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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봉에서 장불재 가는 길. 광주 무등산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 중의 한 곳이다. ⓒ 임영열
 
가난이야 한낱 남루(襤褸)에 지나지 않는다.
저 눈부신 햇빛 속에 갈매빛의 등성이를 드러내고 서 있는
여름 산 같은
우리들의 타고난 살결 타고난 마음씨까지야 다 가릴 수 있으랴.

청산이 그 무릎 아래 지란(芝蘭)을 기르듯
우리는 우리 새끼들을 기를 수밖에 없다.

- 미당 서정주 시인의 시 '무등을 보며' 중에서


시인에 대해 이런저런 말들이 많지만 누가 뭐라 해도 미당 서정주(未堂 徐廷柱, 1915~2000) 시인이 우리 문학사에 남긴 족적은 결코 작지 않다. 시인은 자신이 쓴 950여 편의 작품 중에서 "가난이야 한낱 남루(襤褸)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했던 이 시를 가장 사랑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시인의 고향인 전북 고창에 있는 그의 무덤 앞 묘비에도 '무등을 보며'가 새겨져 있다. 이 시는 6.25 전쟁 직후 그가 광주에 있는 조선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던 1954년 발표한 작품이다.
     
헐벗고 굶주리던 시절, 한 달 월급으로 '겉보리 열닷 말'을 받으면서도 경제적 궁핍에 절대로 매몰되지 말고 무등산의 의연하고 고고한 모습을 닮자고 설파한다.
     
그랬다. 무등은 광주 사람들에게 단순한 산 그 이상의 특별한 존재다. 지조와 기개와 평등의 상징이다. 먼 옛날부터 나라가 위태로울 때는 어김없이 충신과 열사들이 나왔고 평화로울 때 시인묵객들은 수많은 불후의 명작들을 남겼다.

미당은 매일 무등산 밑에 자리한 학교와 남광주역 근처의 집을 오가며 무등산을 바라봤던 소회를 자서전으로 남겼다. "무등산은 앞에 앉은 산과 뒤에 앉은 산의 두 겹으로 돼 있다. 앞에 있는 것은 엇비슷이 누워 있는 것 같고, 뒤에 있는 산은 뭔가 안심찮아 일어나 있는 것 같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런 모습은 어쩌면 두 오랜 부부의 어느 오후의 휴식 같은 모습"이라고 했다.
     
어느 봄날 오후. 피곤에 지쳐 엇비슷이 누워있는 아내를 뒤에서 편안하게 받쳐주고 있는 남편의 모습을 닮은 무등산이라니! 어느 누구도 묘사하지 못한 기가 막힌 표현이다. 시인이란 바로 그런 존재다. 불현듯 뭔가에 이끌리듯 배낭을 꾸리게 되는 건 순전히 미당 선생님 때문이다.

무등산에서 가장 편안한 길
 
덕산계곡 초입에 자리한 무지개다리 ⓒ 임영열
 
바람재에서 토끼등 가는 길. 광주 무등산에서 가장 편안한 길이다. ⓒ 임영열
 
일 년 중 가장 아름답고 빛나는 4월의 첫 번째 일요일인 지난 2일. 틀에 박힌 일주일간의 일상을 벗어나 휴식 같은 무등의 품으로 향한다. 완연해진 봄기운 탓일까. 무등산행의 기점이 되는 증심사 버스 종점에는 가벼운 등산복 차림의 산객들로 붐빈다.

무등산에는 거미줄처럼 수많은 길들이 길에 잇닿아 있다. 그중에서도 증심사 지구는 교통이 편리하고 접근성이 좋은 관계로 산행객의 약 7할 정도가 이곳으로 몰린다.
                 
이날은 증심교에서 바람재를 지나 토끼등을 찍고 중머리재와 장불재·중봉을 거쳐 다시 중머리재로 돌아오는 코스를 선택했다. 그곳에 무등산에서 가장 편안하고 안락한 휴식 같은 길과 가장 아름다운 길이 있기 때문이다. 미당의 말대로 바람재와 또끼등 중머리재는 앞에 앉아있는 아내 같은 산이고, 중봉과 장불재는 남편처럼 뒤에서 버티고 앉아있는 산이다.

증심교 갈림길에서 산객들은 양쪽으로 갈린다. 좌측에 있는 덕산계곡 방향으로 길을 잡는다. 계곡 초입에 있는 무지개다리를 노랗고 하얀 벚꽃과 갓 돋아난 연초록의 잎새들이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다. 봄나들이 나온 일가족도 다리 위에서 꽃으로 피어난다.
     
오랜 가뭄으로 가늘어진 시냇물은 봄바람 따라 졸졸 흐르며 하얀 꽃잎들을 부지런히 실어 나른다. 일명 '무당골'로 부르는 덕산계곡은 광주 현대사의 큰 아픔이 있었던 곳이다. 이른바 1977년 봄날에 일어난 '무등산 타잔' 사건이다.

당시 도심에서 밀려난 도시빈민들이 이곳 덕산 계곡에 들어와 무허가 움막집을 짓고 살았다. 그해 4월 전국체전을 앞두고 무등산 정화사업을 위해 철거반원들이 들이닥쳤다. 이 과정에서 낮에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고시공부 하던 21살 청년이 철거반원 4명을 살해한 사건이다. 지금도 계곡 군데군데에 그때 삶의 흔적들이 생채기처럼 남아 있다.

평등의 산에서 불평등의 현장을 마주하며 40여 분 가쁜 숨을 몰아쉬며 언제나 시원한 바람이 부는 바람재에 도착했다. 물 한 모금으로 잠시 휴식을 취한 후 토끼등으로 향한다. 이제부터 약 20여 분 동안은 무등산에서 가장 편안한 길을 걷게 된다. 넓고 완만한 길이 광주 시내를 배경으로 이어진다.
           
이 길은 1982년 원효사에서 바람재와 토끼등에 이르는 약 3.5km에 이르는 관광도로를 개설하면서 생겨났다. 개설 당시 무등산 보호단체의 반대가 있었지만 길 양옆의 철쭉과 단풍나무는 늦은 봄과 가을에 무등산의 명물이 된다. 길 중간에 광주 시내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와 약수터가 있다.

휴식 같은 시간이 지나고 길은 중머리재로 이어진다. 1.7km 남짓이 되는 이 곳 또한 오르막이 거의 없는 완만한 길의 연속이다.

무등산 봉화대가 있었다는 봉황대와 백운암터를 지나 무등산의 중심 허브 중머리재에 도착했다. 무등산의 교통 요충지 중머리재는 거센 바람 때문에 나무 한 그루 자라지 않아 마치 '스님의 머리' 같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등산객의 7할 정도는 이곳에서 하산한다. 가을이 오면 억새꽃이 장관을 이룬다.
 
광주 무등산의 중심허브 중머리재 ⓒ 임영열
          
무등산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

스님 머리를 떠나 무등산의 9부 능선 장불재로 향한다. 이제부터는 미당 선생님 말마따나 앞에 앉아 있는 산이 뭔가 안심찮아 뒤에 서있는 산속으로 접어든다. 지금까지 걸었던 평탄한 길은 잊어야 한다. 조금씩 경사가 심해지고 울퉁불퉁한 너덜길이 이어진다.

30여 분을 오르자 돌틈 사이에서 솟아나 흐르는 실개천을 만난다. 광주천의 발원지 '샘골'이다. 임진왜란 때 호남 의병장이었던 제봉 고경명(1533~1592)의 무등산 답사기 <유서석록>에 의하면 고경명 장군은 광주목사 임훈(1500~1584)과 함께 1574년 초여름에 무등산에 오른다.

일행은 샘골에서 잠시 쉬는 동안 미숫가루를 타 마시며 "금장옥례(金醬玉醴)에 비할쏘냐"라며 물맛에 감탄한다. 광주의 시원과도 같은 유서 깊은 곳이지만 샘가 돌들은 무너지고 관리가 허술하다는 느낌이다. 나그네도 막걸리 한 사발로 원기 충전 후 힘차게 발걸음을 내딛는다.
 
광주천의 발원지 샘골 ⓒ 임영열
 
광주 무등산 9부 능선에 위치한 장불재. 뒤로는 입석대와 서석대가 보인다. ⓒ 임영열
      
이윽고 푸른 하늘이 여릿여릿 다가오는가 싶더니 일순간 하늘이 열리고 장불재에 닿았다. 장불재는 무등산 9부 능선에 있는 넓은 개활지다. 옛날 광주, 담양, 화순 사람들이 만나 교류와 소통의 장을 만들었던 곳이다. 2007년 노무현 대통령도 장불재에 올라 산상연설을 했다. 너럭바위 옆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좀 더 멀리 봐주십시오. 역사란 것은 정확하게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멀리 보면 보입니다. 눈앞의 이익을 좇는 사람과 역사의 대의를 좇는 사람이 있습니다. 대의만 따르면 어리석어 보이고 눈앞의 이익을 따르면 영리해 보이지만 그러나, 멀리 보면 대의가 이익이고 가까이 보면 이익이 이익입니다."
     

노무현의 '멀리 있는 이익'을 상기하면서 무등산 절경 중 한 곳인 '중봉'으로 향한다. 한 줄기 시원한 바람이 귀밑머리를 간지럽힌다. 발걸음은 절로 가벼워진다. 무등산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중봉에서 바라본 광주 무등산 정상의 모습. 왼쪽이 천·지·인왕봉이고 가운데가 서석대, 오른쪽에 입석대가 있다. ⓒ 임영열
 
모퉁이를 돌아서자 S자로 아름답게 휘어진 길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길 양옆으로 겨우내 살을 말린 노란 억새들이 막 돋아나는 파릇한 풀포기들과 조화를 이루며 서로의 배경이 돼 준다. 봄이 오는 길목에 노란 엘로우 카펫이 깔렸다.

일명 '사랑로'로 명명된 이 길은 머잖아 푸른 새 풀옷으로 갈아입을 것이다. 1990년대 중반까지 군부대가 있었으나 부대 이전 후 탐방로로 조성한 길이다. 식생 복원의 우수 사례로 회자되고 있다. 가을이면 억새 명소로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지만 가을뿐만 아니라 사시사철 매력적인 무등산의 절경 중 한 곳이다.
          
무등산의 중심 봉우리 중봉에 올라선다. 무등의 정상 천·지·인왕봉 가는 길이 Z자 형태로 이어진다. 서석대와 입석대, 장불재는 손에 잡힐 듯 다가오고 멀리 담양에서 이어지는 절경들은 한눈에 담기지 않는다.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뒤로하고 중머리재로 하산한다. 이 길은 경사는 심하지만 볼거리들이 많은 길이다. 약 100여m 내려오자 아름다운 기암괴석들 사이 위태롭게 서있는 한 그루의 소나무와 조우한다. 영화나 드라마에도 나왔던 무등산의 명품 소나무다. 주변의 모든 나무들은 잎을 다 떨구었지만 자신만의 푸른빛을 간직하고 있다. 변심과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세상에서 어떻게 중심을 잡고 사는지 온몸으로 설하고 있다.
         
작가 김훈은 말한다. "무등산은 삶 속의 산이다. 세상이 끝나는 곳에서 솟아 오른 산이 아니라 세상 속으로 내려와 있는 산이다. 아마도 이 산은 기어이 올라가야 할 산이 아니라 기대거나 안겨야 할 산인 듯싶다."

중머리재에서 내려다보는 광주 시가지의 모습이 따뜻한 봄날의 오후처럼 평온하다. "무등산은 사람을 찌르거나 겁주지 않고 사람을 부른다"라는 김훈 선생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무등산에 직접 와보면 알게 된다.       
 
장불재에서 중봉으로 가는 길. 광주 무등산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이다. ⓒ 임영열
 
중봉에서 중머리재로 하산하는 길에 마주하는 명품 소나무 ⓒ 임영열
 
기암괴석 사이에 피어난 진달래가 유독 붉다 ⓒ 임영열
                                                 

덧붙이는 글 | ‘내 고장 봄 여행 명소 공모’ 기사입니다.

태그:#무등산, #중머리재, #중봉, #사랑로, #장불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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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문화재단 문화재 돌봄사업단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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