의 고유한 색깔을 최대한 집약해 승부수를 던지려 한다. 지금도 한국의 영화학도들에게 레퍼런스 단편영화로 회자되는, 지금은 사라졌지만 독립영화감독의 등용문 역할을 해왔던 미쟝센 단편영화제 2017년 전체 대상 수상작 <나만 없는 집>의 김현정 감독이 드디어 선보인 첫 번째 장편영화 <흐르다>는 명백히 후자의 전형에 속한다.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소재에 바탕을 두고 지난 단편들에서 일관되게 형성해온 색깔을 집대성한다. 물론 그저 기존 작업들의 답습에 안주하진 않았지만, 누가 봐도 감독의 이름 세 글자가 깊숙하게 아로새겨지는 작업이다.
 
 영화 <흐르다>의 한 장면.

영화 <흐르다>의 한 장면. ⓒ 엠엔엠인터내셔널㈜

 
  지방 자영업자의 몰락과 청년세대 취업절벽이 교차하다
 
진영은 30대에 막 들어선 취업준비생이다. 주변의 이야기로 유추해보면 꽤 오랜 시간 '장수생'으로 지낸 듯하다. 특이하게 취업목표는 늘 멀리, 가능하면 해외로 떠나려는 방향이다. 그는 부모님이 운영하는 공장에서 가끔 일을 거들며 용돈벌이를 하지만 공장 돌아가는 사정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 보인다. 노력을 않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먼저 결혼해 분가한 언니 소영과 달리 집을 떠나 독립할 의지나 준비도 그렇게 뚜렷해보이진 않는다. 현재는 언론고시를 대비해 스터디 모임에 나가고 인터넷 영어회화 강의도 듣지만 취업에 필사적인 모습과는 거리감이 제법 있다.
 
부모님과 진영, 세 식구가 사는 아파트는 제법 넓지만 휑하고 살풍경하다. 가족 관계는 그렇게 화목하게 비춰지진 않는다. 진영은 집에서 눈치 보며 늘 웅크리는 존재다. 엄마 해수는 고집이 세고 권위적이지만 배짱만 부릴 뿐 꼼꼼한 구석은 없는 아빠 형석을 도와 빈자리를 메우며 공장 운영하는데 여념이 없다. 하지만 어릴 적부터 형제들 사이에서 열등의식에 빠져 있던 아빠는 자꾸만 무리하게 공장에 투자를 해대느라 엄마와 자주 다툰다. 진영은 그런 갈등을 그저 모르쇠로 일관한다. 하지만 그런 주인공의 가족형편을 보여준 뒤 영화는 느닷없이 전체분량의 1/3 정도 흐른 시점에서 엄마의 공백을 터뜨린다. 그리고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던 이 가족에게 거듭된 혼란과 위기가 닥쳐온다.
 
이제 엄마를 통해서만 서로 연결되며 적당히 거리두기로 일관하던 진영과 아빠는 직통으로 대면해야만 한다. 실은 진영은 스터디 모임 후배가 해외로 워킹홀리데이 나간다는 이야기에 자극받아 자신도 캐나다 워홀 자격 연령 상한에 턱걸이로 합격해 출국 준비하던 중이었다. 하지만 당장 실질적으로 경영을 책임져온 엄마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아마도 태어나 처음으로 공장 일에 신경을 쓰게 된다. 그 과정에서 지금껏 보인 적 없는 적극성을 발휘해가며 자기 일처럼 공장업무에 나서 현안 해결에 일조하기도 한다. 어찌되었건 가족이니 엄마의 빈자리를 출국 전까지는 성실히 힘닿는 한 수행하려는 진영이다. 아빠 역시 그런 딸이 기특한지 무뚝뚝하지만 수고했다며 인정하는 모양새다. 이전엔 보여주지 않던 책임감을 드러내는 진영의 표정은 결연하다.
 
하지만 아빠는 거래처 업무로 만난 적이 있던 젊고 총명해 보이는 호진을 스카우트해 공장장으로 앉힌다. 호진의 자신감 넘치는 언행과 출중한 경력에 아빠는 전적으로 신뢰를 보낸다. 진영은 엄마의 자리를 자신이 아닌 호진이 차지하는 방향으로 상황이 진행되자 시원섭섭해한다. 차라리 미련 없이 캐나다로 떠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워홀 초기정착을 위한 자금을 지금은 여력이 없다며 빌려주지 않는 아빠의 태도에 직면한 진영은 불길한 기운을 느낀다.
 
아니나 다를까, 사업 확장을 위해 무리한 대출을 쓰던 공장은 납품처의 횡포로 경영난에 휩싸인다. 호진과 언쟁하던 중 아빠의 폭언과 폭력에 발끈한 진영은 지금껏 보여준 바 없던 격렬한 항의와 분노를 아빠에게 토해낸다. 얼마 후 은근슬쩍 화해와 도움을 청하는 아빠를 도와 공장 정리에 나서지만 미련을 버리지 않고 허망한 궁리에 몰두하는 아빠의 고질병은 고쳐지지 않는다. 과연 둘만 남은 부녀 사이의 관계는 어떻게 흘러갈까?
 
현대 한국가족의 위기를 전하다
 
첫 장편의 국문제목은 <흐르다>다. 벼르고 별러 선택한 첫 번째 장편 데뷔작의 제목이란 감독에게 의미가 결코 작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제목을 듣는 순간, 고전영화 좀 본다고 자부하는 이들은 금방 일본 고전영화의 4대 거장으로 손꼽히는 나루세 미키오 감독의 1956년 동명의 영화와 본 작품이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분석하기 시작할 테다. 그리고 그 직감은 별로 틀리지 않았다. 물론 제목만 동일할 뿐 영화 속 내용이 구체적으로 겹치지는 않지만, 우리가 흔히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들을 관통하는 코드로 언급하는 요소들이 <흐르다>에서도 쉽게 확인된다. 여성 주인공에 가족 중심의 소재, 굵직한 사건 전개보다는 주요 인물들의 응축된 감정을 섬세하게 연결해 끌어가는 이야기 전개 등 나루세 미키오 영화들에서 발견되는 주요한 스타일을 김현정 감독은 마치 헌정하듯 따라간다. 감독은 거장에 대한 '오마주'를 숨기지 않는다. 마치 2020년대 한국사회로 배경을 옮겨와 나루세 감독의 작품세계 전반을 아우른 리메이크 시도라 해도 위화감이 없을 정도다.
 
이에 비해 영문제목은 보다 직설적이다. '모래 위의 집'이라니 말이다. 사회적 쟁점을 중심축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흐르다> 속에는 21세기 들어 축소일로를 걷는 가족 공동체의 초상과 함께 가속화되는 사회적 계층분화 속 위기에 처한 지방도시 풍경이 가득하다. 영화의 시작과 함께 아빠가 보는 텔레비전 뉴스에선 영화 배경인 대구광역시의 경제위기가 언급되고 이후 수차례 반복해서 등장한다. 그런 가운데 큰 소리는 치지만 어릴 적부터 이어온 열등감과 '경상도 마초'들의 목소리 크지만 실제로는 유약한 면모를 한데 합쳐놓은 듯 형상화된 아빠 대신 공장 살림을 책임지다시피 해온 엄마의 급작스런 부재는 가족의 위태롭던 균형을 일거에 뒤흔들기 시작한다. 그동안 엄마에게 책임을 전가해온 부녀는 좋든 싫든 대면해야만 한다. 그들 앞에 놓인 위기가 만만찮기 때문이다.
 
한때 '섬유도시'였다가 지금은 제조업 하청업체 위주로 재편된 대구의 지역경제 특성은 은근한 배경으로 서울 수도권 배경의 독립영화들과는 살짝 다른 분위기를 조성한다. 주인공 가족의 중소 제조업 공장은 외국인 노동자와 뜨내기 인력으로 겨우 지탱하는 중이고 언제든 유동성 위기에 봉착할 살얼음판 상태다. 괜찮은 일자리를 구하기 힘드니 공장의 사무직원이건 스터디 그룹 구성원이건 기회만 되면 타향으로의 탈출을 도모한다. 주인공 역시 해외 워킹 홀리데이 도전이 처음이 아니다. 똑같은 취업난을 다루더라도 배경이 다르면 풍경이 달라지게 마련이다. 지방의 위기는 수도권보다 훨씬 복잡하고 더 생경하다.
 
그런 위태로운 상황을 영화는 (나루세 미키오 영화세계의 현대적 해석처럼) 지독히 섬세하고 미묘한 감정 선으로 펼쳐낸다. 주인공 진영은 수시로 분노를 드러내지만 그 재현방식은 극도로 절제되어 있다. 감정을 폭발시키더라도 꾹꾹 눌러 참다 마침내 터뜨리는지라 그 직전까지는 마치 겉보기엔 평온하지만 수면 아래에선 격하게 부딪히는 해류와도 같다. 감독의 자전적 체험이 짙게 녹아들었을 게 분명한 이야기 전개는 여전히 가부장제 권위주의를 고수하는 부모세대와 그 때문에 질식할 것 같지만 여러 조건상 불만을 분출하지 못하는 자녀세대의 간극을 정밀하게 묘사하는데 일정한 성취를 이룩하고 있다.
 
감독의 지난 단편들에선 주인공이 단독자로서 명확히 서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감독의 이름을 널리 알린 <나만 없는 집>에선 맞벌이 부모 하에서 용모가 빼어난 언니에게 늘 소외된 둘째 딸, 첫 단편 <은하비디오>에선 헤어진 연인을 잊지 못하는 독신여성, <입문반>에선 늦깎이 영화공부를 위해 지방에서 서울로 시나리오 수업을 다니는 만학도 여성이 단일 축으로 이야기를 끌고 간다. 하지만 근작 <외숙모>에선 장편을 예비하듯 전개 축이 보다 중층적으로 구성된다. 그리고 장편에 이르러서는 진영이 주인공이긴 하지만 끊임없이 아빠와의 대칭성이 부각되며 딸과 아빠가 형성하는 버디무비처럼 공동 주인공에 가까운 형태로 확장된다. 감독의 호평 받았던 단편 라인업과 장편 데뷔작 사이의 연계와 변주를 살펴보는 건 작품 독해에서 뺄 수 없는 경로일 테다.
 
 영화 <흐르다>의 한 장면.

영화 <흐르다>의 한 장면. ⓒ 엠엔엠인터내셔널㈜

 

이보다 더 섬세할 수 없는
 
<흐르다>는 서로 간격을 벌린 채 반복되는 시간을 보내기만 해온 아빠와 딸이 둘 사이를 중재하던 엄마의 부재 국면을 맞이해 원치 않는 상황에서 서로 직면해야만 하는 상황을 밀도 높게 풀어낸다. 상류에서 하류로 강물이 흘러가며 유속은 느려지지만 수량은 증가하는 것처럼 영화는 제목에서 연상되는 서사의 전개를 취한다. 그렇게 도도한 물결처럼 점점 이미지와 사건들이 합해져 이야기가 나중이 되면 제법 묵직해진다, 2시간여를 지탱하기 위해 이것저것 주변 설정을 끼워 넣을 법도 한데 감독은 정공법으로 승부하려는 초지일관 태도다.
 
그래서 사뭇 단조로울 수 있는 스토리텔링에 변주를 주고자 영화 속 주요 등장인물의 일거수일투족은 고도로 세분화되며 수미상관 형식을 구현한다. 영화의 시작점에서 주인공은 목욕탕에서 거울을 바라보는데 이때 거울은 수증기로 부옇게 흐린 상태다. 마치 모든 게 불확실한 주인공의 현재 상태를 조망하는 느낌이다. 그리고 영화 말미에 또다시 주인공은 거울을 전혀 다른 상황에서 바라보는데 그 순간에는 산전수전 경유한 그의 상태처럼 거울 표면이 매끈하게 주인공을 비춘다. 아주 간단하지만 효과적인 전달방식이다. 제한된 배경 내에서 서로 겹쳐지는 일상의 소소한 '씬'들이 곰곰이 생각해보면 의미심장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런 장면의 교차대조가 위력을 발휘하는 장면들이 남용되지 않으면서도 유용하게 이정표 노릇을 해낸다. 이런 찰나들은 관객에게 보물찾기 시험처럼 기능한다. 그렇게 촘촘히 구획된 장치들을 따라가면서 과연 이 부녀가 어떤 결말을 선보일 지 관심도를 놓지 않도록 지원한다.
 
2시간을 꽉 채운 러닝타임 내내 흔히 상업영화 개봉작품들이 취하는 극적 스펙터클과 신파적 카타르시스의 순간은 특별히 제공되지 않는다. 그 대신에 우리가 현실의 인물들을 투영하듯 관조하게 만드는 풍경들이 가득하다. 등장인물 캐릭터는 장편 치고는 꽤나 단출하지만 배우들의 표정이나 행동 하나하나가 의미와 역할을 형성하며 족적을 남긴다. 상업영화와 드라마에서 제법 얼굴이 익은 이설 배우는 실제 진영이 있다면 저런 모습일 것처럼 보이고, 아빠 역의 박지일 배우는 '경상도 아재'의 민낯을 그대로 표상한다. 여기에 독립영화계에서 신뢰받는 엄마 역 안민영 배우와 언니 역 강진아 배우가 든든하게 '현실가족' 분위기를 떠받친다.
 
그렇게 영화는 잔잔한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격하게 벌어지는 가족 간의 대립과 갈등을, 쇠락해가는 지방도시 대구와 청년실업 시대 취업준비생의 풍경화를 배경으로 화면 가득하게 채워낸 풍속화처럼 남긴다. 물론 장편영화 치고는 심심하다고 느껴질 수도, 여전히 감독이 자기반영적인 사적 경향에 치우쳐 있다고 아쉬움을 표할 이도 나올 법하다. 하지만 적어도 영화 후반 어떤 결정적 순간에는 주인공의 얼굴에 감독이 덧입혀진 것처럼 보이는 '마법 같은 찰나'가 이 영화에는 분명히 존재한다. 그 순간 배우의 얼굴은 감독의 얼굴로, 다시 배우의 얼굴로 돌아온다. 정말 그렇게 보였다. 그렇게 감독 자신이 반평생 내내 부딪혀온 가족이란 집단에 대한 단호한 시선과 어쩔 수 없는 애증이 한데 어우러져 흐른다. 천천히, 하지만 타협 없이 흘러간다.
 
<작품정보>
 
흐르다 On the Sand House
2021|한국|드라마
2023. 3. 29. 개봉|123분|12세 관람가
감독 김현정
출연 이설(진영 역), 박지일(형석 역), 안민영(해수 역),
       강진아(소영 역), 이한주(호진 역)
제작 영화문
배급 엠엔엠인터내셔널㈜
 
2021 47회 서울독립영화제
2022 10회 무주산골영화제
2022 13회 부산평화영화제
2022 22회 전북독립영화제
흐르다 김현정 감독 이설 박지일 안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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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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